詩--詩한 970

상돈아. 술 마시다 칵 죽어삐리자 / 박영철

상돈아. 술 마시다 칵 죽어삐리자 / 박영철 어떤 놈은 여자 배 위에서 씩씩거리다 죽고 어떤 놈은 복 사시미 쳐먹다 죽는다는데 또 어떤 놈은 아침에 처자식들 앞에서 오늘부터 술 끊는다고 장담했다가 인생이 허망해져서 저녁에 목 매달았다는데 대장암 수술 받고 저번 금요일날 퇴원한 상돈아. 이제 술담배 끊는다고 장담한 내 친구 상돈아, 그냥 평소에 하던 짓 그대로 하다가 죽자. 담배 물고 술 마시다가 해롱헤롱 죽자는 말이다. 안 하던 짓 어쩌다 하면 꼭 탈 난다 안 카드나. Edward Simoni / Feuer Tanz

詩--詩한 2020.08.05

산경 / 도종환

산경 / 도종환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했다 산도 똑같이 아무 말을 안 했다 말없이 산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 산도 내가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하늘은 하루 종일 티 없이 맑았다 가끔 구름이 떠오고 새 날아왔지만 잠시 머물다 곧 지나가 버렸다 내게 온 꽃잎과 바람도 잠시 머물다 갔다 골짜기 물에 호미를 씻는 동안 손에 묻은 흙은 저절로 씻겨 내려갔다 앞산 뒷산에 큰 도움은 못 되었지만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 George Skaroulis - This Land Is Your Land

詩--詩한 2020.07.31

땡볕 - 손광세

땡볕 - 손광세 ​ 7월이 오면 그리 크지 않는 도시의 변두리쯤 허름한 완행버스 대합실을 찾아가고 싶다. ​ 죽이 다 된 캐러멜이랑 다리 모자라는 오징어랑 구레나룻 가게 주인의 남도 사투리를 만날 수 있겠지. ​ 함지에 담긴 옥수수 몇 자루랑 자불자불 조는 할머니 눈부신 낮꿈을 만날 수 있겠지. ​ 포플린 교복 다림질해 입고 고향 가는 차 시간을 묻는 흑백사진 속의 여학생 잔잔한 파도를 만날 수 있고 ​ 떠가는 흰 구름을 바라보며 행려승의 밀짚모자에 살짝 앉아 쉬는 밀잠자리도 만날 수 있겠지. ​ 웃옷을 벗어 던진 채 체인을 죄고 기름칠을 하는 자전거방 점원의 건강한 웃음이랑 ​ 오토바이 세워 놓고 백미러 들여다보며 여드름 짜는 교통 경찰관의 초록빛 선글라스를 만날지도 몰라. ​ 7월이 오면 시멘트 뚫고..

詩--詩한 2020.07.24

7월 / 허연

7월 / 허연 쏟아지는 비를 피해 찾아갔던 짧은 처마 밑에서 아슬아슬하게 등 붙이고 서 있던 여름날 밤을 나는 얼마나 아파했는지 체념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낮게만 흘러다니는 빗물을 보며 당신을 생각했는지 빗물이 파놓은 깊은 골이 어쩌면 당신이었는지 칠월의 밤은 또 얼마나 많이 흘러가버렸는지. 땅바닥을 구르던 내 눈물은 지옥같았던 내 눈물은 왜 아직도 내 곁에 있는지 칠월의 길엔 언제나 내 체념이 있고 이름조차 잃어버린 흑백영화가 있고 빗물에 쓸려 어디론가 가버린 잊은 그대가 있었다. 여름날 나는 늘 천국이 아니고 칠월의 나는 체념뿐이어도 좋을 것 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 내가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詩--詩한 2020.07.18

寶池를 보다 / 홍해리

寶池를 보다 / 홍해리 官谷이란 곳에 寶池가 있다 끝없이 너른 연못이 蓮으로 덮혀 있는데 하루 종일 돌아도 끝이 없다 흔한 紅蓮 白蓮이 아니라 온갖 크고 작은 갖가지 연이 다 있다 마른 우뢰가 이따금 멀리서 우는 한낮 문을 활짝 열고 있는 집집마다 금은보화가 가득가득 쌓여 있었다 동행한 仙人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눈길이 바쁘게 달리고 있었다 집안에서 술을 거르고 있는 섬섬옥수 버들허리의 처녀애들이 바쁘게 나다니고 향기로운 술냄새가 밖으로 흘러나왔다 손님들이 수없이 드나들지만 조용하기 절간만 같았다 우리도 어느 집 문안으로 들어서자 열여섯 손길이 이끌어 자리를 잡고 잠시 기다리자 가야금을 앞세우고 연꽃 낭자가 술상을 차렸는데 천년 된 느티나무 아래 금빛 마루였다 오색 술병에 든 액체는 화택의 것이 아닌 천..

詩--詩한 2020.07.17

초여름의 꿈 / 황동규

초여름의 꿈 / 황동규 긴 겨울 눈에 주저앉은 비닐하우스가 생시처럼 여기저기 널려 있는 꿈 깬다 초여름에 겨울 꿈을 꾸다니 프로이트에 의하면 진짜 꿈은 다 개꿈이라지만 꿈의 출구에 삶의 입구 표지를 붙일 수는 없다 새벽길 나서니 길섶 흥건히 젖어 있고 먼동 트는 하늘에는 금빛 별 무리 땅에는 은빛 별꽃 무리 별꽃, 석죽과의 막내 꽃 별빛 한 줄기 줄기는 별꽃잎의 하트형이라고 초여름 새벽이 일러준다 지금 뛰는 가슴도 하트형이다 가라 그냥 가라 별꽃이 삶의 이마에 뜰 때까지 삶의 출구가 꿈의 입구로 열릴 때까지 가라 그냥 가라 별꽃이 아니면 또 어떠리 이 세상 어디엔가 꽃이 눈뜨고 있는 길이면 초여름 새벽을 가라 L'etreinte (포옹), Nathalie Fisher

詩--詩한 2020.07.14

풍경의 깊이 / 김사인

풍경의 깊이 / 김사인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년이나 이백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

詩--詩한 2020.06.20

소리의 뼈 - 기형도

소리의 뼈 - 기형도 김교수님이 새로운 학설을 발표했다. 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것이었다. 모두 그 말을 웃어넘겼다. 몇몇 학자들은 잠시 즐거운 시간을 제공한 김교수의 유머에 감사했다. 학장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은 일 학기 강의를 개설했다. 호기심 많은 학생들이 장난삼아 신청했다. 한 학기 내내 그는 모든 수업 시간마다 침묵하는 무서운 고집을 보여주었다. 참지 못한 학생들이, 소리의 뼈란 무엇일까 각자 일가견을 피력했다. 이군은 그것이 침묵일 거라고 말했다. 박군은 그것을 숨은 의미라 보았다. 또 누군가는 그것의 개념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모든 고정관념에 대한 비판에 접근하기 위하여 채택된 방법론적 비유라는 것이었다. 그의 견해는 너무 난해하여 곧 묵살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 다음 학기부..

詩--詩한 2020.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