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學笛

송준길, 송시열, 윤증

푸른하늘sky 2019. 5. 26. 12:46

동춘당  송준길


1. 동춘당(同春堂)

논산에서 돈암서원과 김장생 무덤을 보고 난 뒤에 우리는 서대전 톨게이트로 들어가서 다시 대전 톨게이트로 나온다. 대전 톨게이트 바로 부근에 동춘당이 있다.
대전 광역시 대덕구 송촌동에 있는 조선 중기의 건축물. 보물 제 209호. 이곳은 이제 대전에 편입되었기에 그런 주소를 갖는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이곳은 일반적으로 회덕(懷德)이라 했다. 그래서 바로 이 부근에 있는 호남 고속도로와 경부 고속도로가 갈리는 곳을 '회덕 분기점'이라 한다. 이 회덕에는 은진(논산에 있음) 송씨들이 예로 부터 몰려 살았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송씨들의 마을', 즉 '宋村'동이다. 이 송씨 마을에서 배출한 유명한 두 사람이 송준길(宋浚吉)과 송시열이다. 이 둘은 친구로서 함께 연산에 김장생에게 배웠다. 송시열은 이 동춘당에서 동쪽으로 떨어진 가양동의 남간정사에서 살았다. (동춘당 다음에 남간 정사로 간다.)


대전은 예전에는 한적한 너른 들이었다. 당시 충청도의 중심은 대전이 아니라 대전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져 있는 공주였다. 그런데 일제 시대에 경부선 철도가 대전으로 가는 바람에 공주는 팍 죽고 대전은 커질대로 커져서 그 넓다는 '한밭' 들판은 이제 집들로 가득차고 넘쳐서 주변으로 퍼지고 있다. 송준길이 살았던 당시에는 너른 들판이었을 한밭의 북쪽 나지막한 계족산-성재산-응봉산이 이어지는 산자락에 송씨 집성촌이 있었다. 그는 유명한 사람이었으므로 이 마을에서 상당히 크게 집을 짓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 예전의 송촌 마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아파트들이 들어서고 있다. 이 송촌동 아파트 단지를 지으면서 동춘당과 그 옆 종가집 건물만 남겨 두고 주변을 꾸며서 공원으로 만들었다. 요즘 한참 짓고 있는 아파트 숲 속에 자리잡은 동춘당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다. 그 오른쪽에 있는 종가집 건물은 종손들이 살고 있다.


동춘당은 효종 때 병조판서는 지낸 송준길이 자신의 호(同春堂)을 따서 건축한 별당이다. 이 별당의 서북측에서는 송준길의 고택인 사랑채와 안채·사당 등이 독립된 건물로 건축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송준길의 집 가운데 송준길이 거쳐한 사랑채를 '동춘당'이라 한 것이다. 이 사랑채 뒤쪽에 살림을 하는 안채와 사당채가 있다. 이제 퇴락한 건물에는 먼지만 쌓여 있다. 건물 바깥의 공원이 깨끗하게 단장된 것과는 기묘한 대조를 이룬다.


동춘당 ; 정면 3칸, 측면 2칸의 -자형 평면으로 된 단층 팔작 지붕이며, 앞면을 널찍하게 다듬은 돌로 쌓은 단층 기단 위에, 다듬은 돌 초석을 놓고 방주를 세워 주두 없이 직접 굴도리를 받친 민도리집 양식이다. 가구는 오량으로 대들보를 앞뒤의 평주 위에 걸고 높이가 낮은 동자 기둥을 세워 종보를 받치고 다시 그 위의 판대공에 소로만을 짜넣어 종도리 밑의 장여를 받치고 있다. 서쪽에는 정면1칸 측면2칸의 큰 온돌방을 두고 그 동쪽에는 정면 2칸 측면2칸의 대청을 두었다.


방의 전면과 대청의 전면 측면 뒷면에는 좁은 툇마루를 달았는데 난간은 없다. 대청의 전면 창호는 띠살로 된 들어 열개인데, 그 중 하나에는 작은 들창을 달아, 겨울철에는 들어열개인 분합문을 닫고 지낼 수 있도록 하였다. 방의 창호는 띠살로 된 여닫이창이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팔작 지붕으로 막새 기와는 사용하지 않고 잇다. 이 건물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별당 건축물로 규모도 크지 않고 선비의 기질을 잘 나타낸 간소한 건물이다.

 

2. 송준길의 삶

송준길(宋浚吉 1606∼1672 선조39∼현종13).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문묘에 배향된 해동 18현의 한 사람. 영천 군수를 지낸 송이창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이이를 사숙하면서, 20세 때 김장생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과 예학에 관한 가르침을 받았다. 친척인 송시열과 함께 김장생에게 배우면서 각분한 교분을 맺어 나갔으며,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렸다.


출신 및 관직 생활 ; 1624년(인조2) 진사가 된 뒤, 학행으로 천거받아, 1630년 세마(洗馬)에 임명된 이후, 내시 교관·동몽(童蒙) 교관·시직·대군(大君) 사부(師傅)·예안 현감·형조 좌랑·지평·한성부 판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관직에 나가지 않았고, 단지 1633년 잠시 동몽 교관을 맡았다가 장인 정경세(鄭經世; 이황→유성룡의 제자)의 죽음을 이유로 사퇴했다. 그 20여년 간 벼슬에 나가지 않고 향리에 머물면서 학문에만 전념했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김장생의 아들이며, 산당(山黨)의 우두머리인 김집을 이조판서에 기용하는 등 척화파와 재야 학자(山林)들을 대거 등용할 때 송시열 등과 함께 발탁되어 부사직·진선(進善)·장령 등을 거쳐 집의에 임명되었고 통정대부로 품계가 올라갔다. 집의로 있으면서 송시열과 함께 효종의 북벌 계획에 참여하는 한편, 인조말 이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공서파(功西派; 공훈으로 권력잡은 서인)의 핵심 인물인 김자점·원두표 등을 탄핵하여 파직시키고, 청서파(淸西派; 의리 명분론으로 여론을 주도하던 서인들)가 집권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김자점 일파가 효종의 북벌 청책을 청에 밀고하여 그와 송시열 등 산당(山黨; 淸西派)은 청의 압력으로 모두 벼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 뒤 집의, 이조참의 겸 찬선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향리에 묻혀 지냈다. 1658년(효종9년) 대사헌, 이조참판 겸 좨주를 거쳐 이듬해 1659년 병조판서·지중추원사·우참찬에 임명되어 송시열과 함께 효종의 측근에서 국정을 보필했다. 1659년 효종이 죽은 뒤 자의(慈懿) 대비의 복상 문제를 둘러싸고 이른바 제 1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그는 송시열의 기년복(朞年服) 주장을 지지하여, 논란을 거듭한 끝에 남인의 윤휴·윤선도·허목 등의 3년설 주장을 물리치고 기년제(朞年祭; 만1년상)를 관철시켰다. 이 해에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고, 우참찬·대사헌·좌참찬 겸 좨주·찬선 등에 여러 차례 임명되었으나, 기년제를 규탄하는 남인들의 거듭되는 공격으로 계속 사퇴했다. 다만 1665년 원자의 보양(輔養)에 대한 건의하여 첫 번째 보양관으로 잠시 봉직한 것을 제외하고는 관직에 발을 끊고 회덕에 머물러 살면서 여생을 마쳤다.


1672년(현종 13년 3월) 그가 죽은 뒤, 1673년(현종14) 1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674년 효종의 왕비인 인선(仁宣) 대비가 죽자 또 한 차례 자의 대비의 복상 문제가 일어나서, 이번에는 남인의 기년제 이론이 송시열의 예론에 따른 서인의 대공설(大功說; 9개월)을 눌러 이겼다. 남인이 주장을 관철시킴으로서 정권을 장악했고, 1675년(숙종1)에 남인인 허적(許積) 윤휴 허목 등이 생전에 송준길이 기년복을 지지했다고 공격하여 관작을 삭탈당하였다. 이어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관작이 복구되었다.


학문과 저서 ; 학문적으로 송준길은 송시열과 함께 이이의 충실한 후계자로서 이이-김장생-김집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주류를 형성했던 정통 성리학자였다. 특히 예학(禮學)에 밝아 그의 문집에는 예설(禮說) 관한 문답이 많으며, 스승인 김장생으로부터 예학(禮學)의 종장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다고 한다. 이기론에서는 이이의 이기설을 충실히 계승하여 이기의 선후이합설과 호발설을 반대하고 기발이승일도설을 지지했다. 또한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는데 [충렬사 비문] [尹啓 殉節 碑文] 등이 현재 남아 전해오고 있다. 저서에는 {동춘당집} {어록해}가 있다.
1681년 숭현서원에 제향되고, 1756년(영조32) 문묘에 제향되었으며, 충현서원 봉암서원 돈암서원 용강서원 창주서원 홍암서원 성천서원 등에도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이다.

 

* {동춘당집}에 수록된 그의 편지는 대부분 예 이론(禮說)에 관한 질문과 문답으로 되어 있다. 그가 힘 쓴 곳, 깨달은 곳은 예학(禮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찍이 그의 스승 김장생은 그를 가리켜 동방의 예가(禮家; 禮 전문가)의 종장(宗匠)이 될 것이라 했다 한다. 그의 문하에서는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는데, 대부분 송시열의 문하에도 드나든 사람들이다. 그 가운데 저명한 사람은 남구만 송상민 송규렴 등이 있다.

 

3. 송준길과 충청도 지식인들

그는 송시열과 가까운 친척 사이이며, 김장생 문하의 동창이며 벗이었다. 뿐만 아니라, 송시열은 어려서 송준길의 집에서 숙식하면서 송준길의 존고모부 되는 김장생의 사계 서당에서 수학한 관계로 시종 뜻과 행동을 같이 했다. 그 둘은 노론의 쌍벽을 이루는 학자로서, 학문 경향이나 정치적 입장이 같았을 뿐만 아니라, 나라의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도 대부분 의견이 합치했다. 다만 송시열이 전투적인 성격으로 상대파를 꼭 이겨야 하겠다는 집념(好勝의 癖)이 강하여 적이 많았던데 비해서, 그는 인품이 원만하고 날카로움(圭角)을 드러내지 않아 다른 당파로부터 비교적 비판받음이 적었다. 그래서 송시열은 먼저 죽은 그의 묘지명에 그를 평가하여, "대저 사랑을 주로 삼고 예로서 일을 처리하였다. 그러므로 윤리가 지극히 바르고 은혜와 의리가 지극히 돈독하여, 다 후세의 모범/스승이 될만 했다"고 했다.


중국 남송 때의 지식인 이통(李 )의 질박하되 정밀함을 사모한 그는 장인 정경세(이황→ 유성룡의 제자, 남인)의 영향을 받아 평생토록 이황을 스승/모범으로 삼고 흠모하고 사숙했다고 하는데, 성리학설은 이이의 학설을 따랐다. 당시 나라의 '큰 늙은이'(大老)라는 존숭을 받았던 송시열과 함께 '두 송씨'(兩宋), 혹은 '두 문정(文正; 둘다 시호가 文正임)'이라 불리며 서인-노론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받았다.


그런데 송준길이 죽은 2년 뒤인 현종 15년 5월에 둘 사이에 잡음이 생겼다. 송준길이 작성했으나 보내지 않은 상소문이 발견되어, 손자인 송병문이 조정에 바쳤다. 그것은 송준길이 예송 논쟁에서 송시열에 부화뇌동해서 왕실의 종통(宗統)을 문란시킨 죄를 지었다는 내용이다. 예송(禮訟)에서 송시열을 지지한 자신이 잘못됨을 뉘우친 내용 때문에 두 집안은 사이가 멀어졌다. 송병문은 송시열의 제자였으므로, 송시열 집안에서는 그를 '스승을 배반한 사람'(背師)로 보게 되었다. 송준길이 이런 상소를 짓게 된 것은 아마 예송 논쟁에서 송시열이 윤선도 등 남인에 대해서 강경했으나, 송준길은 비교적 관대했다. 이경석(李景奭) 등 당시 많은 서인측 인사들이 송시열의 강경 노선에 반발했다. 또한 송준길의 장인인 정경세는 유성룡(이황의 제자)의 제자로서 남인 쪽 사람이었다. 송준길이 죽을 무렵에는 예론(禮論)에 있어서 송시열 쪽이 결정적으로 불리할 때였다. 즉 송시열의 주장이 효종의 종통을 부정한다는 남인의 주장이 먹혀들어가던 때였다. 서인에서 남인으로 정권 교체가 눈에 보이던 때였다. 송병문은 남인이 집권할 경우 죽은 송준길에게 화가 미칠까 봐서 그 상소문을 바쳤을 것이라 한다. (강주진, {이조 당쟁사 연구} 216-7쪽)


영조 22년(1756) 둘은 나란히 문묘에 종사되었는데, 이후부터 그 둘의 후학과 자손들 사이에서 위패를 두는 순위 문제가 일어나서 노론 기호학파 안에서 분란이 일어났다. (송준길의 후손인 송명흠과 송시열의 후손인 송능상이 서로 절교하는 지경까지 갔다.) 이른바 '우암-동춘 시비'(尤-春/春-尤 是非)라 불리는 이 위패 서열 문제는 두 집안/후학 사이의 고질적인 다툼으로 계속 이어졌다. (이는 영남학파에서 이황의 수제자들인 유성룡과 김성일의 위패 순서 문제로 싸운 '屛-虎 시비와 비슷한 것이다.)


송시열과 송준길은 함께 인조 이래 숙종 때까지 충청도(특히 대전-논산) 지역 지식인들이 중앙 정계를 장악하고 일세를 풍미하게 만든 사람이었다. 송준길과 송시열은 음-양의 관계 비슷한 '최고의 파트너'(最佳 拍當)였다. 그런데 송시열이 죽고 난 이후, 즉 숙종 이후 충청도 노론 지식인들은 점차 중앙 정계에서 밀려나고 서울 노론이 독점한다. 그런 와중에 송시열과 송준길의 후손 사이의 그 위패 순서 같은 문제로 싸움으로 더욱 충청도 노론은 시들어갔다. (송준길의 후손 송명흠은 서울 노론 학자인 이재(李縡)의 제자가 되어 서울 노론에 접근한다.) 결국 조선조 말에는 송시열을 모신 화양동 서원에서 묵패(墨牌; 명령서)를 발행하여 양민들의 재산을 갈취하는 지경에까지 갔다. 우암과 동춘의 덕이 그렇게 쇠해진 것이다.

 

우암 송시열과 남간정사


1. 남간 정사 (南澗精舍)


송준길의 사랑방이었던 동춘당을 나와서 동쪽으로 약 15분쯤 가면 남간 정사가 있다. 이곳도 경부 고속도로 부근이다. 무슨 보건 전문 대학으로 들어가는 좁은 길을 따라가다 보면 나온다. 대전시 동구 가양동 외곽의 한 야산 기슭.


찻길을 따라 세워진 돌담 안쪽으로 조선시대의 낡은 기와집 3~4 채가 눈에 들어온다. 수령 200~300년의 고목들과 어우러져 아늑하면서도 그윽한 정취가 풍기는 고택들. 이곳은 비록 규모는 작지만 한 때 지식인 사회(士林)의 여론을 좌우하고 조정의 국사까지 결정하던 장소였다. 효종 이래 서인-노론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1607~1689)이 말년에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세웠다는 남간 정사(南澗精舍)이다.


남간정사의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지름 20m 가량의 연못이다. 돌을 잘 다듬어 쌓아올린 연못 너머 정면으로 남간정사가, 오른쪽으로 대문 바로 옆에 기국정(杞菊亭)이 자리를 잡고 있다. 남간정사 뒤쪽 언덕에는 송시열을 모신 사당인 남간사(南澗 祠)가 있다. 남간사는 송시열이 죽은 뒤에 세워진 것이고 기국정은 대전시 소제동(대전역 부근)에 송시열 고택과 함께 있던 것을 일제 때 이곳으로 옮겼다. 본디의 남간정사는 연못을 내려다 보는 건물 한 채에 불과했던 셈이다.


남간정사는 전면 4칸 측면 2칸의 작고 단아한 건물이다. 팔각주 초석 위에 기둥을 세워 길게 뻗은 처마를 받쳤으며 지붕은 겹처마 팔작 지붕을 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두드러진 특징은 전면 4칸 가운데 가운데 2칸의 밑을 파내 건물이 공중에 떠있도록 한 점이다. 뒤쪽 옹달샘에서 솟아난 물이 연못으로 흘러들도록 만드느라 가운데를 기둥으로 받치고 공간을 비워놓은 것이다. 남간정사와 기국정 사이에는 또 다른 물길을 만들어 연못으로 물이 흘러 들도록 했다. 연못으로 모인 물은 대문 옆 배출구를 통해 다시 빠져나가 일정한 수위를 유지하도록 했다. 우리나라 정원 조경에 있어 보기 드문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남간정사-기국정-사당은 담으로 둘러 싸여 있고, 평소에는 문을 열어 놓지 않는다. 따라서 담장에서 발돋움해서 넘어다 봐야 한다. (하긴 들어가서 봐도 별로이겠지만.) 이곳에서 산위로는 대전시가 110억원을 들여서 [우암(尤庵) 사적 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그러므로 여기 오는 사람은 우선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바로 위로 난 문을 통해 사적 공원으로 가 버린다. 아래 쪽에 언제나 닫혀 있는 남간 정사는 그냥 지나치기 일쑤이다. 공원으로 올라가면 바로 송시열의 문집인 {송자대전} 목판을 보관하고 있는 장판각이 있다. 거기에서 위로 올라가면 돌담으로 둘러싸인 서원으로 꾸며 놓은 구역이 나타난다. 제법 가파른 계단을 올라 안으로 들어가면 정면에 전교당, 양쪽에 동재 서재에 해당하는 건물이 있다. 그리고 이 서원 왼쪽 바깥에 또 건물이 있다. 이 모든 것이 새로 지은 건물이다. 전체적으로 상당히 고심해서 꾸민 공원이다. 이 서원 구역의 동재나 서재에는 마루가 있다. 여름에 그곳에 앉으면 매우 시원하다. 산마루이기 때문에 '한밭'이라는 대전이 눈 앞에 펼쳐져 있다. 송시열은 아마 가끔 여기 부근에 와서 한밭을 내려다 보지 않았을까?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높은 곳을 좋아하니까...


남간정사는 송시열이 조정에서 물러나와 숙종 9년(1683년)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주자의 시 [운곡남간(雲谷南澗)]에서 '구름 낀 골짜기 남쪽 양지바른 곳에 흐르는 시내'를 뜻하는 '남간'이란 말을 빌려 이름을 지었다. 이는 자신을 주자에 비유한 것으로 그의 자부심이 대단했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대목이다. 실제로 당시 유림에서 송시열의 위상은 너무나 컸다. 송시열은 이 작은 건물에 앉아 전국 사림의 여론을 좌지우지했다. 심지어 조정 관리들이 이곳까지 찾아와 중요 사안을 그에게 물어 결정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정치적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남간정사는 조선 유림의 큰 줄기를 형성했던 서인-노론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송시열의 평생 동지였던 송준길이 후학을 가르쳤던 동춘당, 박팽년과 송시열의 아버지 송갑조를 모신 정절서원 터 등 많은 유적들이 주위에 남아 있으나 남간정사를 첫 번째로 꼽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한겨레신문 1997. 12. 2.)

 

2. 송시열의 일생

우암 송시열은 인조부터 숙종까지 네 임금에게 벼슬한 주자학의 거유(巨儒)이다. 또한 노론(老論)의 개조(開祖)로서 당쟁의 핵심적 존재이기도 했으며, 명나라를 존숭하고 청나라를 배격한 정치가이기도 했다.


888(八八八)책으로 된 조선 왕조 실록 가운데 한 사람의 이름이 3천 번 이상 나오는 것은 송시열 한 사람 뿐이다. 그는 한쪽에서는 '공자 맹자 주자'와 동격인 '송자(宋子)'라 부를 만큼 존경했다. (혹은 '나라의 큰 늙은이(大老)'라는 존칭을 받았다.) 반면 반대파는 그를 미워하여, 자기 집 개 이름을 '시열'이라 지어서 불렀다고 한다. 그를 좋아하든 미워하든 간에 그의 이름이 실록에 그렇게 나오는 것은 그가 효종 이래 중앙 정계와 학계에 태풍의 눈이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선조40~숙종15)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 서인-노론(老論)의 영수(領袖).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 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 문정(文正). 아명은 성뢰(聖賚). 아버지는 사옹원 봉사를 했던 송갑조(宋甲祚)이고 어머니는 선산 곽씨. 충북 옥천군 구룡촌(九龍村)의 외가에서 태어나 26세(1632)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후에 회덕(懷德; 현재의 대전)의 송촌(宋村)동 비래(飛來)동 소제(蘇堤)동 등을 옮겨가면 살았기 때문에 회덕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선조 40년 2월 3일 어머니 곽씨는 명월주(明月珠)가 입으로 들어오는 태몽이 있은 후 그를 낳았다 한다. 또한 그가 태어날 시간쯤에  아버지 송갑조는 마침 종가의 제사에 참례하기 위해 청산 땅에 가 있었는데 전날 밤 꿈에 공자가 제자들을 거느리고 자기 집에 오는 꿈을 꾸어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받았다. 이에 "이 아이는 성인이 주신 것이라" 하여 '성뢰(聖賚)'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⑴ 젊었을 때의 공부

8살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의 집에서 함께 송준길의 아버지인 송이창(宋爾昌)에게 공부하게 되어 훗날 '양송(兩宋)'이라 불리는 각별한 교분을 맺게 된다. 그 때부터 송시열은 자기보다 한 살 위인 송준길과 같이 공부하게 되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 후 일생을 두고 학문과 정치 생활에 있어 그와 고락을 같이 하는 사이가 되었다.


12살 때 아버지로 부터 {격몽요결}(이이가 쓴 책임), {기묘록}(조광조가 죽은 기묘 사화를 적은 책) 등을 배우면서 주자 이이 조광조 등을 흠모하도록 배웠다. 그는 가끔 아들 송시열을 앉혀 놓고 "주자는 후대의 공자(後孔子)이고 율곡은 후대의 주자(後朱子)이니 공자를 배우려면 먼저 율곡에게서 비롯하라" 했다.


1625년(인조3) 도사 이덕사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 무렵부터 날마다 대전에서 연산으로 가서 김장생에게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1630년(인조8) 아버지의 3년상을 벗은 송시열은 김장생에게서 {심경} {근사록} {가례} 등을 배웠다. 김장생은 이이의 제자였고, 송시열은 이이의 학통을 이어 받아서 그의 학설의 기초로 삼는다. 1년 뒤인 1631년 김장생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김집에게 배웠다. 그 뒤에 송준길의 권유에 따라 회덕(懷德) 송촌(宋村)으로 옮아 와서 그와 한 마을에 살면서 같이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기골이 뛰어나게 장대하여 체력이 매우 좋았다. 대전(懷德)에서 신독재 김집이 사는 연산까지는 50리나 떨어져 있었으나, 송시열은 매일같이 책과 도시락을 메고 다녔다. 그는 흔히 연산까지 가기 10리 못 미쳐서 점심밥의 절반을 먹고 나머지는 싸서 나뭇가지에 걸어 두었다가 오는 길에 먹곤 하였다. 송시열이 만년에 도보로 산수를 유람할 때면 따라나선 문생들이 미쳐 쫓아갈 수 없을 만큼 잘 걸었던 것이라든가, 넓은 개울이나 도랑을 평지같이 걸어다닌 것은 모두 그의 뛰어난 체력과 대전-연산을 걸었던 훈련 때문이었다. 그는 뒤미처 못 따라오는 제자들에게 흔히 "3시마다 한 되 밥을 못 먹고, 하루에 백 리 길도 못 가는 사람은 학문도 능히 성취해 내지 못하는 위인이다" 라고 했다. 지금도 대전 회덕에서 연산까지는 차로 30분 넘게 걸리는 길이다. 공부란 체력에서 나온다.

 

⑵ 그의 화려한 벼슬살이


27세(인조11, 1633)에 송시열은 생원 시험에 장원하였다. 시험 문제는 "한번 음하면 한번 양하는 것을 길이라 한다"(一陰一陽謂道)라는 {주역}의 말이었다. 그는 태극/음양으로 이 세계의 변화를 철학적을 설명했다. 고시관들이 꺼려했으나, 대제학 최명길이 장원으로 뽑았다. 그 해 10월 경릉참봉(敬陵參奉)으로 부임하였으나, 나이 많은 어머니를 떠나 먼 곳에 있을 수 없다고 하여 곧 돌아오고 말았다. (이게 말이 되나? 처음부터 가지 말지.)


29세(인조13 1635) 때 그의 일생을 결정하는 중대한 일이 있었다. 그는 약 1년간 봉림 대군(鳳林大君; 뒷날 효종)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이때 봉림대군은 둘째 아들이었기 때문에 궁궐 밖에서 살았던 것 같다. 그가 세자가 된 것은 형인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돌아와서 독살된 뒤이다. 또한 이때 송시열과 더불어 고산 윤선도도 봉림대군의 사부였다.) 아마 그의 과거 시험 답안이 철학적이어서 학문으로 꽤 알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봉림대군은 그에게 매우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던 듯, 효종으로 등극하자 송시열을 파격적으로 신임했다. 그 신임을 바탕으로 송시열은 서인의 영수가 된 것이다.


다음 해인 30세(1636)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그는 인조를 따라 남한 산성으로 들어갔다. 이듬 해 1월말 인조는 청나라에 치욕의 항복을 하고,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먼 머리를 조아리는 항복 의식을 치루었다. 이 꼴을 볼 수 없다고, 송시열은 속리산으로 가서 거기서 난을 피하고 있는 어머니를 모셨다. (그는 청나라와 결전을 벌여서 죽을 때까지 싸우자는 강경파였다. 그런데 죽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그런 강경론의 결과인 항복 의식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속리산으로 도망 비슷하게 갔는데, 아마 청나라가 강경파를 색출하여 처단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시기에 대표적 주전파-강경파인 김상헌도 멀리 안동의 옛 고향으로 도망간다. 문제는 송시열이 친구 윤선거가 강화도의 함락 때 죽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데서 생겨난다.)


그는 좌절감 속에서 황간 냉천리(冷泉里)로 내려가 독서와 강학을 하니,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인조가 죽을 때까지 10여년간 그에게 용담 현령·세자 익위·익선·진선·지평 등의 벼슬을 주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서지 않았다. (공부에만 몰두하게 된 좌절감. 그것은 아마 김장생의 이념인 예학(禮學)이 현실/병자호란에서 처절하게 깨지자, 서인의 집권 이념을 모색한 것 같다. 전쟁에서 병신처럼 패배한 서인이 계속 집권해야 하는 근거를 그는 소중화론에서 찾는다. 그것은 예학(禮學)에서 한 걸음 더 나간 것이다.)


인조 27년(1649, 43세) 효종이 즉위하여 척화파(淸西파) 및 재야 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그에게도 세자 시강원 진선, 사헌부 장령 등의 관직을 주어 불렀으므로, 10년 은거를 깨고 그는 비로소 벼슬에 나갔다. 이때 그가 올린 [기축봉사 己丑 封事]는 그의 정치적 소신을 긴 글로 진술한 것인데, 그 가운데 특히 존주 대의(尊周 大義 ; 주나라를 높여야 하는 큰 뜻)와 '원수 갚아 치욕을 닦음'(復  雪恥)를 역설한 것이 효종의 북벌(北伐) 의지와 부합되어, 장차 북벌 계획의 핵심 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그는 이완(李浣) 장군과 더불어 문무(文武)의 측면에서, 북벌을 추진하는 효종의 팔다리(股肱)가 되었다.


인조 때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을 죽이는 것 등에 공헌을 세워 영의정까지 올랐던 김자점(金自點; 濁西-洛西파)을 효종이 귀양 보냈다. 이듬해 1650년 2월, 이에 반감을 품은 김자점의 아들 김식(金 )이 부제학 신면(申冕)과 공모하여 효종이 새로운 인재(주로 山黨)를 등용하여 청나라를 칠 계획을 꾸미고 있다고 청나라의 조정에 밀고하였다. 이에 청나라는 병력을 국경에 출동시켜 압박을 가했다. 송시열을 비롯한 산당(山黨; 淸西) 일파는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1653년에 충주 목사, 1654년에 사헌부 집의, 동부승지 등에 임명했으나 나서지 않았다.


1655년(효종6년, 49세)에 모친상을 당하여 이후 3년 가까이 향리에서 머물렀다. 1657년 상을 마치자 곧 세자 시강원 찬선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정유 봉사 丁酉封事]를 올려 시무책을 건의했다. (이 내용에 효종이 공감했나 보다. 송시열은 바로 기축-정유 두 번의 봉사로 사림의 여론을 장악하고, 왕의 지지를 얻어낸 것 같다.) 이듬해 1658년(52세, 효종 9년) 7월 효종이 밀지(密旨)까지 내리며 간곡하게 부탁하자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특지(特旨)로 이조판서에 오르게 되었다. 이 때 그는 여섯 번에 걸쳐 상소를 올리며 사양하였으나 왕은 받아들이지 않고 더욱 강경하게 돈소(敦召)하여 하는 수 없이 그 자리에 앉게 됨으로써 비로소 본격적인 정치 생활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이듬해 5월 효종이 급서(急逝)하기 까지 효종의 절대적인 신임 속에 북벌 계획의 중심 인물로 활약했다.


이때가 그의 벼슬살이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였다. 효종의 신임은 두터워서 그의 진언과 시책은 왕이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특히 북벌을 논의할 때면 효종은 다른 신하는 물론 승지와 사관(史官)마저 내보내고, 송시열과 단독으로 논의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독대(獨對)이다. 국왕은 공적으로 직책을 수행해야 하고, 모든 것이 기록되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신하와 사관이 입시해야 한다고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독대 내용을 송시열 자신이 기록하여 두었는데, 뒤에 「효종실록」편찬 때에 사료(史料)로 쓰이게 되었다.


효종 5년 겨울 효종은 이례적으로 전교를 내려서, "이조판서 송시열이 입시(入侍)할 적에 입은 옷을 보니 너무 엷어 이 추위에 질병이 생길까 근심되니 털옷 한 벌을 즉시 하사하라"하였다. 이에 송시열은 "지금 우리 처지로서 누더기를 입으면서라도 참아가면서 국력을 길러야 할 터이니, 실오라기 한나라도 허비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이같은 사치품을 입을 수는 없습니다"라고 사양했지만 효종은 듣지 않았다. 며칠 뒤에 송시열이 왕을 뵙자 "경은 내가 옷을 주는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장차 요동 평야의 눈보라 치는 벌판에서 이 털옷을 입고 같이 달려 보자는 것이오" 라고 했다. 이로 보면 두 사람은 서로 깊이 공감하는 동지였던 것 같다. (혹은 송시열이 북벌에 소극적이기에 이런 일을 효종이 벌렸을 것이다.) 효종이 끝내 북벌을 실현 못하고 돌아가자, 그는 해마다 왕의 기일(忌日)이 돌아오면 이 털옷을 꺼내어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이런 옷이 있었으니 송시열의 권력이 있지.)

 

⑶ 윤휴와의 싸움


1659년 5월 효종이 갑자기 죽고, 현종이 즉위했다. 그리고 김장생 이래 송시열의 주전공이었던 예론(禮論)의 문제, 즉 조대비의 복제 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났다. 이 문제로 송시열이 이끄는 서인은 남인과 치열하게 싸웠다. 그 남인의 이론가 윤휴는 송시열이 필사적인 집념을 가지고 타도하려는 대상이었다. 효종 때 송시열의 적이 청나라였는데, 이제 윤휴가 되었다.


송시열과 윤휴(尹 ; 白湖)는 매우 가까워야 할 사이였다. 병자호란 뒤 31살인 송시열이 속리산에 내려와서 공부할 무렵 윤휴를 만나서 서로 토론하며 함께 공부했다고 한다. 10살 위인 송시열은 윤휴를 좋아했고, 3산(三山)에 있는 윤휴의 집에 찾아와 토론하면서 사흘씩이나 숙식을 같이 할 정도였다. 그 뒤 송준길에게 편지를 보내 자기가 30년 닦은 학문이 윤휴에 비해 우습다고 했다. 이 무렵은 그 둘 뿐만 아니라 송준길 권시 이유태 윤선거 등 대전 중심의 20-30대인 충청도 지식인들이 함께 공부했던 것이다. 또한 권시(權 ; 炭翁)의 둘째 아들 권유(惟)는 송시열의 장녀와 결혼했고, 권시의 큰 딸은 윤휴의 큰아들 윤의제와 결혼했다. 따라서 송시열과 윤휴는 사돈 사이이다.


이후 송시열은 황간의 냉천리에 10여년 간 묻혀 살면서 스승 김장생의 예설(禮說)을 발전시켜서 '존주(尊周) 대의(大義)' '소중화(小中華)'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예가 완벽히 실현된 나라는 주나라이다. 그 주나라의 문화가 중국에 있었는데(中華) 이제 청나라가 중국을 점령하므로, 우리나라에만 주나라의 문화가 있다는 것이다. 그 문화는 '강상(綱常) 윤리(倫理)' '의리(義理) 명분(名分)'으로 나타나며, 이는 주희의 성리학에서 밝혀졌고, 우리나라에서는 율곡 이이에게 이어졌다. 이런 이론에 따라서 송시열은 갓 즉위한 효종의 북벌론에 이론/이념적 토대를 제공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윤휴는 주희의 학설에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태도를 배격하고, 주희와 대등한 입장에서 독자적으로 경전을 해석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중용}에 대한 주희의 주석을 부정하고 자기가 새로 주석하여 가르친다거나, 주희의 학설이라도 틀릴 수 있다,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 혼자만 안단 말인가? 주자는 내 학설을 인정하지 않겠지만, 공자가 살아온다면 내 학설이 이길 것이다" "공자라 할지라도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 공자도 잘못된 것이 있다" 하는 태도를 가졌다. 이는 물론 경전에 대해서 자주적이고 창의적인 해석이다. 그리고 단지 학설의 문제이다. 그런데 송시열은 이를 학문의 문제가 아니라, 효종의 통치 명분인 북벌론, 서인의 집권 명분인 소중화론에 대한 도전으로 보았다. 즉 정권을 국가를 뒤흔드는 반역의 이론이었다. 그래서 송시열은 윤휴를 찾아가서 엄중하게 항의하며 논박을 했으나, 윤휴는 한술 더 떠서 "경전의 깊은 뜻이 어찌 주희 혼자만 아는 일이고 우리는 모르느냐?" 하고 일소(一笑)에 붙여 버렸다. 그 뒤 송시열은 윤휴가 (1641년 무렵) 발표한 [이기설(理氣說)]에 대하여 편지로 문책했으나, 윤휴는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드디어 송시열은 윤휴와 절교하게 된 것이다.


송시열이 효종과 짝을 이루어 서인의 영수가 되어갔다면, 윤휴는 남인의 이론/이념적 근거를 제시했다. 송시열은 윤휴를 청나라에 못지 않은, 중화(中華; 문명)을 위협하는 야만으로 보았다. 반드시 타도해야 할 대상이 된 것이다. 송시열이 효종에게 "하시는 말씀마다 모두 옳으신 분이 주자(朱子; 주희)이며, 하시는 일마다 모두 정당하신 분이 주자"라고 할 정도로 절대시했던 '주자'란 기실은 서인의 집권의 정당성을 보증해 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그 주자를 부정하는 "윤휴가 끼친 해독은 사나운 맹수와 홍수보다 더 심하다" 하면서, 그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서 없애려 했다.


황산서원 모임 ; 그래서 효종 4년(1653; 47세) 윤7월에 송시열은 윤선거(尹宣擧; 윤증의 아버지) 유계(兪棨) 등 10여명의 저명한 서인 학자들(대전 부근 지역 출신)과 황산서원(黃山書院; 논산 강경)에 모여 시회(詩會)를 열었다. 황산서원은 조광조-이황-이이-성혼을 모신 곳이었다. 이 선현들 앞에서 송시열은 윤휴를 단죄하려 한 것이다. 윤선거는 윤휴를 높이 보며, 그 학문이 높고 깊다고 했다. 반면 송시열은 윤휴가 사문난적과 같다고 극렬하게 비난했다. 이에 윤선거는 "우리는 경전의 깊은 뜻을 다 알지 못하오. 그러나 의리(義理)는 천하의 공물(公物; 모두가 소유하는 것)인데, 그대는 지금 윤휴에게 감히 말도 못하게 함은 무엇 때문인고. 주자 이후에도 경전에 대하여 조금씩 주해한 것이 많이 있지 않는가" 라고 하였다.


송시열 - "주자가 논한 바는 그 이후 지금까지 한가지 이치라도 분명하지 않은 것이 없고, 한 글자라도 흐린 것이 없다. 만일 여기에 의심이 있으면 주자의 글에 대하여 그 분명하지 않은 점을 지적하면 될 것이지(이것이 송시열의 학문임), 윤휴는 왜 마음대로 주자의 {중용} 주석의 일부를 버리고 자기 주장을 대신 내세우는가?"

윤선거 - "그것은 윤휴가 고명(高明)함이 지나쳐서 실수한 것이다."

송시열이 이에 격노하여 "그대는 주자가 윤휴만큼 고명하지 못하단 말인가? 윤휴가 도리어 주자보다 더 고명하단 말인가?" 하고 따졌다.

윤선거 - "내가 말한 '고명(高明)'이란 말은 실수이고, 윤휴가 주석 만든 것은 다만 경솔한 소치일 것이다"

송시열 - "내가 사문난적이라 한 것은 바로 그 '경솔함'을 말한 것일 뿐이다." "그대는 윤휴의 재주와 기지가 특히 고명하다고 탄복하는데, (옛날 중국의 역적들인) 왕망 동탁 조조 같은 무리가 다 고명했으니, 윤 휴도 그들과 같은 글-도둑이다. 그대도 그와 협조했으니, 이후에 만일 임금이 춘추의 법(春秋大義)에 따라 죄를 다스릴 때에는 (그 추종자를 먼저 치는 법인데), 그때 그대가 윤휴에 앞서 죄를 받을 것이다."


동학사 모임 ; 그 뒤에 송시열 윤선거 이유태 등 몇 사람이 모였다. 이 모임에서 다시 윤휴에 대해서 종일 논쟁하다 해가 저물게 되었다. 이에 송시열이 윤선거에게 다그쳤다. "길게 논쟁할 것 없다. 간단히 말해서, 주자가 옳으냐, 윤휴가 옳으냐?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른지 한마디로 말해라"라고 대들었다. 이에 윤선거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옳고 그름(是非) 보다도 흑백으로 본다면 주희는 백, 윤휴는 흑; 음양(陰陽)으로 본다면 주희는 양, 윤휴는 음이다." 라고 말하고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이에 이유태는 윤선거가 원래 비겁한 사람으로, 오늘 그의 대답은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이듬해 봄에 윤선거가 편지를 송시열에게 보내서, 흑백론-음양론은 표현상 그런 것이고, 윤휴의 인격을 말한 것은 아니다 라고 했다. 이에 송시열은 윤선거에 대해서 풀기 어려운 악감정을 가졌다. 이에 송시열의 윤휴에 대한 전쟁은 이제 윤선거를 적으로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 문제 등으로 윤선거의 아들 윤증은 송시열과 대립하여 소론의 영수가 된다.)

 

⑷ 기해 예송(己亥 禮訟) 논쟁 - 남인의 송시열에 대한 반격


1659년 5월 효종이 재위 10년만에 갑자기 죽었다. 현종이 즉위하면서, 죽은 효종에 대하여 인조의 후비인 자의황후 조씨가 몇년 복을 입을 것인가가 문제되었다. 효종은 인종의 2째 아들이었다. 예(禮)에 따르면 어머니는 장자에 대해서는 3년, 둘째에 대해서는 1년 복(服)을 입는다. 효종은 둘째 아들이니 1년복을 입으면 되겠지만, 이는 장자가 왕위 계승한다는 법도를 부정하게 된다. 이에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심지원 등은 1년복으로 의견을 정했다. 송시열 송준길도 동조했고, 그렇게 국상(國喪)을 치루었다. 그런데 윤휴가 "둘째 아들일지라도 왕이 되어 대통(大統)을 이으면, 장자로 대우해야 하며, 따라서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했다. 이에 영의정 정태화가 송시열에게 자문을 구하자 1년복이 옳다면서 든 이유이다. ⑴ {국조5례의(五禮儀)}에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1년복을 입는다"는 규정만 있고, 형제 차례(長)가 중요한가, 아니면 왕위 계승(傳)이 중요한가에 대한 규정이 없다. ⑵ 조대비는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의 상(喪)에 이미 장자복(長子服)으로 3년 복을 입었으니, 이번에는 효종이 비록 왕위에 오른 임금이라 할지라도 둘째 왕자이니, 이른바 정통은 두 길로 갈 수 없다(不二正)는 것과 참최복은 두 번 할 수 없다는 불이참(不二斬) 원칙에 따라 이번 복제는 1년복이 정당하다. ⑶ 장자가 죽고 차자가 장자로 승격하였으므로 장자와 같은 3년복을 적용하는 것은 장자가 성인이 되지 못하고 어릴 때 죽어서 그 부모가 성인에 대한 장자복을 입지 못했을 경우를 말한 것이다. ⑷ 그리고 {의례}의 주석에 "서자(庶子)에 대해서는 1년복으로 한다"는 말에서 '서자(庶子)'는 첩의 아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중서(衆庶)를 뜻하는 것으로서, 큰 아들을 제외하고는 적자(嫡出)일지라도 차자부터 다 서자라 부를 수 있다.


이에 남인의 핵심인 장령 허목과 진선 윤휴는 이 1년복제를 반대하여 "효종이 비록 인조의 둘째 왕자라 할지라도 조종(祖宗)의 대통을 이은 군주이니 마땅히 장자복인 3년제로 정할 것이다" 라고 하면서, "본부인이 낳은 둘째가 왕위에 올랐을 때는 역시 장자라고 한다"는 {의례}의 주석의 글을 들고 있다. 이 문제는 왕위 계승의 정당성과 관련하여 폭발적인 문제를 품고 있었다. 즉 송시열 이론대로 하면, 효종은 원래 왕위 계승권자가 아닌데 계승하게 되었다는 것이 두드러지게 된다. 이것을 밀고 나가면 송시열은 효종-현종의 정통성을 부정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이러 저런 논란 끝에 현종이 1년상을 채택하여 끝났다.


그런데 참의를 지낸 윤선도(남인이다)가 상소를 올려서 송시열과 송준길을 공격하였다. 그의 상소문은 구구절절이 과격하여, 예론(禮論)을 빌어서, 송시열의 서인 정권을 타도하려는 폭탄을 가득 싫은 것이었다. 그가 제시한 논점은 대략 다음이다.


⑴ 평소 효종의 신임이 가장 두텁던 신하로 송시열과 송준길에 당할 사람이 없었는데, 그들은 효종을 극진히 보필하지도 못하여, 나라가 기울어질 염려까지 있었다. (이는 아마 김자점이 청나라에 북벌을 밀고한 사건을 말할 것이다.)

⑵ 10년이나 왕위에 있던 왕을 적통의 지위도 가지지 못하게 했다. 송시열이 1년복을 주장한 것을 비판하여, "당당하게 국가의 적통을, 10년 동안이나 통치한 효종에게 돌리지 못하고, 왕노릇도 못하고 세자의 신분으로 죽은 소현 세자에게 돌리려 하고 있다. 그렇다면 효종은 가세자(假世子)였던가? 섭황제(攝皇帝)였던가?" 라고 통렬하게 비난했다.

⑶ 또 송시열이 상내에 재궁도 완전한 것을 쓰지 못하게 한 것은 과거에 없었던 변이라 할 것이다. : 재궁 문제란 효종의 소렴(小殮)을 할 때에 긴 베로 신체를 꼭 싸서 시체가 불어나지 않도록 하여야 하는데 송시열이 "지금 곧 묶는(結絞) 것은 신하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니, 대렴(大殮)까지 그냥 모시자" 고 우겼던 것을 말한다. 그래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시체를 관에 넣으려고 재궁을 모시니 시체의 부피보다 관이 좁아서 입관할 수가 없게 됨으로써 부득이 재궁에 다른 목판을 이어 폭을 넓힌 뒤에야 겨우 입관을 할 수 있었다. 군왕을 마지막 보내는 예절로는 퍽이나 미안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⑷ 능터는 길지(吉地)를 정할 것을 버리게 하고 흠이 있는 곳으로 모시게 하였다. ; 묘지 문제는 효종의 능침(陵寢)자리를 처음에 수원부(水原府)의 뒷산으로 정하였는데 송시열이 임금께 아뢰기를 "수원은 삼남으로 통하는 대로에 위치하였고, 경성보차(京城輔車)의 도읍으로서, 만약 변란이라도 일어나면 먼저 전장이 될 우려가 없지 아니한 까닭에 이러한 자리에 산릉(山陵)을 정할 수 없으니 건원릉(建元陵; 구리시에 있음) 구내에 정하는 것이 좋다" 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모두 그의 주장대로 결정되었다.


이 상소문이 올라가자 이제 예송은 학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완전히 정치적인 싸움이 되었다. 이 상소문은 정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남인이 서인에 정면으로 도전한 사건인 셈이다. 효종 때 집권한 송시열의 서인 정권을 뒤엎는 방법으로 남은 바로 송시열의 그릇된 예 이론을 선택한 것이다. 사실 김장생은 예론(禮論)을 가지고 인조 쿠데타를 정당화시켰고, 송시열은 그것을 발전시켜 소중화론을 주장하여 국가 이념으로 만들었다. 그 김장생-송시열이 정권의 발판으로 삼았던 예(禮)를 남인이 들고 나온 것은 당연한 것이었으리라. (또한 송시열은 윤휴가 윤선도를 사주하여 상소하게 된 것으로 보았다.)


현종은 이 상소를 보고 격분하여 윤선도를 삭탈 관직하여 고향으로 쫒아 보냈지만, 서인들은 상소하여,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를 그렇게 과장한 윤선도의 의도가 심히 불순하다고 처벌을 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윤선도는 함경도 삼수로 귀양 보내졌고, 허목은 삼척부사로 보내졌다.


이에 서인과 남인은 여당 야당으로서 전투적으로 대립했다. 그러나 서인 일각에서도 윤휴-윤선도의 예 이론이 옳다는 것을 주장했거나, 윤선도 처벌이 지나치다고 했다. 송준길은 윤선도를 가까운 곳으로 귀양지를 옮기라고 주청했다. 뒤이어 권시(權 )가 또 "효종이 인조의 서자라는 것은 아무 욕됨이 없는 것이다"라고 말한 송시열의 망언을 지적하고, "세상 사람들이 그의 잘못을 다 알면서도 누구나 이것을 탓하는 사람이 없다가 윤선도가 이를 지적한 것이니 그의 용기있는 발언을 취하여 용서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 뒤에도 조경(趙絅)과 홍우원 조사기 등이 계속하여 윤선도를 구하려는 상소를 올리다가 유배도 당하고 사적(仕籍)에서 삭제당하는 등 희생이 많았다. 이 무렵 외척인 김우명(김석주의 아버지)이 적극적으로 윤선도와 조경을 지지했다. 김우명은 김육(金堉)의 초상 때 송시열과 민유중에게서 크게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원한이 있었다. 이에 1659년 그해 12월 송시열은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갔다. 현종 7년 계속해서 영남의 유생 유세철 등 1400명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려 송시열의 궤례(詭禮)를 공박하였다.


현종이 재위한 15년간 조정에서 융숭한 예우와 부단한 초빙이 있었지만, 그는 거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다만 1668년(현종9) 우의정에, 1673년 좌의정에 임명되었을 때 잠시 조정에 나갔을 뿐, 시종 시골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가 재야에 은거하여 있는 동안에도 선왕의 위광과 사림의 무거운 기대(重望) 때문에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사림의 여론은 그에 의해서 좌우되었고, 조정의 대신들은 매사를 그에게 물어서 결정하는 형편이었다.

 

⑸ 화양동에 집을 짓고..


송시열은 현종에게 실망을 가졌다. 효종처럼 자신을 절대적으로 신임하지 않고 반대파의 주장에도 흔들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현종 치세 내내 벼슬을 하지 않고, 화양동에서 공부와 교육을 하면서, 여론을 주도했다. 당시의 정치는 사림-지식인들의 여론이 좌우했다. 따라서 여론을 주도한다는 것은 정치를 주도한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벼슬하지 않으면서 여론을 주도해서 정치를 좌우하는 사람을 山林이라 한다.)


현종 3년(1662) 3월에 금강산 유람길을 떠나 1만 2천봉의 장관을 두루 보고 동해안을 따라 강릉 오죽헌에 들려 이율곡의 유적을 살피고 돌아왔다. 이것은 일종의 성지 순례이다. 서인의 창시자인 이이는 금강산에 들어가서 중이 되려 하다 나와서 과거에 급제하고 승승장구했다. 또한 강릉은 율곡이 태어난 곳이다. 예송에서 송시열은 밀리자, 서인의 창시자 이이의 흔적을 더듬으면서 심기 일전한 것 같다. (이후 서인들에게 금강산-강릉은 일종의 성지 순례의 길이었다. 또한 노론이 집권하던 영조 시절, 겸재 정선은 진경 산수화로 금강산을 그렸다. 그것은 노론의 후원으로 가능했다. 김홍도도 금강산을 그렸다.)


또한 현종 7년(1666) 8월에는 속리산 서쪽의 명승지인 화양동을 찾아 아담한 집(精舍)을 짓고 연구와 교육, 그리고 여론 주도에 몰두하였다.
이 화양동은 그의 소중화 사상이 있는 그대로 나타난 곳이다. '화양(華陽)'이란 '중국/문화의 햇빛'이라는 뜻이다. 그는 그 골짜기에 작은 중화(中華; 중국의 문화)를 이루려 했다. 송시열은 이 곳에 들어간 후 일상생활도 되도록 중국의 생활방식을 따르기 위해 옷도 명나라 옷과 평정건(平頂巾)을 썼다. 부인에게도 명나라 여자처럼 쪽을 찌개하고, 아이들에게는 머리를 쌍각으로 따서 드리우게 하였다. 또한 청나라에 망한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의종의 글씨인 '非禮不動'을 얻자, 골짜기 절벽의 큰 바위에 새겨서 늘 보았고, 그 글씨 자체는 환장암이라는 절에 보관하여, 명나라가 망한 날 제사를 지내게 했다. 그것이 확장된 것이 뒷날 그의 유언으로 세워진 만동묘이다. 만동묘는 명나라의 신종(임진란 때 황제)과 의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경복궁의 대보단(大報壇)도 그런 것이다.) 그때 중국 사람 백여 명이 제주도에 표착한 일이 있었는데, 송시열은 그들이 "우리는 중국의 천주·장주에 사는 사람들인데 거기에는 아직 명나라의 황통(皇統)이 남아 있다"라는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였다. 그만큼 그는 명나라 숭상, 청나라 타도를 주장했다. 그에게 명-청이란 문화-야만을 뜻하는 것이다.


현종 9년 2월 송시열을 우의정에 불렀으나 사양하였으며, 계속 8월까지 열 번이나 불렀으나 열 번의 사직소를 올리고 나가지 않았다. 9월에는 현종이 온천에 나들이 하여 거기서 승지를 보내어 그를 불렀다. 송시열은 하는 수없이 임금 앞에 나아갔다. 송시열은 10월에 상경하여 세자부(世子傅)가 되었고 영경연을 겸하여 열흘 남짓 지냈으나 다시 우의정에 앉히려하자 그는 상소를 올리고 광주 궁촌에 나와 머물렀다. 왕은 즉시 상경하도록 재촉하니 며칠 뒤 상경하였다가 다음해 2월에는 다시 서울을 떠나고 말았다. 현종12년(1671) 5월에는 그를 우의정에 임명하고 세자부를 겸하도록 하였으나 그는 역시 이를 사양하였지만 그 다음 해 5월에는 좌의정을 맡고 말았다. 그 때 송준길이 남인이던 영의정 허적을 논박하여 물러가게 하였는데 이에 송시열도 좌의정의 사직소를 올리면서 허적을 가리켜 "나라에 화를 끼치고 선비를 해하는 인물이다" 하면서 정면으로 배척하였다. 그는 같은 해 7월에 좌의정에 다시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효종의 왕릉을 옮김에 지석과 표석(表石)을 세울 것을 건의하였다.


그 때 청풍부원군 김우명이 표석 건립이란 전례가 없는 일이며, 송시열의 말이라면 군신 가운데 누구 하나 감히 반대한 사람이 없다는 등의 공격을 가하였다. 또한 김우명은 이에 그치지 않고 소위 '민신(閔愼) 사건'(송시열이 복상(服喪)을 잘못 가르쳐 주었다는 것)을 들추어냈다. 또 서인인 수찬 김만중은 임금에게 아뢰기를 "허적은 소인이니 백료(百僚)의 위인 영의정 자리에 앉힐 수 없소"라고 공격하였다. 현종은 김만중이 상신(相臣)을 훼손하였다고 하여 그를 불러 문초하도록 명령하는 한편 서인 측의 이숙을 멀리 귀양보내고 민정중을 해직시키는 등 서인에 대한 태도가 급전하여 암운이 감돌았다. 그러자 송시열은 더욱 불안하여 변명의 상소를 올리고 서울로 올라가는 중도에서 머물다가 여주에 들러 천릉하는 것에 참례하고는 화양동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⑹ 두 번째 예송(甲寅 禮訟)


현종 15년(1674) 2월 효종 왕비였던 인선 왕후가 죽었다. 그녀는 현종의 어머니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인조의 부인=효종의 어머니=현종의 할머니'인 자의 대비가 어떤 복을 입어야 하는 것이 문제였다. 원래 큰 아들이 죽으면 어머니는 3년복, 맏며느리가 죽으면 어머니는 2년복을 입근 것이 원칙이다. 또한 둘째 아들이 죽으면 어머니는 2년복, 둘째 며느리가 죽으면 어머니는 9개월복(大功服)을 입게 된다. 그런데 이 원칙이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예조에서는 처음 1년복으로 정했다가, 서인인 김수항 형제의 주장으로 대공복으로 고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앞서 효종 상사 때에 조대비의 서자(庶子; 2째 이하 아들)들에 대하여 1년복으로 하였으므로 이번의 서자부에 대한 복으로는 대공복이 맞는다는 이론이었다.


 이 때 송시열은 화양동에 머물면서 아무런 의사도 표시하지 않았으나 때마침 대구 유생 도신징의 다음과 같은 상소가 올라왔다. "인선왕후는 10년 동안 종묘에 주사(主祀)한 효종의 후비였으니 대왕 대비의 복은 마땅히 맏며느리에 대한 복제에 의해서 할 터인데, 서부(庶婦)들의 대공복으로 한 것은 잘못이오. 만일 뒤에 대왕대비가 돌아가시면 효종대왕의 세자인 적장손의 복을 입지 못하고 서손들의 복을 택하시려하오. 예나 지금이나 대통을 이은 군주로서 적(嫡)이 안 되고 중서(衆庶)의 칭호를 받은 실례가 어디 있었소. 이러한 잘못은 다 기해년 궤례에서 생겨난 때문이오."


 현종은 이 상소를 영의정 김수흥 이하 서인 정권에게 보이면서, 왜 최초의 예송(기해 예송) 때는 조선의 국법을 적용하다, 이제는 옛 예제도(古禮)를 적용하는가를 따졌다. 서인 정권은 계속 송시열의 예 이론을 주장하자, 현종은 "왜 그대들의 예(禮)는 왕에게는 박(薄)하냐"고 질책하고, 정권을 교체했다. 김수흥을 파면시켜 춘천으로 쫓고, 남인 허적을 다시 영의정에 앉히는 한편 예조에서 복제의정을 주관한 조형 등을 잡아 문초하도록 명하였다. 이리하여 조대비의 제 1차 복제 문제는 일단 1년복으로 환원하여 잠잠해지게 되었으니 송시열에 대한 총애는 그 전에 비하여 현저하게 식어갔다.
그 해 8월에 현종이 승하하였다. 송시열은 원임대신(原任大臣)으로서 창왕히 상경하여 원상(왕의 喪中에 국정을 처리하는 임시 재상)을 명 받았으나 사퇴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그 때 진주의 유학 곽세건이 상소를 올렸는데, 그것은 송시열이 기해 예송 때 효종을 서자로 돌려 기복(朞服)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인선왕후의 상복 때에도 처음에는 대공복으로 정하여, 김수흥은 억울하게 편배(編配)의 죄를 받았으나 송시열의 죄는 왜 논하지 않았으며; 송시열이 괴상한 예(禮)·통(統)의 죄를 범하여 효종·현종의 죄인이 되었는데 또 다시 현종의 묘지문을 짓는 붓을 잡게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강경한 내용이었다.


숙종은 이 상소를 보고 그저 "잘 알았노라"라고만 답하였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대간들이 곽세건을 공격하여 "곽세건은 감히 삼조(인조-효종-현종)의 예우를 받은 노련한 충신을 죄에 몰아넣으려 하니 이는 즉시 멀리 귀양보내도록 명령하소서"라고 하였으나 왕은 이를 듣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송시열에게 짓도록 명하였던 현종의 지문을 김석주에게 짓도록 하는 왕의 등 태도가 완전히 바뀌어졌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 해 12월에 이르러 남인으로 개편된 대간들이 송시열의 기해 궤례(詭禮)의 죄를 들고 나와 탄핵의 화살을 퍼붓자 왕은 곧 송시열의 관작을 뺐고 서울 밖으로 쫓아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다음 해인 1675년 정월에는 장령 남천한·오정창 등이 송시열을 탄핵하여, 그는 67세의 늙은 몸으로 함경도 덕원부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6월에는 장기(포항 아래), 거제도로 옮겨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으며, 한 때 거의 죽을 뻔도 했다. 그러나 숙종 6년(1680) 5월에는 청풍으로 옮기라는 명령을 받고 6월에 그곳으로 가는 도중 경신환국이 일어나 남인이 궤멸되고 서인이 집권함에 따라 경상도 합천에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소식을 받았다.


경신환국으로 인하여 송시열의 평생의 적이었던 윤휴가 사형에 처해졌고, 허적 이하 110여명의 남인 인사가 사형 유배 삭탈 관직에 처하고, 다시 서인의 천지가 되었기 때문에 유배 생활 5년만에 친지와 문하생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⑺ 노론-소론의 분당


병자호란 때 송시열의 친구 윤선거는 처자를 데리고 강화에 피란하였는데, 그 곳에서 동지들과 더불어 성을 지켰으나 성이 함락되자 강화를 탈출하여 빠져 나오고 말았다. 그곳에서 그의 부인은 자결을 했고, 그의 친구들도 죽었다. 그는 이 사실 때문에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았으며, 재혼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송시열에게 "왜 죽지 못했느냐"는 비난의 화살을 받았다.


그는 송준길 송시열과 더불어 김장생 김집에게 배운 동문으로서 친교가 깊었다. 윤선거의 아들 윤증은 송시열의 제자였다. 한편 윤선거와 윤휴와는 비록 당색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서로 친교가 두터운 사이였고, 윤선거는 윤휴의 경전 주석 문제로 송시열과 대립되자 윤휴를 옹호하여 한때 송시열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윤선거가 죽은 뒤에 송시열은 제문을 지어 조의의 뜻을 표했다. 그 때 윤휴도 윤선거의 죽음을 슬퍼하여 친히 제사하자 송시열은 윤증이 자기의 문하생이면서, 자기의 정적인 윤휴의 조사(弔辭)를 거부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후 윤증은 아버지의 연보를 만들 계획으로 현석 박세채가 지은 아버지의 행장과 윤선거가 송시열에게 보내려던 편지(己酉擬書)를 가지고 송시열에게 가서 아버지의 묘지명을 청하였다. 그런데 송시열은 윤선거가 살았을 때 윤휴의 편이 되어 자기 말을 듣지 않은 것이 미웠는데 이번에 그 아들이 갖고 온 편지를 보니, 윤선거가 여전히 윤휴를 관용하는 구절이 보여서 크게 분노했다. 그래서 묘지명을 집필하기로 결심했으나 그 묘지명은 윤선거를 비꼬는 것이 되고 말았다. 묘지명의 서문은 이렇다.

 

공의 학문의 연원과 거취의 시종은 사람들이 다 보고 아는 것이나 그 조예의 얕고 깊음과 의리의 정조(精粗)는 사람들의 아는 바가 아니다. 하물며 나같은 사람은 공에게 비하여 고니와 흙벌레처럼 서로 다르니 아무리 오랫동안 친한 사이였다고 할지라도 그 속속들이 쌓인 것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이같이 늙어 가는 내가 이 글을 무엇이라고 써야 할지 망연하다. 오직 박세채가 지은 행장에 다 잘 기록이 되어 있으므로 거기에 의거하여 쓰면 거의 허물이 없을까 한다.

 

그리고 끝에 다음과 같은 명문(銘文)을 붙였다.

 

미쁘다. 박세채가 극히 찬양하였으니 나는 별로 할말이 없으므로(我述不作) 이것으로 묘명을 삼노라(揭此銘章).

 

즉 송시열 자신은 윤선거의 학문이나 인격에 대하여 아는 바 없고 오직 박세채의 글에 나타난대로 적을 뿐이라는 뜻을 밝힌 글이다.
이 글을 받아 본 윤증은 곧 그것을 송시열에게 다시 돌려보내면서 이렇게 항의하였다.

 

"선생이 선친과 40년 동안이나 친교가 있었으면서도 묘문에 실린 글의 뜻이 겨우 '나는 잘 알지 못하고 박세채의 말이 이러하다' 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디 인정에서 우러나오는 글이라 하겠습니까. ... 평생의 친교라면서 한 마디도 자기 의사는 표현하지 아니하고 후배인 박세채의 말만 빌어서 이것 뿐이라니, 그렇다면 박세채의 글만 있으면 그만이지 선생에게 글을 청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에 대해 송시열은 "나는 견식이 부족하니 글을 잘 쓸 수 없고 박세채는 내가 높게 우러러보는 터이어서 그가 지은 글에 의하려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라고 대꾸하였다. 그 이후에도 여러 번 서한이 오고 갔으며, 숙종 2년(1676) 2월에는 윤증이 송시열의 유배지인 장기(포항 아래)까지 찾아가서 그에게 다시 고쳐 줄 것을 청하였으나 그는 끝내 이를 듣지 않았다. 그 후부터 윤증은 송시열에게 점차 반감을 가지게 되어 그의 인격과 언행을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 윤증은 송시열에게 "선생이 저의 집일이라면 아무리 적은 일이라도 선친에 해가 될만 하면 이를 폭로하여 헐뜯으려 하니 자식의 마음으로 어찌 가슴 아프지 않겠소. 나의 마음이 이다지 아프니 선생에 대한 정의도 전과 같을 수는 없소"라는 편지를 냈다.


송시열에 대하여 윤증은 이렇게 도전해 왔으며 1681년에도 송시열에게 보내려는 글을 쓰긴 했으나 주위에서 만류하는 바람에 보내지 못하고 말았다. 뒤에 박세채의 사위가 된 송시열의 손자 송순석이 처가에 갔다가 이것을 발견하고 가져다가 할아버지 송시열에게 보였더니 그는 크게 노하여 "윤증이 나를 죽이고 말 것이다"하고 침통해 하였다. 이 윤증의 글이 이른바 신유의서(辛酉擬書)라는 것이다. 여기서 그 내용을 대략 추려서 적어 본다.

 

"선생이 주자의 도(道)라고 스스로 믿고 있으나 자기 주장이 너무 지나치고 옳다고 생각하는 자만심이 너무 높아서 자기에게 찬동하는 자는 좋아하고 반대하는 자는 배척하니 인덕이 부족한 사람이오. 또 선생이 보통 때 퇴계(退溪)를 평하기를 강력한 점이 부족하다고 하였는데 선생은 너무 강직한 데만 기울어져 있음을 자기 자신도 모르고 있소. 그러나 선생의 강(剛)은 극기궁행(克己躬行-사욕을 이기고 실천하는 것)의 '강'이 아니고 힘으로 남을 억누르는 '강'이어서 사랑(仁愛性)이 없음을 깨닫지 못하오. 선생의 언행의 본원은 의리쌍행(義利雙行-正義를 표방하면서 私利도 버리지 않는 것)·왕패병용(王覇 用-왕도의 이념을 높이면서 권모술수가 많다는 것)이오."

 

이와 같이 서인의 두 거두가 반목·대립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회니시비(懷尼 是非; 懷는 송시열이 살던 懷德, 尼는 윤증이 살던 尼城)라 하여 조야가 떠들석하였다. 경신환국이 있은 뒤 송시열이 귀양지에서 돌아와 다시 조정에 들어오면서부터 더욱 명망이 높아져서 숙종은 교서같은 데서는 자기를 소자(小子)라 하고 반면에 송시열은 대로(大老)라고까지 불러 전국의 사림이 우러러보는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러나 이 회니 결렬이 생긴 후부터 윤증과 합류하는 서인의 소장파들이 계속하여 송시열을 배척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김장생의 손자 김익훈이 김석주의 지시로 남인의 동태를 정찰하고는 허새·허영·유명견 등이 모반하였다고 김환을 시켜 밀고하도록 하여 허새·허영을 죽이는 한편 김익훈은 민암을 고발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이것이 모두 허무맹랑한 허위 조작이었음이 밝혀지고 말았는데 이 사건이 곧 임술(壬戌) 삼고변옥사(三告變獄事)이다.


소장파 서인 조지겸·한태동 등은 김익훈을 탄핵하고 나섰는데, 송시열은 그가 자기 스승 김장생의 손자라는 데서, 갖은 수단으로 그를 구하려 하였다. 정의감에 불타는 소장파는 처음에는 송시열이 정의를 따라 김익훈을 탄핵할 줄 알고 기대가 컸었으나, 이렇게 되고 보니 그의 개인 정의에 치우친 처사에 불만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리고 송시열은 이제 몇 년이 지나면 이태조의 위화도 회군으로부터 3백년에 가까워 온다고 하여, 태조의 존귀한 호칭을 덧붙여 줄 것(尊號 加上)할 것을 아뢰었는데, 그 이유로는 태조의 위화도 회군은 곧 명나라를 숭앙하는 정신에 합치된다는 것을 들어 말했다. 그러나 박세채·윤증 등은 이에 반대하여 물의가 일어나게 되었다. 송시열은 다만 이성계가 명나라를 치지 않는 것을 보았으나, 박세채 등은 위화도 회군이 쿠데타라고 보았다. 쿠데타를 높인다는 것은 국가 기강의 문제이다. 그런데 송시열은 소중화론자로서, 쿠데타이지만 중화(=명나라)를 위하는 일로 보였던 것이다. 그 때 윤증이 박세채에 보낸 글에 "지식인(士類)들이 송시열 옹에게 두 가지 마음(의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사적인 원한(私怨) 때문이 아니다. 그의 하는 일이 신뢰를 받을 만하지 못한 때문이다." 라고 했다.


그리하여 결국 이 회니 시비는 노론·소론으로 분립되어 노론의 영수에는 송시열, 소론의 수령에는 윤증이 앉게 됨으로써 당쟁은 점차 격화되어 병신처분(丙申處分)·신임옥사(辛任獄事) 등의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⑻ 그의 죽음


고령의 몸으로 유배 생활에서 돌아온 송시열은 평안히 휴양할 여가를 가질 사이도 없이 숙종 6년(1680) 10월에 영중추부사에 임명되어 다시 관계(官界)에 나아가게 되었다. 그 때 숙종의 신임은 두터웠으나 소론과의 사이에 암투가 계속되었다. 그는 왕에게 물러날 뜻을 밝혔고, 숙종 9년 3월에야 77세로써 관계를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왕은 그를 봉조하에 임명하고 때때로 조정에 나와 흉금을 털어놓고 의견을 제출해 줄 것을 명하였다.


때마침 송시열은 윤증과 태조 호칭 사건(太祖 徽號)으로 대립이 심하여 초야로 돌아갈 생각이 날로 짙어 갔으나 숙종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칠 수가 없어 망설이고 있던 중, 그 해 4월에는 조카 이덕로가 금화 부사로 가게 되자, 그 곳에 가서 그의 여동생을 만나고 고성(高城) 온천을 거쳐 금강산에 들어가서 쉬려고 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사관(史官)을 보내어 행장을 살피게 하는 한편 태의(太醫)를 시켜 송시열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원자(元子) 위호 문제(位號問題)가 일어나 그는 드디어 최후의 당쟁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게 되었다. 원래 숙종은 그 때까지 정비 민씨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하고 소의 장씨가 숙종 14년 10월에 왕자를 낳게됨으로써 숙종은 크게 기뻐하고 곧 원자로 책봉하려 하였으나 서인 일파에서 동의하지 않을 것 같아 주저하다가 마침내 그냥 책봉의 절차를 결행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노론은 민씨(인현왕후)를 지지했고, 남인은 장씨(장희빈)을 지지했다. 장희빈이 낳은 아들이 세자가 되고 나중에 왕이 되면 결국 노론은 망하게 된다. 이런 위기 상황에, 노론의 영수 송시열이 나섰다. 그는 상소를 올려, 송나라 철종(哲宗)을 예로 들고, 정비 민씨의 나이가 아직도 창창하여 애를 낳을 수 있는데, 원자를 책봉하는 것이 너무 빠르니 더 기다려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말했다. 그는 최후의 죽음을 각오하고 상소문을 올린 것이다. 당파를 위해서 그는 목숨도 바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왕은 이 상소를 보고 크게 노하여 송시열이 산림 영수(山林領袖)로서 감히 이같이 나서고 있으니 이 다음에 또 다른 무리가 잇달아 일어날 것이라 우려하였다.


이에 숙종은 처음에는 잡아다가 심문하도록 명하였다가 다시 먼 변경지로 귀양보내도록 했다. 그러자 이 때 다시 남인 대간들의 탄핵이 일어나 결국 제주도로 귀양의 명이 내려지고 말았다. 그 해 5월 대간들이 뜻을 모아 우선 심문해 줄 것을 간청하자 왕은 처음에는 듣지 않았으나 삼사가 청대합계(請對合啓)를 내자 이를 허락하여 금부도사 권처경으로 하여금 데려오게 하였다. 그는 내려가서 나명(拿命)을 전하지 않고 그냥 가자고 하였으므로 송시열은 처음에는 후명(後命)인줄 알고 권상하에게 유서를 써 주고 화양동에 만동묘(萬東廟)를 세울 것을 부탁하였다.


6월에 육지로 건너와 해남을 거쳐 정읍에 이르자 마침내 사사(賜死)의 명을 받았다. 그 때 자손들과 문하생·지기들이 모두 정읍에 모여 기다리고 있었는데 송시열은 이들과 일일이 영결의 인사를 하고 유계(遺戒)를 말하였다.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유언하기를 "천지만물의 생긴 까닭과 성인이 만사에 응하는 길은 오직 직(直)자 한 자뿐이니 이것은 공맹(孔孟)이래 전하여 온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6월 8일 전지(傳旨) 전달식이 있은 후 그는 사약을 마시고 파란많은 생애를 끝마쳤다. 집념과 의욕이 끓는 그의 기질에 못다한 일들이 많았을 것이지만 죽은 뒤에 눈을 감지 못하여 권상하가 여러 번 감겨 주었으나 끝내 감지 못하고 말았다.

명제 윤증 - 소론의 영수, 충청 유자의 빛


 윤증 고택

논산 시내를 지나서, 논산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지나자 마자 오른쪽으로 공주 가는 23번 국도를 따라가면 노성산(魯城山) 아래 남쪽 자락 노성면 사무소가 있는 교촌리 마을에 윤증 선생의 옛집이 있다.


이 부근은 옛 이산현(泥山縣; 혹은 泥城)으로 파평 윤씨들의 세거지였다. 윤증이 원래 살았던 집은 인근 병사리 유봉 마을에 있었다. 1681년 까지도 그가 유봉 마을에 살았다고 하니, 명확한 연대를 알 수는 없지만, 대략 말년인 18세기 초에 현재의 터에 새 집을 짓고 이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윤증이 지었다고 하나 후대에 개축했는지 현재의 건물은 19세기 중엽의 모습을 보인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시골 지주 사대부가의 위엄을 갖추고 있어 중요 민속 자료 제 190호로 지정되었다.
큰 길에서 한참 걸어 들어가면 고택이 보인다. 윤증 어머니의 정려각이 있는 곳에서 보면 오른쪽에 고택이, 왼쪽에 향교가 맞붙어 있고, 그 두 곳의 앞에 연못이 있다. 연못 오른쪽에 우물, 주차장 휴게소가 있다. 그곳에서 보면 고택의 사랑채가 우뚝 솟아 있다. 낮은 토담과 아기자기한 지붕선이 정겨운 느낌을 주는 이 고택은 목조 단층 건물로, 건축학적 가치가 높아서 건축학과 연구자들이 많이 찾는다.


1) 연못과 마당 : 고택의 사랑채 앞에는 넓은 마당을 두고, 그 왼쪽에 석가산까지 둔 커다란 연못을 조성하였고, 그 사이에 우물을 만들었다. 거기에는 일절 담장이나 별도의 경계물을 두지 않았고, 단지 꽃나무들로 아늑한 분위기만 조성했다. 네모난 연못은 고택과 향교 앞가지 걸쳐 있어서, 이 집에 소속되었다기 보다는 노성읍 전체를 위해 제공하려는 의도가 명확하다. 사랑 앞마당은 마을에 개방되어 향교에 오는 참배객들의 공동 광장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담장과 행랑을 둘러 한채만을 보호하고 나머지 영역을 과감히 향촌에 공개하고 있다. 향촌의 지도자로서의 대단한 자부심과 자신감이 없다면 불가능한 구성이다.


2) 집의 구성 : 고택은 앞의 사랑채와 안쪽의 안채, 그 사이의 행랑채로 구성된다. 안채의 서쪽에는 곳간이 숨어 있다. 아울러 사랑채 뒤 오른쪽 제일 높은 곳에 사당채 영역이 별도로 조성되었다. 이것이 전부이다. 적어도 열채 이상의 건물들로 이루어지는 경북 일대의 사대부가는 물론이고, 같은 지방인 대전의 쌍청당이나 동춘당들과 비교해 보아도 매우 '청빈한' 주택 규모이다. 이 고택은 구조가 간결하면서도 짜임새가 매우 견실하여 조선 후기 향촌 사대부가 주택의 멋을 잘 보여 주는 집이다.


3) 사랑채 : 바깥 마당에 서면 바로 사랑채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반듯하게 쌓은 축대 위에 근엄하게 앉은 사랑채는 지주가로서 소작인들에게 한껏 위엄 있게 보였음직하다. 두 칸짜리 온돌방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대청을 두고 툇마루를 둘러 쓰임새와 시원한 배치를 고루 갖추었다.
사랑채는 뒷쪽에 긴 행랑이 있고, 날렵하게 대조를 이루는 사랑채의 정면 양 끝 칸은 모두 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서쪽은 루 마루이고, 동쪽은 사랑 대청이다. 양쪽을 비움으로써 수직적 분절(分節)과 동시에 수평적인 경쾌함을 얻고 있다.


이 지방의 살림집들은 수평적 구성을 구조로 삼는다. 충청 전라 지역의 지형이 경상도에 비해 평지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윤증 고택의 안채와 행랑채는 물론 수평적이다. 반면 앞으로 튀어나온 사랑채는 당연히 수직적이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지역적 정서에 맞지 않음은 물론 뒤쪽 안체와도 심한 부조화를 일으킬 것이다. 이러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채택된 수법은 사랑채의 기단을 이중으로 쌓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사랑채가 안채와 수평을 이루고, 동시에 바닥을 높일 수 있었다. 마루 바닥이 높은 이유는 앞의 연못을 바라보기 위한 것이다. 서쪽 루 마루는 연못을 감상하기 위한 특별한 공간이다.


* 사랑채 큰방의 아랫목 뒷방 쪽에는 옆으로 밀어젖혀서 다시 앞뒤로 여닫을 수 있는 특이한 문이 있는데 '미닫이 여닫이'라는 재미있는 이름이 붙었다. 규모가 작은 뒷방에서 음식상을 차려서 내올때 문이 네 짝밖에 되지 않아 반만 열면 드나들기가 불편하므로 다 열 수 있도록 고안해 낸 것이다. 미닫이-여닫이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이 문은 창틀 전문 회사가 현대화에 성공했다.
* 사랑채 뒷마당은 큰사랑 골방과 안채 샛문 사이에 만들어진 작은 공간이다. 두면은 문, 한면은 낮은 담으로 구성된 직사각형의 공간에 골방이 돌출함으로써 지그재그의 방향감을 갖는다.


4) 행랑채 : 사랑채 왼쪽으로 비껴 가면 있는 대문을 통해 안채로 들어가게 되는데 문에서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도록 맞은 편에 '내외벽'이라고 하는 널빤지 벽을 쳐서 돌아 들어가게 하였다. 이는 문을 열었을 때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지 않게 하고, 외간 남자가 찾아왔을 때 단번에 서로 얼굴을 마주 치지 않고 벽을 사이에 두고 말을 주고받을 수 있게 한 것이다.
행랑채는 안채와 사랑채를 연결해 주는 매개체이므로, 자체적인 성격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대문이라는 중요한 기능이 거기에 포함되기 때문에 집의 입구라는 것을 강조할 수 있는 수법을 동원해야 했다. 행랑채의 5칸 중 서쪽 두 번째 칸이 대문이다. 대문의 양 옆칸에 방화벽을 두어 대문을 중심으로 대칭적인 형태를 만들었다.


5) 안채 : 모양의 안채는 완벽한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다. 마당에서 보면, 가운데 5칸 대청을 중심으로 양날개 채의 길이가 같고, 날개채 끝은 모두 부엌으로 마감되었다. 또한 양날개채 앞면에는 같은 크기의 툇마루를 두어 완전한 대칭을 이루고 있다. 세 날개의 지붕 용마루선은 모두 같은 높이에서 만나며, 대칭적 구성과 함께 수평적인 평온함을 안마당에 부여하고 있다.


6) 마당 : 안마당이 이 집의 중심을 이룬다는 것은 마당의 모양을 보면 알 수 있다. 안 마당은 거의 정사각형을 이루고 있다. 이 집의 다른 마당들이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을 한 것과 크게 대비된다. 또한 전체 공간 배치를 그려 보면, 정사각형의 안마당을 다른 마당들이 둘러 싸고 있다. 즉 안채 동쪽의 독립된 마당, 뒷뜰의 긴 길과 같은 공간, 서쪽 곳간채와 이루는 긴 통로, 그리고 행랑채 앞마당 등이 엇물리면서 안채를 에워싸고, 다시 안마당을 감싸고 있다. 안마당은 대칭을 이루는 안채로 둘러 싸였 있을 뿐 아니라, 그 바깥의 외부 마당들로 다시 한번 둘러 싸여 있다. 안마당은 형태와 비례 뿐 아니라 공간적인 위상까지 완벽한 중심성을 획득한 것이다.


7) 뒷뜰 : 대청 뒷벽의 바라지 창으로 내다보이는 뒤뜰은 매우 깔끔하고, 장독대 위에는 배가 불러 넉넉해 보이는 충청도식 항아리들이 서로 키를 다투며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어 정겨움을 준다.
이곳은 보통 안뒤라고 부르는 곳이다. 뒷산을 절토하여 석축을 길게 쌓아 안채 뒷문과 함께 기다란 통로가 만들어졌다. 이 곳은 마당이라기 보다는 외부의 복도와 같은 공간이며, 멀리 끝에는 계단식으로 쌓은 담장이 초점을 이룬다.


8) 안채 동쪽의 뒷마당은 이집에서 가장 감동적인 공간이다. 한쪽은 담으로 다른 한쪽은 문으로 막혀 있다. 그 기다란 공간의 끝에는 계단식으로 조성된 화단이 있고, 조각과 같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어 투시도적 공간의 초점이 된다. 그 중간에는 스케일을 가늠할 수 있는 양감있는 굴뚝이 오똑 서 있다.


9) 규범적 논리적 기학적 건축 ; 윤증 고택은 적어도 기술적 측면에서 철저하게 논리적이며 규범적이다. 창호의 구성은 치밀한 기술의 극치를 이룬다. 칸 사이는 매우 규칙적이며, 정확한 각도와 배열로 이루어졌다, 각 부분들은 서로 명확하게 분절(分節)되어 있다. 안채와 행랑, 행랑과 사랑채의 관계는 연속과 동시에 분절적이다.


부분적인 단위에서도 평범성이 두드러진다. 예컨데 주요 방과 그에 부속된 수납(受納) 시설의 관계를 보라, 안방과 웃방은 건넛방과 다락, 안사랑방과 고방, 큰사랑방과 골방들은 완결된 한쌍의 관계들을 보여 준다. 주공간과 부속 공간, 사람과 물건의 공간, 큰 공간과 작은 공간의 쌍들이다. 윤증 고택의 모든 부분들은 이러한 규범적 단위들로 구성된다.
정방형의 안마당을 동서남북 사방에서 긴 장방형 마당들이 에워싸고 있다. 또 이 마당들 사이에 작은 샛마당들이 요소 요소에 위치하여 외부 공간들을 서로 연결하고 있다. 이 또한 규범적이고 논리적인 구성이다.


10) 중문 위쪽의 서까래에는 불에 그을린 자국이 있다. 갑오농민전쟁 때에 공주로 진격하던 농민군이 불을 놓은 자국이라고 한다. 윤증가는 노산 지역의 대지주였던 만큼 농민들의 원성의 대상이었을 터이고 진격하던 농민군이 이 집을 들러 군량미를 내어놓으라고 했으나 순순히 내어 주지 않자 한 무리들이 집을 불사르려고 했다는 것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그때 농민군이 철수하면서 깜박 잊고 놓고 간 담배통을 윤증가에서 보관하고 있는 점이다. 누구인지 알 수 없는 한 농민군이 잊고 간 덕에 백통으로 투박하게 만든 네모진 담배통은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난지 10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농민군의 몇 안 되는 유품이 되었다.


반질반질하게 길이 들어 품위를 더해 주는 우물 마루, 대청 벽에는 갖가지 옛 살림살이들이 걸려 있어 볼거리가 된다. 많은 고택이 관리만 하고 살지 않아 죽어 가는 반면 윤증 고택은 사람이 살며 괸리하는 집이라 집 자체로서도 살아 있는 느낌을 주어서 좋다.


11) 세도 있는 집안으로서 대대로 물려 내려온 윤증가의 유품도 전한다. 상투관, 백목화, 합죽선, 윤증 초상화 등 윤증의 유품과 가발의 일종인 월자, 첩지, 비녀 등 종부에게 전해 내려온 유품 등으로 중요 민속 자료 제22호로 지정되어 있다. 나무를 깎아 만든 상투관은 전체로 둥근 모양에 선 네 줄이 골 지게 조각되어 있고 양 옆이 트였으며 상투비녀를 꽂게 되어 있다. 이 유품들은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까지의 사용자의 배경을 알 수 있는 것들이어서 당시 복식과 생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밖에도 교지와 도장, 벼루, 수많은 고서적들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몇 해전에 관리가 허술한 틈을 타 귀중한 서책을 도둑맞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3. 윤증과 관련된주변 유적들


1) 씨족 마을 : 윤증 고택 서쪽의 장구와 유봉, 병사 마을이 대표적인 파평 윤씨 씨족 마을이다.


2) 윤황(尹煌) 고택 : 노성의 파평 윤씨 종가집, 노성면 장구리 마을에 있다. 윤증의 할아버지 팔송(八松) 윤황이 지은 고택. ㅡ자 사랑채와 ㄱ자 안채, 그리고 행랑채로 이루어진 단촐한 구성이다.
3) 선영과 재실 : 노성면 병사 마을에는 왕릉 같이 거대하게 조성된 윤씨 선조 묘소 3기가 있고, 그 앞에 묘제를 위한 재실이 마련되었다. 선영과 재실은 병사 저수지 옆에 있다. 선영에서 저수지 건너편을 보면 종학당과 관련 건물이 보인다.


4) 종학당(宗學堂) : 1640년대 윤증의 큰아버지가 건립한 집안 교육 기관. 노성면 병사리에 있다. 윤씨 일가의 가학(家學) 전수소, 윤증도 거기서 후손들을 지도했다. 개인 가문의 종학(宗學)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으며, 강학당과 숙소 휴게실 등이 갖춰져 있어 상당히 조직적인 교육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뒤에 보이는 노성산과 앞에 펼쳐진 병사 저수지 등 수려한 산수를 배경으로 이곳에서 42명의 과거 급제자를 길러 냈다고 한다. 병사 저수지를 놓고 종학당과 선영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아마 후손들에게 조상을 보면서 공부하라는 것일 것이다.


5) 유봉(酉峰) 영당(影堂) : 윤황 고택이 있는 장구리 마을에서 동쪽으로 야산을 넘으면 바로 유봉 마을에 이른다. 원래 윤증의 고택이었던 자리에 1744년(영조 20년) 제자들과 후손이 윤증의 영정을 모시고 영당으로 건립했으며, 현재 마당에 있는 커다란 향나무도 그때 심은 것으로 알려졌다. 영당 옆에 있는 재각 '敬勝齋'라는 현판은 송시열이 쓴 글씨이다. 산중턱 높은 곳에 자리잡아 전망이 좋다. 영당 뒷편의 축대는 주목할만하다. 아래 부분은 자연석을 쌓았고 그위에 다시 잘 가공된 사고석을 쌓아 대비를 이룬다.


6) 유봉 마을의 송단(松壇) : 유봉 마을에는 윤증의 원래 집이 있었고. 동쪽 야산의 소나무 숲은 윤증의 사색처였다.


7) 정려각(旌閭閣) : 열녀인 윤증 모친에게 추서된 홍패를 모신 건물, 교촌리의 윤증 고택 정면에 있다. 최근에 새롭게 고쳐 지었다.


8) 노성 향교 : 윤증이 지방 유림과 교류하던 곳. 교촌리 고택 바로 옆에 있다.


9) 노성 궐리사(闕里祠) : 궐리는 공자가 살았던 마을 이름. 공자의 영당(影堂)으로 교촌리 윤증 고택 동쪽 골짜기에 있다.


10) 윤증의 묘 : 논산시 계룡면 향지리에 있다. 윤증은 생전에 나라로 부터 우의정 벼슬을 받았지만 나가지 않았음인지, 유언으로 묘비명을 쓰지 말도록 했다. 그래서 따로 쓰지 않고 아버지인 윤선거의 묘비에서 13자를 집자해서 적었다. 흔히 있는 문인석 무인석 혹은 석주나 석등도 없다. 오직 비석 하나만 있다. "有明朝鮮國 徵士 坡平尹公諱拯之墓"라고 적혀 있는데, 해석하면 "조정에서 부른(徵士) 학덕이 높은 선비 윤증의 무덤"이다.


11) 이삼 장군 고택 ; 상월면 주곡리에 있는 이 주택이 옛주인 이삼은 소론파의 무관으로 1727년에 이 집을 건립했다. 이집은 윤증고택을 70% 정도 축소한 것이다.

 

4. 윤증과 소론


숙종 때의 학자 윤증(尹拯, 1629-1711, 인조7-숙종37)의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 혹은 유봉(酉峰; 뒷산 이름). 시호는 문성(文成) 아버지는 윤선거(尹宣擧)이며, 어머니는 공주 이씨로 이장백(李長白)의 딸이다. 윤선거의 아버지 윤황은 우계 성혼의 딸과 결혼했다. 그는 소론의 거두가 된 사람이다. 그전에 서인과 남인이 있었고 서인이 윤증에 와서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갈린 것을 두고 사색(四色)이라고 한다.


1642년(인조20) 14세 때 아버지 윤선거가 유계(兪棨)와 함께 대전 아래 금산에 살면서 道義를 공부했는데, 그때 공부하면서 성리학에 전념하기로 마음 먹었다.


19세에 권시(權 ; 炭翁)의 딸과 결혼하고, 권시에게 배우기도 했다. (권시 유계는 모두 윤선거의 친구들이거나 그 뻘임.) 그 전에 주자학을 김장생의 아들 김집에게서 배웠는데, 늙은 김집은 송시열이 주자학에 정통하므로 그에게 배우라고 했다. 29살 되는 해에 대전 회덕에서 살던 송시열에게 주자대전을 배웠다.


효종 말년에 학업과 행실이 뛰어나 조정에 천거되었고, 35세(1663, 현종4)에 공경과 3사가 추천하여 공조랑 사헌부 지평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했다. 그 뒤 1682년(숙종8) 호조참의, 1684년 대사헌, 1695년 우참찬, 1701년 좌찬성, 1709년 우의정, 1711년 판돈녕부사 드에 제수되었으나 한번도 나가지 않았다.


41세(1699)에 아버지가 죽었는데, 주자 가례에 따라 극진히 초상을 치루었다.
1680년에는 김수항 민정중이 주청하여, 숙종이 그를 경연에 불렀다. 노론-남인의 당쟁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과천에 머물러 있었다. 이에 박세채가 몸소 과천에 내려가 청하자, 윤증은 자신이 벼슬에 나가면 안 되는 개인적인 사정 말고도 나아가서는 안 되는 명분이 있으니 "오늘날 조정에 나가지 않는다면 모르되 나간다면 무언가 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⑴ 우옹(송시열)의 세도가 변하지 않으면 안되고, ⑵ 서인과 남인의 원한이 해소되지 않으면 안 되고, ⑶ 세 외척(김석주, 김만기, 민정중의 집안) 세력의 문호는 닫히지 않으면 안 된다"며 그것을 할 수 없으므로 차라리 조정에 나가지 않겠노라고 한 것이다.


그와 송시열 사이의 문제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이 된다. 이 분당의 근본적인 원인은 서인 안에서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이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대해서 강경하게 싸워서 죽자고 주장했던 사람들은 노론, 항복해서 나라를 수습하자는 온건파는 소론 계열로 갔다. 노론은 이념적 강경성(대의 명분, 강상 의리)을 근거로 삼아서 청나라에 싸웠을 뿐만 아니라, 남인들과도 싸웠다. 반면에 소론 계열은 남인들에 대해서 비교적 온건한 태도를 가졌다. 또한 강경 노론이 정통 성리학에 근거하는 반면, 이들은 성리학에서 벗어나는 경향을 가진다. 그러나 이런 근본 문제 이외에 송시열과 윤증 집안 사이의 문제도 노론 소론의 나뉨에 큰 영향을 미쳤다.


⑴ 송시열과 윤선거 ; 둘은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 그러나 송시열의 일생 일대의 적 윤휴(남인의 이론가)에 대해서 송시열은 사문난적으로 처단하자는 강경론이었고, 윤선거는 온건론을 폈다. 이 의견은 끝내 불일치했다. 윤선거는 윤증에게 "송시열의 우뚝한 기상은 따라가기 어려우니 그의 장점만 배우고 단점도 알아 두어야 한다" "남의 말을 잘 듣지 않고,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이 송시열의 단점"이라 했다. 윤선거가 죽을 때까지 송시열과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 했다.


⑵ 윤선거가 죽자 윤증은 스승 송시열에게 행장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송시열은 윤선거가 윤휴에 관대한 것에 불만을 가진데다, 윤선거의 말년 편지에 윤휴를 여전히 관용하고, 또 윤휴가 윤선거 장례식에 보낸 제문을 윤증이 받는 것을 보고 분노했다. 그래서 행장을 쓰되 박세채가 쓴 것을 그대로 인용하고 끝에 몇자 덧붙이는 식으로 했다. 윤증이 여러번 간곡히 고쳐 달라고 했으나 고쳐 주지 않았다. 이에 윤증과 송시열의 사제지간의 의리가 끊어졌다.


⑶ 이후 송시열은 내놓고 윤선거를 비난했다. 즉 강화도에서 윤선거는 비겁하게 살아 남았다. (윤선거의 부인과 친구들이 자살했는데.) 또한 윤선거는 윤휴와 관계를 끊지도 않았다.


⑷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가 강화도에서 죽지 않은 것을 이렇게 변호했다. 윤선거는 아버지 윤황이 남한 산성에 있어서 죽을 수 없었다. 또한 그는 군인도 아니었다. 또한 이율곡이 초년에 불교에 입문해서 잘못이 있으나, 자기 아버지는 처음부터 죽어야 할 의리가 없었다.


⑸ 윤증은 송시열이 의리쌍행(義利雙行) 왕패병용(王覇竝用) 하는 사람이라 비난했다. 이에 송시열을 영수로 삼는 노론에서 윤증을 치열하게 비판했다. 최신은 윤증이 스승 송시열을 배반했다고 논죄했다. 또한 정호도 그렇게 비판하자, 숙종은 정호를 처벌하며, "아버지와 스승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중한가? 그 아버지가 욕을 먹을 때 아들의 마음이 편하겠는가?" 했다.


⑺ 또한 유계가 쓴 {가례원류}의 주석 문제로 또 노론 소론 사이의 싸움이 일어났다.

그는 송시열에게 배웠을망정 당시 노론 세도가들이 좌지우지하는 불합리한 정치를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 말은 당시 하늘을 찌를 듯한 노론에 대해서 정면으로 비판하며 부정하는 발언이었으므로 선비간에 큰 논란을 일으켰다.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간에 남인 탄압과 관련하여 벌써부터 일고 있었던 분파가 이로 인하여 확연해졌고 송시열을 지지하는 노장파를 노론, 한태동과 윤증을 지지하는 소장파를 소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후 숙종 말엽부터 정국은 노ㆍ소론의 정쟁의 중심이 되었는데 영조 대에 이르러 사도세자의 폐위와 사사 사건으로 말미암아 노론-소론은 다시 벽파와 시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돈암서원과 김장생

 

1. 돈암서원(遯巖 書院)

계백 장군의 묘소에서 나와서 논산-대전을 잇는 4차선 국도에 들어서서 대전 쪽으로 조금만 가면 길 오른쪽으로 돈암서원 표지석이 보인다. 조그만 가면 돈암 서원이 나온다. 입구에는 큰 비석이 있고, 문이 꽉 닫혀 있다. 현재는 수리 중이라 오른쪽으로 가면 담장이 헐려 있어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서원에 들어가기 전에 대문 앞의 어수선한 주위를 보면 별 볼 일 없는 서원 같으나, 일단 안에 들어가면 서원 치고는 넓은 규모에 약간 놀라게 된다. 특히 응도당은 상당히 큰 건물이다. 대문 쯤에서 보면 왼쪽에 응도당, 오른 쪽에 관리인 집, 정면으로는 비석이 있고, 양성당(?)과 그 뒤에 사당(祠宇), 그리고 좌우로 여러 부속 건물들이 있다. 우리가 답사갈 무렵(11.5.)에는 수리 공사가 끝난다고 한다. 돈암 서원은 일반적인 서원처럼 검소하고 장식이나 조경이 별로 없다는 점에서 절과는 대조를 이룬다.


돈암 서원은 충청남도 논산군 연산면 임리에 있는 서원, 1634년(인조12)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김장생(金長生)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창건 이전에 연산면에는 김장생의 아버지인 김계휘(金繼暉)가 설립한 경회당(慶會堂)이 있어 문풍(文風)이 크게 진작되었으며, 김장생은 양성당(養性堂)을 세워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이에 후대에 와서 양성당과 경회당을 중심으로 서원을 건립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돈암 서원 자리가 바로 김장생과 그 아들 김집이 그 많은 서인 인재를 키워 냈던 자리라는 말이 된다.)


1660년(현종1)에 '돈암(遯巖)'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658년(효종9)에 김집(金集)과 1688년(숙종14)에 송준길(宋浚吉), 1695년에 송시열(宋時烈)을 각각 추가 배향하여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이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헐리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祠宇)·양성당(養性堂)·응도당(凝道堂)·장판각(藏板閣)·정회당(靜會堂)·산앙루(山仰樓)·내삼문(內三門)·외삼문(外三門)등과 하마비 송덕비가 있다.


이 서원의 사우 및 응도당은 충청남도 유형 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우에는 김장생을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에 김집·송준길·송시열이 배향되어 있다. 매년 2월 중정(中丁)과 8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4변( ) 4두(豆)이다.


소장 전적으로는 {사계전서 沙溪全書} {신독재전서 愼獨齋全書} {상례비요} 등 78종 245책이 있으며, 유물로는 {상례비요} 판각 2,100판과 옥등잔(玉燈盞), 임금이 내린 벼루(賜額硯) 등이 있다. 재산은 전답 3,600여평, 임야6.5정보가 있다.

 

2. 그의 일생


김장생(金長生; 1548∼1631 명종3∼인조9).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광산(光山; 현재 전남 광주) 김씨. 자는 희원(希元; 으뜸을 바람). 호는 사계(沙溪). 명종 3년 6월 8일 서울 정릉동(지금의 정동, 문화방송 있는 곳)에서 대사헌 김계휘(金繼暉; 호 黃岡)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5대조 김국광(國光)은 좌의정, 광산(光山) 부원군이요, 고조부 김극뉴(克 )는 대사간이요, 증조부 김종윤(宗胤)은 진산 군수, 조부 김호(鎬)는 지례 현감이고, 아버지 김계휘는 대사헌이었다. 김집(金集)은 아들이다. 그의 집안은 상당한 명문이었던 것 같다.


11살 때 어머니 신씨를 여의고, 아버지는 당시 권세를 장악한 윤원형의 미움을 사서 외직으로 쫒겨났다. 이에 할아버지(김호)가 그를 길렀는데, 그는 몸이 약했다. 13살(1560)에 구봉 송익필(宋翼弼)로 부터 4서(四書)와 {근사록 近思錄} 등을 배웠고, 20세 무렵에 이이(李珥)의 문하에 들어갔다. 19살에 결혼하여 21살에 김집을 낳았다. 28세(1575, 선조9)에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서 평양에 갔다. 주색을 도외시하고 공부만 했다고 함.


31살(1578, 선조11)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창릉 참봉(昌陵參奉)이 되고, 1581년(선조15) 종계 변무(宗系辨誣)의 일로 아버지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돈녕부 참봉이 되었다. 35살(1582)에 부친이 죽자 묘 앞에서 여막을 짓고 3년상을 치루었다. 복을벗으면서 순릉 참봉(順陵參奉; 1584)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직했다.


이후 평시서 봉사(平市署奉事)를 거쳐 활인서(活人署)·사포서(司圃書)·사옹원(司饔院) 등의 별제(別提)와 봉사(奉事)가 내렸으나 모두 병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 뒤에 동몽 교관(童蒙敎官)·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 1590)의 직을 거쳐 이듬해 정산 현감(定山縣監)이 되었다.
45살(1592 선조26) 4월에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5월에 장자 은이 왜병에게 해를 입고, 배다른 동생(庶弟) 김연손이 왜병과 싸우다가 전사하는 등 불행이 겹쳤다. 49살(1596 선조30)에 정산현감의 임기를 마치고 연산의 집으로 돌아왔는데, 12월에 호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1597년 정유재란에 조정에서 남하하는 명나라 원병에게 줄 군량을 호남에서 조달하도록 임무를 부여하니, 이 일을 완수하고 겨울에 황해도(해서)로 돌아와 문생과 함께 강송을 하던 중 12월에 단양 군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1598년 군자감 청정, 호조 정랑에 임명되었으나 취임치 않고 가을에 {근사록 해의}를 저술했다. 9월에 남양 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치 않고, 이듬해 정월에 양근 군수, 2월에 익위사 익위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치 않았다. 얼마 후 군자감 청정에 제수되어 사양하는 것이 미안하므로 마침내 취임했고, 6월에 안성 군수가 됐고, 9월에 {가례 집람}을 완성하였다. 1601년 조정에서 {주역 구결 周易口訣}을 교정하는 일로 부름을 받아 종친부 전부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직무를 수행하지 못했던 바, 영의정 이항복의 천거로 청백리로 추천되었다.


북인 정권 ; 이듬해 55살(1602 선조36) 봄에 대북(大北)파 정인홍이 집권을 잡자 그 길로 벼슬을 그만 두고 연산의 집에 내려와 양성당을 지어 제자들에게 도학를 강의했다.


1603년(선조37) 여름부터 1605년 겨울까지 익산 군수를 지냈다. 1609년 (광해2) 익위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8월에 회양 부사를 제수받고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고 11월에 부임했다. 1610년 10월 회양은 북방의 요충 지대이므로 무인으로 임명하는 것이 적합하므로 철원 부사로 체임되었다. 그는 선조 말과 광해군 대에는 주로 지방관을 역임하였으나 잘 나가려 하지 않았다. 북인이 득세하는 한 서인인 그는 지방으로 돌게 되어 있었다. 거기다가 김장생은 대북의 영수 정인홍을 싫어했다.


위기 : 철원부사로 재직한 1613년(광해군5, 66세)에는 서얼들이 일으킨 역모 사건[계축 화옥]에 그의 배다른 동생(庶弟; 서자임) 김경손(慶孫)과 김평손(平孫)이 연루되어 옥사하였고, 대북 정권의 실력자 이이첨이 연좌형인 역률(逆律; 반역죄)을 그에게까지 적용하려 했으나, 대신들의 건의로 사태는 무사히 일단락되었다. 이이첨은 이 역모(逆謀)에서 서얼(庶孼; 서자들)들이 영창 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고 해서 영창 대군을 죽였고, 이후 인목 대비 폐모 논의(廢母論議)가 일어났다. 이 사건은 김장생 일생에 최대의 위기였고, 그의 간담이서늘했을 것이다. 거의 죽음의 문턱에서 간신히 벗어나 그는 연산의 집으로 낙향하여 10여년간 은거하면서 예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 몰두하였다. 1618년 {경서변의} 8권을 완성하였다.


그는 임진왜란 이후 계속 정권을 잡지 못한 서인 계열이었고, 동인 가운데 강경파인 대북이 계속 정권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을 방법을 연구한 것 같다. 그러다 이 역모 사건으로 거의 죽을 뻔했다. (김장생의 배다른 형제, 즉 서자들은 매우 기가 센 사람들인 것 같다. 김연손은 임란 때 싸우다 죽고, 김경손과 김평손은 역모에 가담하여 죽었다.) 김장생은 아마 이 사건으로 인조 반정이라는 쿠데타를 결심한 것 같다. 인조 반정의 주축이 바로 그의 제자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예학을 연구한 것은 광해군 정권을 치는 이념적 근거를 찾은 것 같다. '어머니를 유폐시키고 동생을 죽인 것'은 효에 어긋나고, '명나라를 버리고 청나라를 섬긴 것'은 충에 어긋난다는 인조 반정의 명분/이념을 그가 제공한 것이다.


인조 반정과 화려한 출세 ; *75세(1623 인조1) 3월에 인조 반정/쿠데타가 성공하자 반정의 두 주역인 김류(金 )와 이귀(李貴)에 의해 산림 처사(山林處士)로 추천하여, 사헌부 장령에 나갔으나, 곧 이어 성균관 사업(司業)으로 옮겨 원자(元子; 세자가 될 큰 아들) 보도(輔導)의 임무를 겸하다가 10월에 거듭 상소하여 병을 이유로 다시 낙향했다. 이 무렵 서울에 있으면서 그는 반정의 주역(元勳)들에게 글을 보내서 "임금의 덕을 도와서 잘 인도하고, 조정을 잘 보전하며" 정국삼장의 과오를 밟지 말도록 충고하였다. 또 경연에서 인조가 늙은 그를 위로하며 머무르라는 말씀이 간절하므로, 차문(箚文)을 올려 '제왕이 학문을 하는 길'을 아뢰니, 왕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의 나이와 경력을 감안하여 원자(큰 아들)를 이끌고(輔導) 성균관 학생을 가르치는 일(司業)을 맡겼다. 이런 일련의 일을 보면, 그는 인조 반정의 총괄자였던 것 같다. 반정의 주역들에게 임금과 조정을 장악하라는 것, 임금에게 참된 왕이 되라고 하는 것. 이 모든 것은 그의 위치가 무엇인지를 말해 준다.


이괄의 난 ; 이듬해 1624년 인조 반정의 주역이면서도 무인(武人)이라 차별받았던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하자 인조가 공주로 파천할 때 어가를 맞이하고, 난리가 평정된 후 임금의 수레를 호종하고 서울로 돌아와 상의원정(尙衣院正)에 임명되고 또 사헌부 집의에 제수되어 세번이나 글을 올려 사퇴코자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아 휴가를 청하여 고향에 돌아와 상소문을 올려서 중요한 정사(政事) 13가지 일을 아뢰었다. 그가 상소문을 올린 것은 반정의 주역들과 국왕이 반혁명 같은 것을 제대로 예상하고 처리하지 못하였던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10월에 부름에 따라 서울에 가서 원자(元子)를 가르치고, 이듬해 1625년 원자가 세자로 책봉되니 그는 가선대부에 임명되었다. 이후 동지중추부사를 제수하자 휴가를 얻어 다시 연산의 시골집으로 왔다. 1626년에는 이이 성혼(成渾)을 제향하는 황산서원을 강경에 건립하였다.


정묘호란 ; 1627년 정월 후금(청나라)이 쳐들어오자(정묘호란), 그는 양호 호소사(兩湖 號召使)로 임명되어 80세의 노구를 이끌고 양호지역에 격문을 돌려 의병과 식량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의병을 모아 공주로 피난온 세자를 호위하였다. 4월 휴전 협정이 맺어지고 적이 물러가니, 모은 군사를 해산하고 강화도의 행궁(行宮)으로 가서 왕을 배알했다. 이듬해 1628년 9월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한달 만에 다시 사직하여, 용양위 부호군으로 낙향한 뒤 출사하지 않았다. 1629년 윤 4월에 왕이 "마차를 타고 오라"고 하교하였으나 상소하여 사양하니, 왕이 비답을 내려 "경을 이 나라의 대로(大老)요, 덕행이 뛰어나니, 바야흐로 자리를 비워놓고 기다리노니 경은 다시 사양하지 말라" 하였으나 글을 올려 정중히 사양했다. 1630년 4월, 83세 노인을 우대하는 식전이 있어 가의대부에 올랐다.


1631년 5월에 병이 났다가 8월 3일 서거하니, 향년 84세. 임금이 부음을 듣고 슬퍼하여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돕게 했다. 이때 문도로서 복제를 갖춘 분이 수백이고, 장례일에 모인 사람이 수천이었다. 이 해 11월에 진잠현 성북리에 안장하였고 1636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641년 묘를 현재의 논산군 연산면 고정리로 옮겼으니, 그의 시조되는 할머니 허씨 묘의 윗쪽이다. 1657년(효종 9)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 1717년(숙종44) 문묘에 배향되었다. 연산 돈암서원, 해주 소현서원, 파주 자운서원 안성의 도기(道基)서원 등 10여 서원에 봉향되었다.


정치적 영향력 ;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였을 뿐더러 과거를 거치지 않아 요직이 많지는 않았지만, 인조 반정 이후로는 서인의 영수격으로 영향력이 매우 컸다. 인조 즉위 뒤에도 향리에서 보낸 날이 더 많았지만, 그의 영향력은 같은 이이의 문인으로 줄곧 조정에서 활약한 이귀(李貴)와 함께 인조 초반의 정국을 서인 중심으로 안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제자들 ; 그의 문인은 많은데,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이유태(李惟泰) 강석기(姜碩期) 장유(張維) 정홍명(鄭弘溟) 최명룡(崔命龍) 김경여(金慶餘) 이후원(李厚源) 조익(趙翼) 이시직(李時稷) 윤순거(尹舜擧) 윤원거(尹元擧) 이목(李 ) 최명길(崔鳴吉) 이상형(李尙馨) 송시영(宋時榮) 송국택(宋國澤) 이덕수(李德洙) 이경직(李景稷) 임의백(任義伯) 등 당대의 비중 높은 명사가 즐비하게 배출되었다. 학문과 교육으로 보낸 향리 생활에서는 줄곧 곁을 떠나지 않은 아들 김집의 보필을 크게 받았다. 아들 김집도 그의 제자이지만, 그의 제자들 사이에는 그를 '노선생', 그리고 아들 김집을 '선생'으로 불렀다고 한다.


학통과 저서 ; 학문적으로 송익필·이이·성혼 등의 영향을 함께 받고 있었지만, 예학(禮學) 분야는 송익필로 부터의 영향이 컸으며, 예학을 깊이 연구하여 아들 김집에게 계승시켜 조선 예학의 태두로 예학파의 한 주류를 형성하였다. 인조 즉위 뒤 서얼 출신이었던 송익필이 그의 아버지 송사련(宋祀連)의 일로 환천(還賤)된 억울함을 풀어 주기 위해 같은 문하의 서성(徐 )·정엽(鄭曄) 등과 신변사원소(伸辯師寃疏)를 올렸다. 또한, 이이와 성혼을 위하여 성혼을 세웠을 뿐 더러 1만8천여자에 달하는 이이의 행장을 짓기도 했다. 스승 이이가 시작한 {소학집주}를 1601년에 완성시켜 발문을 붙였는데, {소학}에 대한 관심은 예학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1583년 첫 저술인 {상례비요 喪禮備要} 4권을 비롯, {가례집람 家禮輯覽} {전례문답 典禮問答} {의례문해 疑禮問解} 등 예에 관한 것이 있고, {근사록석의 近思錄釋疑} {경서변의 經書辯疑}와 시문집을 모은 {사계 선생 전서}가 전한다.

 

3. 평가


그는 '長生'이라는 이름처럼 84세까지 살았다. 명종-선조-광해군-인조라는 네 임금의 치세가 있었으며,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겪었다. 그는 크게 보아 두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⑴ 충청도 서인-노론의 시작 ; 그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주로 연산(돈암서원 있는 곳)에서 살았다. 그의 집안은 아버지 김계휘 이래 서인이었다. 김계휘는 이이 송익필의 친구였고, 그래서 김장생은 송익필과 이이라는 서인의 창시자에게서 배웠다. 그리고 연산에 와서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 이유태 유계 김집 이경직 등 인조 이래 숙종 때까지 중앙 정계와 학계를 좌우하던 충청도 지식인을 교육해 냈다.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 유계 등 그의 제자들은 주로 대전을 중심으로 살았다.) 선조 말년부터 광해군 때까지 서인이 정권에서 소외되어 쓸쓸하던 시절 그는 연산에서 그 많은 제자들을 키워서 쿠데타로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켰다. 뿐만 아니라 서인의 주도권이 서울에서 충청도로 오게 되었다. 송시열이 효종-숙종 때 정국을 좌우하게 된 바탕이 바로 김장생에게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뛰어난 교육자였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정치적 감각을 가졌다. 선조 이전 훈구파에 사림이 탄압당할 때(士禍) 사림은 지방에 은거해서 제자들을 키워서 드디어 선조 등극이라는 명예 혁명/무혈 혁명을 이루고 정권을 장악한다. 그들이 바로 동인이다. 권력에서 밀려난 서인, 그들은 서울 지역의 훈구 척신의 후예들이다. 그 서인의 맥을 이은 김장생은 탄압당할 때 사림의 전략 - 지방에 은거해서 제자를 키움 - 을 그대로 구사해서 성공한다. 이제 '산림(山林)'이라는 '여론 주도자'(검열관) 겸 '지식인/관료-정치인 양성자'가 사림이 아닌 훈구의 후예, 즉 서인으로 가게 된 것이다.


⑵ 인조 반정 ; 그는 교육자였을 뿐만 아니라 대세 감각이 탁월한 정치가였다. 그의 삶은 입지전적이다. 서인이 정권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에 지방관으로만 전전했던 광해군 때까지 그는 교육을 통해서 집권의 야망을 키웠던 것 같다. 그러나 66세대 일어난 배다른 형제들(서자들)이 역모에 연루되었을 때 그는 거의 죽음의 지경까지 갔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고 인조 쿠데타를 성공시킨다. 그가 쿠데타의 실무에서 실천까지를 주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이 쿠데타의 실무에서 실천까지 하게 후원하고 조직한 정신적 지주였다. 어쩌면 그는 전략적인 관점을 제시했는지 모른다. 즉 광해군 시절은 정권 전복(謀叛) 음모로 전철되어 있다. 김장생이 끌려들어갈 뻔 했던 계축 화옥, 허균이 일으킨 모반 등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 정권 전복 음모의 대미는 바로 인조 반정이 장식했다. (그런 점에서 광해군이 과단성 있게 반대파를 숙청하지 못 한 것이 화근이었을 것이다.) 그 이전에 실패했던 엉성한 음모들과는 달리 그의 제자들은 치밀하게 조직해서 성공했다.

 

그가 평생 연구한 예학(禮學)은 인조 반정의 이념적 토대가 된다. 광해군이 '어머니를 유폐시키고 동생을 죽여서 효를 어기고, 명나라를 버리고 청나라를 섬긴 것은 충을 어겨서' 충효를 어겼다는 단죄는 바로 그의 예학의 산물일 것이다. 그는 특히 계축 화옥 이후 예학을 연구하면서 제자들과 더불어 광해군에 대한 적개심을 키웠을 것이다. 바로 그 적개심은 또한 정의 의식일 것이니, 윤리 도덕(禮)를 실천하는 원동력일 것이다. 인조 반정을 이끌어 성공시킨 힘이 바로 그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모순이기도 하다. 예를 배우는 자들이, 그리고 충효를 높이 드는 자들이 임금을 몰아내는 것은 충효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아니 친어머니가 아닌 여자를 유폐시킬 때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광해군에 비해서 인조 쿠데타는 윤리적으로 더 문제이다. 그런 문제는 눈 감고, 윤리 도덕을 외치는 정의감은 참된 정의감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인조 반정은 정의 의식의 산물만은 아니다. 그것은 선조 말년 이래 정권에서 밀려난 서인들의 치열한 권력욕에 불과하다.


인조 이후 '윤리 도덕(즉 禮의) 실천'은 이제 국시(國是)가 되었고, 서인 정권의 집권의 정당성이 되었다. 어느 누구도 그 국시에 도전하지 못했고, 오히려 앞장 서서 윤리 도덕(강상 윤리, 대의 명분, 명분 의리)을 부르짖었다. 그런데 강한 후금-청나라가 있었다는 것은 커다란 불행이었다. 청나라가 힘으로 밀어붙일 때 인조의 정권에는 윤리 도덕만 목청껏 외치는 소리로 가득찼다. 전쟁을 해서 청나라에게 질 경우에 대비하는 목소리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전쟁에 지자 그것에 책임지는 자도 없었다. 이래서 결국 김장생의 예학이란 쿠데타의 명분에 불과하게 된다.


김장생의 예학은 주로 가례(家禮), 즉 집에서 하는 개인적인 윤리 규범이었다. (반면 한강 정구에서 시작하는 남인의 예학은 고례(古禮)였고, 나아가 {주례(周禮)}처럼 국가 제도와 연관된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김장생 이래 송시열은 군주에게 적용되는 예도 개인에게 적용되는 예, 즉 가례를 모범으로 본다. 그런 식으로 보는 것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책임이나 경륜을 도외시하고, 어떤 경우에도 윤리 도덕을 지켜야 한다는 강경한-호전적인 규범론자가 된다. 그런 경향이 바로 병자호란에서 나타난다.


⑶ 리-기의 형이상학에서 예학(禮學)으로 ; 김장생 이전에 무림 4천왕이 일세를 풍미할 때 성리학은 주로 리-기 등을 따지는 형이상학이 주된 것이었다. 기대승과 이황의 4-7 논변은 대표적으로 그런 것이다. 그리고 이이와 성혼의 논변도 그렇다. 그런데 김장생이 예학을 하면서, 성리학의 주된 흐름은 예학이 된다. (한강 정구도 예학을 했지만 주된 흐름으로 바꾼 것은 김장생이다.) 그의 예학이 인조 쿠데타의 이념이 되므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리고 병자 호란 패배 뒤에도 여전히 서인이 정권을 잡자 예송 논쟁이 일어나게 된다. 남인의 입장에서는 '강상 윤리, 명분 의리'로 여론을 주도하면서 전쟁을 일으켜 놓고, 그래서 처참하게 패배해도 책임을 지지 않고 권력도 내놓지 않는 서인과 맞싸우는 전략으로, 예는 예로 따진다는 것을 선택한다. 이른바 예송 논쟁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김장생을 이은 송시열은 한번 이기고 한번 진다. 그렇게 해서 정권이 교체된다.


예학은 모든 것을 대립적 이분법적으로 보게 만들고, 호전적이고 투쟁적이게 한다. 광해군을 몰아낸 쿠데타는 성공했으나, 청나라와의 싸움은 패배였다. 그리고 남인과의 싸움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다, 집권 서인이 노론 소론으로 갈라지게 된다. 이런 대립-투쟁을 벗어나고 싶은 일군의 사람들이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안동 김씨 집안의 김창협 등을 대표로 하는 서울 노론이다. 그들은 송시열 류의 예론-소중화론을 거부한다. 예(禮)보다는 문화(문학과 미술 등)으로 넘어간다. 이렇게 해서 결국 서인-노론의 주도권은 서울 지역 지식인으로 넘어간다.


김장생은 충청도 지식인, 충청도 서인들의 전성기를 만들어낸 사람이다. 그는 예학(禮學)이라는 분야를 개척해서 그렇게 했을 뿐만 아니라 제자를 키워내서 그렇게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그의 능력을 인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