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詩한 970

어떤 날 - 도종환

어떤 날 - 도종환 어떤 날은 아무 걱정도 없이 풍경 소리를 듣고 있었으면 바람이 그칠 때까지 듣고 있었으면 어떤 날은 집착을 버리듯 근심도 버리고 홀로 있었으면 바람이 나뭇잎을 다 만나고 올 때까지 홀로 있었으면 바람이 소쩍새 소리를 천천히 가지고 되오는 동안 밤도 오고 별 하나 손에 닿는 대로 따다가 옷섶으로 닦고 또 닦고 있었으면 어떤 날은 나뭇잎처럼 즈믄 번뇌의 나무에서 떠나 억겁의 강물 위를 소리없이 누워 흘러갔으면 무념무상 흘러갔으면... Morning Air - Bandari

詩--詩한 2020.11.14

가을 안부 - 이향아

가을 안부 - 이향아 안부만 묻습니다. 봄에는 멍들어 엎드렸었고 여름에는 마파람에 헤매었었고 서리 맞은 감 같이 삭는 내 속을 피 처럼 찍어 내는 지금은 가을. 주소를 씁니다. 그대가 살아 있는 지상의 골목 국경보다 울울하게 솟아 있는 곳 낙엽 위에 녹물 같은 사연을 적어 백 마디 말씀은 침 삼켜 넘깁니다. La Muse Et La Lune - Monika Martin (뮤즈와 달)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詩--詩한 2020.10.26

청자부/ 박종화

청자부/ 박종화 선은 ㅡ 가냘픈 푸른 선은 ㅡ 아리따웁게 구울려 보살같이 아담하고 날씬한 어깨에 4월 훈풍에 제비 한 마리 방금 물을 박차 바람을 끊는다. 그러나 이것은 천 년의 꿈 고려 청자기! 빛깔, 오호! 빛깔 살포시 음영을 던진 갸륵한 빛깔아, 조촐하고 깨끗한 비취여, 가을 소나기 마악 지나간 구멍 뚫린 가을 하늘 한 조각 물방울 뚝뚝 서리어 곧 흰 구름장 이는 듯하다. 그러나, 오호 이것은 천 년 묵은 고려 청자기! 술병 물병 바리 사발 향로 향합 필통 연적 화병 장고 술잔 베개 흙이면서 옥이더라. 구름 무늬 물결 무늬 구슬 무늬 칠보 무늬 꽃 무늬 백학 무늬 보상 화문 불타 무늬 토공이요 화가더라 진흙 속 조각가다. 그러나 이것은 천년의 꿈 고려 청자기! 청성곡 / 김응서 대금독주

詩--詩한 2020.10.22

10월 - 오세영

10월 - 오세영 무언가 잃어간다는 것은 하나 씩 성숙해 간다는 것이다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돌아보면 문득 나홀로 남아 있다 그리움에 목마르던 봄 날 저녁 분분히 지던 꽃잎은 얼마나 슬펐던가 욕정으로 타오르던 여름 한 낮 화상입은 꽃잎들은 또 얼마나 아팠던가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이 지상에는 외로운 목숨하나 걸려 있을 뿐이다 낙과여! 네 마지막 투신을 슬퍼하지 말라 마지막의 이별이란 이미 이별이 아닌 것 빛과 향이 어울린 또 한 번의 만남인것을 우리는 하나의 아름다운 이별을 갖기 위해서 오늘도 잃어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 김동규

詩--詩한 2020.10.12

엇갈림/성미숙

엇갈림/성미숙 혼자남아 떨고있는 마지막 달력한장을 거두어 접습니다 내가 보낸것도 아닌데 등 떠밀듯 가는세월에 마음마저 싸늘해집니다 어깨가 무겁도록 짓 눌러온 삶의 무게도 울며샜던 수 많은 밤도 가슴 멍울지도록 그리움에 몸부림쳤던날도 내가 살아온 방식입니다 그대는 내게 애틋한 시와 뭉클한 노랫말이었지요 생각만으로도 하루종일 입가에 흥얼거려지고 어느 한 멜로디에 꽂혀 한동안 헤어나지 못하게 하는... 아픔이되고 상처로 남아도 허투루 보낸 아까운 시간은 아니었지요 지금도 여전히 보고파하고 그리워 하니까요 처음 그때의 애틋했던 그 마음이 바래지고 낡아지고 싸구려같은 생각만듭니다 정성을 다 할수도 한발 다가설 수 도 없는 내 시한부 사랑에 눈물로 채우는날이 더 해 갑니다 시리도록 찬 바람이 파고드네요 세상에 혼자..

詩--詩한 2020.10.08

질 경 이 / 류시화 ​

질 경 이 / 류시화 ​ ​그것은 갑자기 뿌리를 내렸다 뽑아낼 새도 없이 슬픔은 질경이와도 같은 것 아무도 몰래 영토를 넓혀 다른 식물의 감정들까지 건드린다 ​어떤 사람은 질경이가 이기적이라고 말한다 서둘러 뽑아 버릴수록 좋다고 그냥 내버려 두면 머지않아 질경이가 인생의 정원을 망가뜨린다고 ​그러나 아무도 질경이를 거부할 수는 없으리라 한때 나는 삶에서 슬픔에 의지한 적이 있었다 여름이 가장 힘들고 외로웠을 때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슬픔만이 있었을 뿐 ​질경이의 이마 위로 여름의 태양이 지나간다 질경이는 내게 단호한 눈짓으로 말한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또 타인으로부터 얼마만큼 거리를 두라고 ​얼마나 많은 날을 나는 내 안에서 방황했던가 8월의 해시계 아래서 나는 나 자신을 껴안고 질경이의 영토를 ..

詩--詩한 2020.09.01

안개꽃 / 복효근

안개꽃 / 복효근 꽃이라면 안개꽃이고 싶다 장미의 한복판에 부서지는 햇빛이기보다는 그 아름다움을 거드는 안개이고 싶다 나로 하여 네가 아름다울 수 있다면 네 몫의 축복 뒤에서 나는 안개처럼 스러지는 다만 너의 배경이어도 좋다 마침내 너로 하여 나조차 향기로울 수 있다면 어쩌다 한 끈으로 묶여 시드는 목숨을 그렇게 너에게 조금은 빚지고 싶다

詩--詩한 2020.08.19

아내는 안해다 / 오탁번

아내는 안해다 / 오탁번 토박이말사전에서 어원을 찾아보면 '아내'는 집안에 있는 해라서 '안해' 란다 과연 그럴까? 화장실에서 큰거하고 나서 화장지 다 떨어졌을 때 화장지 달라면서 소리쳐 부를 수 있는 사람, 틀니 빼놓은 물컵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생일 선물 사줘도 눈꼽만큼도 좋아하지 않는 그냥 그런 사람. 있어도 되고 없으면 더 좋을 그런 사람인데 집안에 있는 해라고? 천만의 말씀! 어쩌다 젊은 시절 떠올라 이불 속에서 슬쩍 건드리면 ─ 안 해! 하품 섞어 내뱉는 내 아내!

詩--詩한 2020.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