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詩한 970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 도종환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 도종환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 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 번쯤은 꼭 다시 걸어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물어오지 않고 같이 온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패여 있는 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려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

詩--詩한 2021.04.01

나싱개꽃 - 송진권

나싱개꽃 - 송진권 몸써리야 그까짓 게 뭐라구 그 지경이 되서두 꼭 움켜쥐구 있더랴 봉다리에 정구지 담다가 팩 씨러져서 아무리 흔들어도 안 일어나더랴 ​ 구급차 안에서두 꼭 쥐구 있더라구 병원 같이 따라갔던 국화가 얘기 안 햐 나물 장사 오십 년 장바닥에 기어 댕기며 맨날 벳기구 다듬는 게 일이라더이 ​ 이렇게 가구 나면 서방이 알아주나 새끼가 아나 도척이 같구 아귀 같다구 숭이나 보지 우리 거튼 장돌림들이나 그 속 알지 누가 알어 ​ 심천 할머니 가는 길에 돈 보태며 거기 가서는 언 밥 먹지 말고 뜨신 국밥이라두 사 먹어유 ​ 할머니 앉았던 자리 보도블록 비집구 싸래기 같은 나싱개꽃 피는디 나물 장사 앉았던 자리 씨를 받아 드문드문 나싱개꽃은 피는디 Elegy / Michael Hoppe

詩--詩한 2021.03.16

남자들의 비밀 가리개 / 문정희

남자들의 비밀 가리개 / 문정희 보름달이 일어나고 스러지는 일몰과 일출이 밤낮 없어서 부끄러운 비밀을 가린 가리개다 그나마 차마 보일 수 없지만 벗을 수 있다는 허물로는 아픈 고통만을 잉태하는 감옥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곳을 밝게 드러내 보이려고 당신만의 손길이 필요한 깃발이다. 얼굴에 있는 체면을 감춘 팬티 속에 노다지 광맥을 소중한 사랑으로 캐내기 위한 성전의 성벽이다. 그러나 팬티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사람이 만들어 놓은 체면이다.

詩--詩한 2021.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