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學笛

윤증尹拯 명재(明齋) - 서인 소장파 소론을 이끌다

푸른하늘sky 2019. 5. 26. 18:32

윤증이 살았던 17세기 조선은 정치 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정쟁이 어느 때보다 격렬했던 시기였다. 이른바 4색 당파라 해서 동인이 북인과 남인으로 갈라지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던 시기였다. 이때 송시열이라는 정치 사상계의 거물과 맞서며 진보적인 소장파를 이끈 이가 바로 윤증이다.

윤증의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이다. 할아버지는 윤황(尹煌)이고, 아버지는 윤선거, 어머니는 공주 이씨 장백(長白)의 딸이다. 윤증은 아버지와 유계(兪棨)에게 배우고, 뒤에는 장인인 권시와 김집에게 배웠다. 스물아홉 살에 김집의 권유로 당시 회천에 살고 있던 송시열에게 《주자대전》을 배웠다. 그는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제자로 촉망을 받았다.

윤증은 예론에 정통한 예학자이자 성리학자로 학명이 높았다. 그는 1663년(현종 4)에 천거되어 내시교관, 공조랑, 지평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했다. 숙종 대에도 호조 참의, 대사헌, 우참찬, 좌찬성, 우의정, 판돈녕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학문에 전념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생겼을 때는 상소를 올려 소견을 피력하면서 정치가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숙종 초 정치적 견해의 차이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할 때 노론의 영수 송시열에게 대립해 소장파들을 이끌며 소론의 영수로 추앙받았다.

윤증(尹拯, 1629~1714년)

송시열의 주자학적 조화론과 의리론을 비판하였고, 《중용장구》의 주자주를 개변한 진보적인 성리학자였다. 이로 인해 송시열에게 사문난적이라고 불리며 송시열 일파와 척을 지게 되었으나 소론 진보 세력들에 의해 지지받으며 노론의 일당전제체제를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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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도 마다한 산림처사

윤증의 집안은 당대 최고의 학자 집안이었다. 할아버지 윤황은 이이와 함께 기호학파를 이끈 성혼의 사위였다. 그리고 아버지 윤선거는 이이의 학통을 이은 김장생의 제자였다. 즉 윤증은 이이와 성혼의 양쪽 학맥을 이어받아 태어날 때부터 정통 조선 유학자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아버지는 물론 아버지의 동문들이 송시열, 송준길 등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들이었기에 최고의 스승을 모시고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누구보다 쉽게 누릴 수 있었다.

윤증은 유계와 권시, 송시열 등 여러 학명 높은 스승들에게 사사받고 학문에 열중해 이름을 알렸다. 현종과 숙종은 윤증을 내시교관, 공조랑, 지평, 호조 참의, 대사헌, 이조 판서, 우참찬, 좌찬성, 우의정, 판돈녕부사 등 여러 번 관직에 제수했지만 그는 한 번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보통 서너 차례 거절하다가도 대여섯 번 넘게 청이 오면 받아들이게 되어 있었다. 퇴계 이황도 재야에 머물며 관직을 수도 없이 사양했지만, 마지못한 듯 출사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윤증은 끝내 이를 거절했다. 최고 관직인 정승 자리마저 사양하니 윤증은 ‘백의정승(白衣政丞)’, 즉 관복을 입지 않은 정승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런데 윤증이 여러 높은 스승들에게 사사받고 학문에 열중하면서도 관직에 오르지 않은 데에는 사연이 있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당시 윤증은 여덟 살이었다. 그런데 이때 양친과 강화도로 피란을 갔다가 아버지는 탈출했으나 어머니가 자결하는 일을 겪었다. 윤선거는 살아남은 죄책감으로 관직에 오르지 않고 평생 고향에 은둔해 학문을 닦았다. 윤증 역시 같은 아픔을 가슴속에 품고 아버지와 같은 길을 선택했던 것이었다. 젊은 날에는 윤증의 재능을 아껴 주위에서 과거시험을 볼 것을 권하기도 했는데, 윤증은 그때마다 “가슴에 통한이 있어 과거에 응시할 수 없으며, 일평생 학문에 전념하겠다.”고 말했다.

윤증은 주자의 《사서집주(四書集註)》에 근본을 두고 유학의 근본 사상을 이해하면서 이이와 성혼의 도학적 경세관을 이어받았다. 특히 이이의 ‘기발이승(氣發理乘)’과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수용한 이기론과 심성론을 한 차원 발전시켰다는 평을 받는다. 윤증은 예학에도 특히 밝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이의 《격몽요결》과 《주자가례》를 계승해 학자들이나 제자들의 예에 관한 물음에 답하고, 이를 종합해 《명재선생의례문답(明齋先生疑禮問答)》을 8권 4책으로 간행하기도 했다.

나라에서 내리는 녹봉도 마다하고 오로지 학문과 후진 양성에 힘썼으나, 윤증은 소론의 이론가로 끊임없이 선비들에게 회자되었다. 정승도 마다하고 산림에 묻히길 원했으나 윤증도 조선 후기의 거센 정쟁의 회오리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윤선거와 윤증

윤증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아버지 윤선거이다. 윤선거는 이이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장생과 김집의 문하에서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등과 동문수학하고 명성을 얻었던 성리학자였다. 1633년(인조 11) 생원시와 진사시에 급제하고 성균관에 입학하면서 입신의 탄탄대로를 가던 윤선거. 윤선거는 1636년(인조 14) 후금의 사신이 입국했을 때만 해도 유생 대표로 명나라에 대한 의를 지키기 위해 사신을 죽이자고 상소할 정도로 혈기 넘치는 젊은 유학자였다. 그러나 병자호란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전쟁이 발발하자 윤선거는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함께 강화도로 들어갔다. 아버지 윤황은 인조를 모시고 남한산성에 남아 있었다. 강화도에서 윤선거는 권순장(權順長), 김익겸(金益兼)과 함께 죽음의 맹세를 했다. 의병을 일으켜 최후까지 싸우다가 자결하기로 한 것이다. 승패에 큰 기대를 건 것은 아니었다. 그저 원통하고 굴욕적인 심정을 그렇게나마 분출한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강화성은 너무나 쉽게 무너졌고, 의병을 일으키기는커녕 속무수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당시 남문을 지키고 있던 권순장과 김익겸은 김상헌의 형인 김상용(金尙容)을 따라 자결했다. 윤선거의 아내 또한 절의를 지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윤선거는 자식을 앞에 두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아버지도 남한산성에 남아 있는 터였다. 그는 결국 아버지와 남한산성에서 함께 죽기 위해 노비로 변장하고 강화도를 빠져나왔다. 그러나 남한산성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살아남았다.

살아남기는 했으나 윤선거는 자괴감에 시달렸다. 그때 죽지 못하고 구차하게 살아남은 자신을 늘 한탄했다. 출사도 포기하고, 재혼도 하지 않았다. 왕이 여러 번 관직을 내렸지만 사양하고 평생 고향에 칩거하며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매진하는 것이 그가 견디는 방법이었다. 윤증 역시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안은 채 아버지와 같은 삶의 방식을 선택했다. 아버지의 회한과 통한을 알고 있었기에 윤증에게 윤선거는 남다른 아버지였다.

훗날 윤증이 송시열과 결별하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는 데 윤선거와 송시열의 관계가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윤선거와 송시열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윤선거와 송시열은 김장생과 김집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한 동문이고, 서로 혼맥으로 얽혀 있는 절친한 사이였다. 그런데 1653년(효종 4) 윤선거, 송시열, 유계, 윤원거 등 10여 명이 황산서원에서 모인 어느 날, 윤휴의 학문을 두고 토론을 하다가 윤선거와 송시열은 사이가 벌어지고 말았다. 송시열은 본시 주자를 신앙적 차원에서 숭앙한 유학자인 반면, 윤휴는 《중용장구》의 주자주를 완전히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개변하는 등 파란을 일으킨 학자였다. 송시열은 그런 윤휴를 용서할 수 없었고, 끝내 사문난적으로 몰아붙였다.

“젊은 학자가 자기 생각을 펼 수도 있지, 사문난적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심하지 않은가?”

윤선거는 윤휴의 탁월한 식견을 아꼈다. 그래서 이렇듯 윤휴를 옹호하고 나선 것이었다. 송시열과 윤선거는 이 문제로 밤새 논쟁을 벌였다. 이후 두 사람의 갈등은 잠잠해지는 듯하다가 1665년(현종 6) 동학사에서 다시 윤휴를 두고 논쟁을 벌였고, 송시열은 윤선거가 죽을 때까지 윤휴와의 관계를 의심하며 마음에 앙금을 남겼다. 윤증은 윤선거와 송시열의 갈등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아버지의 고충을 이해했다. 하지만 송시열은 자신의 스승으로 그 은의를 저버릴 수 없었기에 항상 자중하며 제자로서의 도리를 다했다.

회니시비, 송시열과 갈라서다

1669년(현종 10) 윤선거가 예순 살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송시열과의 문제도 끝나는가 싶었다. 하지만 일은 이때부터 새로 시작되었다. 송시열은 윤휴의 일로 윤선거를 못마땅해했지만, 그래도 오랜 교우관계였기 때문에 상에 제문을 보내왔다. 이때 윤휴도 그의 아들 편에 제문을 보내왔다. 윤증은 이를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이를 안 송시열은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래서 “선거가 휴(鑴)에 혹한 사람 중에 제일이다.”라고 비방하기 시작했다.

자세한 내막을 몰랐던 윤증은 박세채가 지은 행장과 자신이 만든 연보를 가지고 송시열에게 아버지의 묘갈명을 부탁했다. 그러면서 윤증은 아버지가 생전에 송시열에게 보내려고 써 두었던 편지도 도움이 될까 싶어 함께 보냈다. “윤휴와 허목 등은 본시 사류이므로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너무 내치지 말고 차차 등용해 쓰는 것이 인심을 얻는 일이다.”라는 내용이었다. 이를 받아본 송시열은 윤증의 생각과 달리 격분했다. 윤선거가 윤휴를 끝까지 인정한 것이 사실임이 판명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윤선거 이 사람은 완전히 윤휴의 당이 아닌가!”

당연히 송시열은 윤선거의 비명을 찬술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행장을 지은 박세채의 권유에, 또 생전의 정리 때문에 송시열은 윤증의 청을 끝까지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마지못해 “박세채가 쓴 행장을 따라 쓸 뿐 새로이 짓지는 않는다.”며 불성실하게 비명을 찬술해 주었다.

윤증은 비문을 고쳐 써 줄 것을 간청하는 편지를 여러 번 보냈다. 송시열이 사는 곳까지 직접 찾아가 울면서 애원하기까지 했다. 송시열은 그때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고쳐 주기는 했지만 자구를 수정하는 정도에 그쳤다. 결국 윤증이 받아든 최종 묘갈명은 이러했다.

진실하게 현석(玄石, 박세채)이 더할 수 없이 표현했기에 나는 그의 말을 따라 이 비명을 쓰는 것이다.

윤증으로서는 참으로 섭섭한 일이었다. 그런데 윤선거를 비판하는 송시열의 태도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앞서 보낸 윤선거의 제문에는 윤선거 일생의 최대 오점이었던 강화도에서의 일을 “아버지가 살아계시므로 감히 마음대로 죽을 수 없었다.”고 무던하게 썼음에도 이를 새삼스럽게 들먹였다. “이미 그와 벗을 했으니 그가 죽은 뒤에 배척하는 것이 옳은가 한다면, 나는 이것은 그렇지 않다. 윤휴가 사문난적임에도 길보(吉甫, 윤선거)는 끝까지 그를 두둔했으니, 이 역시 이단이다. 내 어찌 배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면서 강화도 일을 빗대 죽어야 할 도리가 있는데도 죽지 않았다고 시를 읊었다.

수치를 모르고서 말꼴을 먹고는(甘心莝荳不知羞)
뻔뻔스레 다시 와서 호탕하게 노니누나(靦面重來躡儁遊).
청류를 향해 옷소매 빨지 마소(莫向淸流涴衣袂).
때 묻은 옷소매에 청류 더럽혀질까 두렵소(却恐衣袂涴淸流).
《송자대전》 부록 권16, 어록 3

윤증은 송시열이 자신의 스승이었기에 묘비명 사건 이후에도 사제지간의 예를 다하려고 노력했지만 더는 참기가 힘들었다. 결국 윤증은 사제 간의 의리를 끊고 “부친이 죽어야 될 의리는 처음부터 없었고, 부친이 살아남게 된 것은 천명”이라고 반박했다. 송시열은 윤선거에 이어 윤증에게 다시 한 번 분노했고, 결국 두 사람은 돌이킬 수 없는 불화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회니시비(懷尼是非)이다.

서인의 분열, 소론을 이끌다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쫓겨나고 서인이 재집권했지만, 서인은 척신들의 간섭과 음모 등으로 내부적인 진통을 겪고 있었다. 여기에 서인의 유력한 이론가였던 송시열과 윤증의 불화가 지속되면서 서인은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른바 회니시비로 마음속에 원망을 담고 있던 송시열과 윤증은 1680년(숙종 6) 숙종이 정국의 안정을 위해 송시열, 박세채, 윤증 등 세 원로를 조정으로 불러들이는 과정에서 다시 한 번 사이가 벌어졌다. 숙종은 민정중(閔鼎重)과 의논해 송시열, 박세채, 윤증 세 사람을 불러 쓰고자 했다. 송시열과 박세채는 이에 호응했으나, 문제는 윤증이었다. 윤증은 송시열과 함께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그러자 박세채는 송시열과 윤증을 화해시키려고 노력했고 “그대의 출사가 위로는 군주의 배려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사우의 의리를 온전히 하는 의미가 있다.”며 윤증을 설득해 일단 과천까지 오게 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윤증은 과천으로 찾아온 박세채에게 다음의 조건이 성립돼야 입조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첫째, 서인과 남인 사이의 원독(怨毒)을 풀어 줄 수 있습니까? 둘째, 3척(三戚, 광산 김씨, 청풍 김씨, 여흥 민씨)의 정치적 개입을 막을 수 있습니까? 셋째, 자기편은 등용하고 반대파는 배척하는 폐단을 시정할 수 있습니까?”

이는 넓게는 소론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박세채는 윤증의 입장을 듣고 고개를 저었다. 모두 송시열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사안이었고,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 3인동사로 불리며 추진되었던 이 일은 완전히 결렬되었고, 이와 함께 송시열과 윤증을 중심으로 사론이 분열되고 노소 분당이 가시화되었다.

1681년(숙종 7) 서인이 공공연히 노론과 소론으로 나누어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이 일어났다. 임술년 고변 사건이다. 이 사건은 외척 김석주와 김익훈이 남인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김환과 전익대 등을 고용해 역모 사건을 꾸민 일이었다. 남인의 이 사건은 김환, 전익대, 김중하 세 사람이 각각 세 번이나 허새(許璽), 허영(許瑛) 등을 역모로 고변했지만 결국 무고로 밝혀졌다.

이 일로 김익훈은 젊은 사류들에게 비판을 받았다. 그렇지 않아도 김익훈은 군문의 은을 유용하고 세금을 착복해 빈축을 사고 있었는데, 무고 사건이 터지자 훈척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조지겸 등 일군의 사류들이 김익훈의 처벌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면서 송시열의 의견을 궁금해했다. 송시열의 생각은 서인에게는 천금과도 같은 효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송시열은 김익훈의 잘못을 분명히 지적했다.

그러나 김수항, 민정중, 김만기 등의 설명을 듣고는 김익훈에 대한 태도가 돌변했다. 처벌을 주장하기는커녕 오히려 감싸고돈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연로한 대신들은 남인은 모두 역당이라는 인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김익훈이 취한 수단이 정상은 아니지만 남인을 제거하기 위해 그럴 수도 있다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젊은 사류들은 송시열의 판단에 불만을 가지게 되었고 급기야 원망으로 이어지면서 서인의 노소 분당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송시열이 중심인 노론, 윤증이 중심인 소론으로 분열되던 서인은 1682년(숙종 8) ‘신유의서(辛酉擬書)’로 송시열과 윤증의 갈등이 더 이상 회복 불가능으로 접어들면서 완전히 나누어졌다. 신유의서란 윤증이 당시 사류들의 원성을 사고 있던 송시열의 처신에 대해 비판 조의 논설을 편 편지글이다. 그 글에서 윤증은 송시열이 지나치게 윤휴와 남인을 몰아붙여 정치적 실효는 하나도 거두지 못한 채 당쟁만 격화시켰다고 지적했다. 또 그가 평생을 바쳐 주창한 대의도 실효가 없다고 했고, 심지어는 송시열의 편벽된 기질까지도 논박했다.

편지를 손에 넣게 된 송시열은 “윤증이 반드시 나를 죽이려 한다.”며 대노했고, 송시열과 윤증은 이로써 사제 간의 의리를 완전히 끊고 정적(政敵)이 되었다. 이에 따라 서인은 송시열을 지지하는 노론과 송시열을 반대하고 윤증을 지지하는 소론으로 나뉘었다. 윤증은 출사하지는 않았으나 중요한 정치적 문제가 생길 때마다 자신의 소견을 상소로 피력하거나 사류들에게 서신을 통해 정치적 견해를 밝히면서 소론을 이끌어 노론이 일방적으로 정국을 장악하게 될 상황을 견제했다.

죽어서도 논란의 중심에 선 윤증

송시열과 윤증 두 사람 중 누가 옳은가는 숙종 대는 물론 송시열과 윤증이 모두 사망한 정조 대에 이르기까지 노론과 소론 사이에서 끊임없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윤증을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시각에 대한 숙종의 태도에 따라 노론과 소론의 희비가 갈렸다. 대표적인 사건이 《가례원류(家禮源流)》 시비와 병신처분(丙申處分)이다.

1714년(숙종 40) 윤증이 죽자, 숙종은 단 한 번도 대면한 적이 없는 윤증을 존경한다는 의미의 애도시를 그의 영전에 올렸다. 이는 소론의 정신적 지주에 대한 예우로, 노론의 입장에서는 심기가 불편해지는 일이었다. 여기에 최석정(崔錫鼎)이 지은 윤증의 제문에 “송시열의 북벌론은 허명을 훔친 것이다.”라는 부분이 문제가 되었다. 윤증 사후에 다시 한 번 회니시비가 불거진 것이다. 송시열의 제자들은 스승의 무고함을 극렬하게 항변했고, 소론도 이에 질세라 윤증 부자를 변호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 사태는 숙종이 제문은 개인 문서에 불과하므로 문제 삼을 것이 없다고 말해 일단락되었다.

다음 해인 1715년(숙종 41)에 윤증과 관련한 시비가 다시 한 번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유계(兪棨)의 손자인 유상기(兪相基)가 《가례원류》를 간행하고자 한 것이 발단이었다. 원래 《가례원류》는 윤증의 아버지인 윤선거와 유계가 공동으로 편찬을 시작한 책인데, 유계가 벼슬에 나가면서 시간이 부족해지자 초본을 윤증에게 부탁했다. 그런데 유계가 죽으면서 그 초본이 그대로 윤증의 집에 보관되었다. 문제는 유상기가 《가례원류》를 자기의 조부 혼자서 편저한 것이라 여겼다는 것이다. 유상기는 윤증을 찾아가 초본을 넘겨 달라고 했고 이것이 공동 편저냐 단독 편저냐를 두고 분쟁이 생겼다. 결국 윤증은 초본을 유상기에게 넘겨 주었고 책이 나오기 전에 죽고 말았다.

유상기는 권상하(權尙夏)에게 서문을, 정호(鄭澔)에게 발문을 받아 책을 간행했다. 그런데 권상하가 쓴 서문에 윤증이 그의 스승인 유계를 배반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선생께서 만년에 이르러 문인 윤증에게 부탁해 윤색, 완역하게 하였고 돌아가실 때에도 이를 당부하셨다. 그런데 오늘날 윤증이 스승의 가르침을 기억하지 못하고 별도로 말을 만들어 내니, 이것이 어찌 선생께서 힘써 촉탁한 뜻이겠는가.
《한수재집》 권22, 〈가례원류서〉

정호도 발문에서 유계가 적임이 아닌 사람에게 부탁해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며 윤증을 헐뜯었다. 그런데 이를 본 숙종이 정호의 파직을 명하고 그의 발문을 쓰지 못하게 했다. 사림의 중망을 받았고 자신이 존경하는 윤증을 이렇게까지 비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숙종의 뜻밖의 일격은 노론과 소론의 논란을 다시 한 번 불러일으켰다. 노론은 명을 거두라 연일 상소를 올렸고 소론은 정호뿐만 아니라 권상하가 쓴 서문도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숙종은 상소를 올려 윤증의 배사(背師) 행위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정언 조상건(趙尙健)을 삭탈관작했다. 이미 교지를 내려 부자사생(父子師生) 간에 누가 중하고 누가 경한가를 분명히 밝혔는데도 이를 무시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또한 유상기에 대해서도 40여 년간의 은혜를 잊고 스승인 윤증을 배반했다는 이유로 유배시켰다. 이러한 숙종의 결정으로 《가례원류》 시비는 표면적으로 소론의 승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숙종은 그다음 해인 1716년(숙종 42) 병신처분을 통해 이전에 소론에게 유리하게 내렸던 결정과는 정반대의 처분을 내렸다. 판중추부사 이여가 송시열을 옹호하고 윤증을 비방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숙종이 이에 동조한 것이다. 이에 고무된 노론이 들고 일어나 송시열과 윤증 중 누가 옳은가에 대한 논쟁이 다시 불붙었다. 숙종은 처음에는 소론의 편을 들어주는 듯했다. 그러나 이내 태도가 돌변했다. 숙종은 회니시비의 빌미가 된 윤선거의 묘갈명과 〈신유의서〉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판결을 내렸다.

신유의서에는 윤증이 송시열을 비난한 글이 많지만, 묘갈명에는 송시열이 윤선거를 욕한 내용이 없다.
《숙종실록》 권58, 숙종 42년 7월 6일

이로써 오랜 시간을 끌며 계속된 회니시비는 그동안 오락가락하던 숙종의 결단으로 결국 노론의 승으로 끝이 났다.

윤증이 소론의 수장이 된 것은 서인의 정신적 지주인 송시열과 개인적인 감정이 얽히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윤선거의 일이나 임술고변의 일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정치적, 사상적 견해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소론의 영수로 추앙받으면서 한 번도 출사하지 않고 정치 일선에 전면으로 나서지 않았지만 젊은 사류들에게 인정받고 정치권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니 윤증은 조선 후기 역사를 만든 ‘백의정승’이라 할 만하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63XX6570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