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學笛

윤휴尹鑴 백호(白湖), - 성리학계의 이단아, 학문적 자유를 꿈꾸다

푸른하늘sky 2019. 5. 26. 20:38

17세기 조선의 사상적 풍토는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주자학 지상주의였다. 주자의 학문이 곧 법이요, 진리이던 시대였다. 그때 혜성처럼 나타나 주자의 학설과 사상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며 독자적 학문 체계를 세우려고 애쓴 이가 바로 윤휴이다.

윤휴의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희중(希仲), 호는 백호(白湖)이다. 아버지는 광해군 때 대사헌을 지낸 윤효전(尹孝全)이며, 어머니는 첨지중추부사 김덕민(金德民)의 딸이다. 윤휴는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할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외할아버지 김덕민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해 조식(曺植)과 학문적으로 가까웠던 성운(成運)의 서실(書室)에서 독서했다. 이수광(李睟光)의 아들 이민구(李敏求)와 이원익에게서도 잠시 학문을 익혔다.

그는 생활이 어려웠지만 학문에 대한 열정은 대단히 높았다. 그래서 정력적으로 독서하고 책을 썼다. 스물두 살에 《사단칠정인심도심설(四端七情人心道心說)》을 지어 이름을 알렸으며, 스물네 살에 《경진일록(庚辰日錄)》을 지어 명성을 확인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청과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치욕을 씻을 때까지 관직에 나가지 않기로 결심하고 과거 준비를 포기했다. 1639년(인조 17) 공주 유천(柳川)으로 내려와 지내면서 《논어》, 《맹자》 등 사서와 시·서·삼례(三禮)·역(易) 등 경서 학습에 몰두했다. 이때 권시(權諰), 윤문거(尹文擧), 윤선거 등과 막역한 관계를 맺고,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등과도 교유했다.

1659년(현종 1) 1차 예송 때 남인인 허목과 함께 송시열의 예론을 반대하면서 송시열과 멀어졌다. 이후 주자의 학설을 비판하다가 송시열로부터 사문난적으로 지목받았다. 2차 예송에서 남인이 승리해 숙종 즉위 후 정치 일선에 나섰으며, 여러 개혁정책들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동부승지, 이조 참의, 대사헌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했으나 1680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유배를 가서 사사되었다. 1689년(숙종 15)에 신원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만 권의 책을 읽다

윤휴의 집안은 대대로 선비 가문이었다. 고조 윤관(尹寬)은 조광조의 문인으로 기묘사화의 피해를 입었고, 증조부 윤호(尹虎)는 이조 참판을 지냈다. 조부 윤희손(尹喜孫)은 화담 서경덕의 제자인 이중호(李仲虎)의 문인으로 과거보다는 ‘요순(堯舜) 공맹(孔孟)의 도’를 닦는 학문에 힘썼다. 아버지 윤효전은 서경덕의 제자 민순(閔純)의 문하에서 공부한 학자이자 관료였다. 정치적으로 소북으로 활동하면서 광해군 때 대사헌을 역임했다. 그러나 1617년(광해군 9) 인목대비의 서궁 유폐를 반대하다 경주 부윤으로 좌천되었고, 이때 윤휴가 태어났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읜 윤휴는 어머니와 할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선영이 있는 여주에서 지내기도 하고 보은 삼산의 외가에서 지내기도 했다. 외가에서 지낼 때는 성운(盛運)의 제자인 외조부 김덕민으로부터 지(知)보다 행(行)을 중시하는 학풍을 배우기도 했다.

윤휴가 자유로운 학풍을 지니게 된 데는 생활 터전이 일정하지 않고 부유하는 삶이었다는 데에서 한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는 스승과 제자 관계로 뚜렷하게 내세울 만큼 오랜 기간 한 곳에서 수학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 윤효전과 친분이 있던 정구(鄭逑) 등 영남학자들이나 이민구(李敏求) 등 노론 학풍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주자학에서 한걸음 물러나 주자학을 비판할 수 있는 사상 체계를 확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윤휴의 학문과 사상은 남다른 독서와 학문에 대한 열정에서 비롯됐다. 그는 독서에 그치지 않고 저술 활동도 의욕적으로 했다. 스무 살 무렵부터 시작된 저술 활동은 평생 이어졌다. 특히 약관의 나이였던 스물 두 살에 《사단칠정인심도심설》을 지어 젊은 학자들에게 ‘윤휴’라는 이름을 알렸다. 스물네 살에 지은 《경진일록》에는 만 권의 책을 독파하는 윤휴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때를 전후해 윤휴의 명성은 호서 지방까지 널리 퍼지게 됐다. 그래서 공주의 유천에서 머물 때는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윤선거, 윤문거, 권시 등 기라성 같은 인사들이 교제를 요청하고 찾아와 함께 학문을 토론했다.

송시열과 펼친 사상적 맞대결

윤휴는 조선 후기 정치 사상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송시열로부터 이른바 사문난적, 즉 유학을 어지럽히는 도적으로 몰렸다. 그래서 서인이 정권을 잡은 조선 후기 내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송시열이 처음부터 윤휴를 경계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젊은 시절에는 자기보다 열 살이나 연하지만 학문이 출중하기로 자자한 윤휴를 먼저 찾아가 교제를 청했을 정도였다.

1636년(인조 14) 송시열이 서른 살, 윤휴가 스무 살 때 두 사람은 삼산에서 처음 만났다. 윤휴는 삼전도 치욕의 충격으로 과거시험을 포기했고, 송시열 역시 울분으로 낙향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정사의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었다. 그들은 사흘 동안 토론을 거듭했다. 열 살의 나이 차이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학벌도, 문벌도, 파벌도 달랐지만 학문을 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송시열은 송준길 등 동기 문하생들에게 윤휴의 학문에 감탄하는 내용의 편지를 써 보내기도 했다.

이후 두 사람은 서한을 주고받으며 학문을 토론하고 학문적 우정을 쌓아갔다. 송시열은 어린 나이에 윤휴가 성취한 학문의 깊이에 탄복했다. 권시나 송준길에게 “윤휴는 학문이 높아 다른 사람들이 따를 수 없으며, 앞사람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을 추구하고, 새로운 이치를 발견해 내어 나를 놀라게 한다네.”라고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송시열이 마흔 살을 넘기면서 두 사람의 사이는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다. 송시열은 학문을 할수록 주자학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경향이 깊어간 반면, 윤휴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송시열은 사서 자체보다 주희의 해설에 더욱 경도되어 있었다. 《중용》만 해도 주희가 해설한 《중용집주(中庸集註)》를 경전으로 더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윤휴는 주희의 《중용집주》를 개작해 자신의 견해로 주석을 달겠다고 나섰다. 송시열은 점점 윤휴의 학문적 경향을 못마땅하게 여기게 되었다.

결국 1653년(효종 4), 황산서원에서 송시열은 친구이자 동료인 윤선거와 윤휴의 ‘중용설’을 두고 의견 충돌을 일으켰다. 송시열은 한편으로 윤휴에게 주자학의 정도로 돌아올 것을 종용했다. 하지만 자기만의 학문 세계를 이미 구축한 윤휴에게는 소용없는 일이었다.

“주자가 살아 돌아온다면 저의 학설을 인정하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공자가 살아 돌아온다면 제 학설이 승리할 것입니다.”

윤휴는 이 말로 송시열의 가슴에 쐐기를 박으면서 송시열과 학문적, 정치적으로 서로 용인할 수 없는 관계가 되고 말았다.

사실 윤휴는 근본적으로 주자학을 벗어나지 않았다. 후학을 가르칠 때는 《소학》, 《예기》, 《효경》, 《주자감흥시(朱子感興詩)》, 《백록동규(白鹿洞規)》, 《시경》의 순서로 가르쳤다. 또한 주자의 말을 인용해 입론의 근거로 삼을 때도 많았다. 그러나 윤휴는 주자의 설을 절대적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주자를 존경했지만 맹신하지는 않았으며, 주자의 학문에 의문이 생기면 솔직하게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선대의 학설을 중시하되 새로운 창조적 견해를 개진해 학문을 확대 발전시켰다. 어떤 의미에서 진정한 학문적 자세일 수 있었다. 많은 젊은 선비들이 윤휴의 이러한 학문적 자유주의에 동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주자학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송시열과 당시 주류 학계는 이를 용인할 수 없었다. 결국 송시열은 윤휴를 이단으로 규정했고, 두 사람은 서로 죽을 때까지 적대시하며 등을 돌리고야 말았다. 송시열을 대표로 삼는 노론이 조선 후기 내내 정권을 잡으면서 윤휴의 학문은 매장되고 말았다. 하지만 당대의 거물 송시열이 그토록 경계했던 것을 보면 윤휴의 학문적 비중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예송으로 정치 일선에 나선 윤휴

윤휴가 정치 일선에 등장한 것은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하면서부터였다. 현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효종의 장례를 치러야 했다. 이때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의 상복이 문제로 떠올랐다. 효종은 자의대비에게는 둘째 아들이었다. 그러나 효종이 왕위를 이었으니 효종을 장자로 대우해 자의대비가 3년복을 입어야 하는지, 차자로 보고 1년복을 입어야 하는지가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1659년의 1차 예송인 기해예송이다.

《효종대왕국휼등록》

효종의 국상 처리 전반을 정리한 책으로 1차 예송, 즉 기해예송의 논점과 진행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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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집권하고 있던 서인 측에서는 송시열의 의견을 받아들여 효종을 차자로 인정하고 1년복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현종에게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예를 들어 모든 아들에게 부모가 1년을 입으라고 하니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아뢰었다. 현종은 아버지의 초상에 시간도 없고 경황도 없어 자의대비의 상복을 1년복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1년 후인 1660년(현종 1) 남인인 허목이 상소를 올려 이의를 제기했다. 종통을 이었으면 적장자로 인정해 3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송시열이 《의례주소(儀禮注疏)》의 4종설을 들어 서자를 맏아들을 제외한 모든 아들로 해석한 것을 비판했다. 그런데 허목의 이러한 상소는 윤휴가 허목에게 보낸 서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번 장자(長者)의 논설을 살펴보니 질서가 정연하고 근거가 있는 말이어서 오늘의 논의를 판가름하기에 충분하다 하겠습니다. 주소 내의, 적자를 장자로 세운다고 한 말은 그 뜻이 매우 분명한데, 부부(夫婦)가 함께 낳아 조종의 전중을 받은 자를 일러 정(正)이 아니라고 하면 의의가 없는 일이요, 첩의 자식과 같다고 한다면 매우 틀린 말이지오.
그러나 어리석은 생각에는 가소(賈疏)에서 말한 것은 다만 사대부 집의 예를 말한 것이며 또 왕후(王侯)의 집이라도 전중을 받지 못해 사대부와 같은 자를 이른 것이지, 위로 천자·제후에까지 미루어 올라갈 성질의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옛말에도 이르기를 “제후는 탈종을 하고 성서는 탈적을 했다.” 했는데, 이미 계통을 이어 종묘·사직의 주인이 됐으면 종(宗)도 거기에 있고 장(長)도 거기에 있어, 계체(繼體)의 복이 되기도 하고 지존(至尊)의 복이 되기도 할 것인데, 또 무슨 장소(長少)와 적서(嫡庶)를 따질 것입니까?
《현종실록》 권2, 현종 1년 5월 1일

허목은 어머니 상에 입는 가지런한 재최 3년복을 아들 상에 어머니가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윤휴는 한걸음 더 나아가 종통을 이었으면 무조건 적통이니 자의대비가 너덜너덜한 참최 3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현종은 내심 윤휴와 허목의 의견에 동조했지만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데다 송시열 등 거물급 대신들의 뜻을 거스르기 힘들었기 때문에 원래 정한대로 1년복으로 결정했다.

1674년(현종 15) 효종 비 인선왕후가 사망하면서 다시 자의대비의 복제 문제가 불거졌다. 그리고 2차 예송인 갑인예송이 터지게 되었다. 정권을 잡고 있는 서인 측에서는 인선왕후를 둘째 며느리로 보아 자의대비의 상복을 큰며느리 상에 입는 1년복이 아닌 9개월복으로 결정해 현종에게 올렸다. 그러나 도신징(都愼徵)의 상소로 논쟁이 촉발되었고, 현종의 외척 김석주 등이 나서서 현종은 9개월복을 버리고 1년복으로 결정했다. 효종을 적장자로 보지 않는 서인 측에 대한 현종의 공격이었다. 결국 이 일로 몇십 년간 유지되어 온 서인 정권이 몰락하게 되었다.

2차 예송에는 윤휴와 송시열이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1차 예송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의 의견이 여러 번 거론되었다. 2차 예송으로 서인이 물러나고 남인이 조정에 대거 등용되면서 남인의 이론가인 윤휴도 정치 일선에 나서게 되었다.

남인의 분열, 청남이 되다

2차 예송이 끝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현종이 죽었다. 서인 측에서는 젊은 왕세자 숙종이 왕위에 오르자 2차 예송 문제를 다시 거론했다. 하지만 숙종은 현종의 뜻에 따라 단호하게 자의대비의 1년복을 확정지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을 삭탈관작하고 허적, 허목, 권대운, 민암 등 남인들을 조정에 불러들였다. 윤휴도 설레는 마음으로 출사를 했다.

그런데 막상 조정에 나가 보니 윤휴의 생각과는 달랐다. 숙종과 신료들은 극진하게 예우하고 환대했지만 윤휴의 마음속에는 불만이 움트기 시작했다. 당시 조정은 허적을 중심으로 하는 남인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2차 갑인예송 때는 송시열을 몰아내려는 서인 외척인 김석주에 힘입은 바가 컸기 때문에 김석주에게 배후 조정을 당하는 형국이었다. 이는 허목도 같은 생각이었다.

오랜만에 정권을 잡은 남인은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결국 분열되고 말았다. 허적과 권대운 등 탁월한 행정력과 원만한 처신을 바탕으로 서인 정권 하에서도 주요 관직을 거친 이들은 숙종 초 재상직을 독점한 세력으로 탁남이라고 한다. 정치적인 경륜은 없지만 사림에게 명망이 높고 남인의 이론가라 할 수 있는 윤휴와 허목 등은 청남에 속한다.

청남은 강경파, 탁남은 온건파로 정치적 색채가 달라 사사건건 서로를 배척하며 비난을 일삼았다. 탁남이 요직에 오르면 청남이 허물을 잡았고, 청남이 청직에 오르면 탁남이 배격하는 형상이었다. 정치를 주업으로 하는 탁남과 산림에 은거해 학덕을 쌓은 청남은 처음부터 화합하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 문제는 실로 오랜만에 남인이 정권을 잡았음에도, 자체 분열로 조정이 조용할 날이 없었다는 것이다. 주변에서는 이를 두고 비난이 일었다.

윤휴 등은 스스로 청남으로 일컬었고, 허적과 권대운 등의 무리는 선조(先朝)에 높은 벼슬을 한 자가 많았다 해 이를 탁남이라 일렀다. 그러나 사람들은 양쪽을 모두 매우 혼탁하게 여겨서 이는 마치 암수의 까마귀와 가마솥 밑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숙종실록》 권4, 숙종 1년 6월 4일

윤휴는 북벌과 병권 문제로 허적과 마찰을 빚으면서 불화가 더욱 커졌다. 윤휴는 대사헌을 맡고 있을 당시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허적을 비난했다.

지금 영상 허적은 임금의 신임을 독차지해 그에게 위임함이 돈독함은 비록 옛 주공(周公)·소공(召公)이라 해도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이제 전하께서 허적에게 믿고 맡기시는 마음이 있으나 겸손하고 사양함이 너무 심해, 대경(大經)과 대례(大禮)에 비록 큰 호령(號令)이 이미 나와 있다 하더라도 만약 서언(庶言, 호령)과 서신(庶愼, 여러 사람들이 마땅히 삼가야 할 일)을 사람들이 그 옳지 못함을 알면 각각 맡은 곳이 설치돼 있는데, 그런데 전도경측(顚倒傾側, 자기 의사는 버리고 일체 남의 말을 따름)하면서 일체 대신의 말에 따르고 그 사이에 제재하고 살피지 아니하며, 신하가 된 자도 능히 반성해 삼가지 아니하니, 신은 저으기 이를 애석해 합니다.
《숙종실록》 권5, 숙종 2년 6월 21일

그러나 윤휴의 상소문을 접한 숙종의 생각은 달랐다. 숙종에게는 정국의 원만한 운영을 위해서는 청남보다 탁남이 더 적임자라고 여겼다. 그래서 오히려 허적을 위로하고 탁남을 두둔했다. 청남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었고, 때문에 윤휴도 큰 뜻을 펼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피기도 전에 진 자유주의자

청남과 탁남이 대립하긴 했지만 숙종 초기에는 여전히 남인들의 정국이었다. 윤휴는 이러한 분위기로 승정원 동부승지에서 이조 참의, 대사헌, 성균관 좨주 등을 두루 거쳐 이조 판서까지 승진했다. 그리고 이후 대사헌, 참찬, 형조 판서, 우찬성 등을 번갈아 역임했다. 관직에 머무르는 동안 윤휴는 의욕적으로 지패법(紙牌法)과 호포법(戶布法), 상평법(常平法) 등 부세제도 개혁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배척을 당해 지패법을 변형한 호패법만이 시행되어 개혁의 뜻이 제대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윤휴는 북벌을 주장하며 도체찰부를 설치하고 무과인 만과(萬科)를 시행할 것을 추진하기도 했다. 숙종은 의견을 받아들여 도체찰부를 설치하기는 했지만, 윤휴가 원하던 부체찰사의 자리를 외척 김석주에게 주어 남인 정권을 경계했다. 이외에도 윤휴는 비변사 혁파를 주장했다.

그러나 윤휴에게 주어진 권력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숙종은 남인 정권에 회의를 느꼈다. 그래서 1680년(숙종 6) 영의정 허적의 아들 허견이 복선군(福善君, 인평대군의 아들)을 추대하려고 했다는 역모 사건에 남인들을 연루시켜 대거 숙청했다. 이것이 경신환국이다. 이때 윤휴도 죄인으로 지목되어 유배를 갔다가 사사되었다. 윤휴의 죄목은 1675년(숙종 1) 인평대군의 세 아들 복창군(福昌君), 복선군, 복평군(福平君)의 비리 사건에 나선 숙종의 모후 명성왕후에게 조관(照管, 단속)하라고 나섰던 점, 복선군 형제와 친분이 돈독하고 도체찰부의 설치를 주장해 군권을 장악하려 했다는 점, 그리고 부체찰사에 임명되지 않았을 때 왕 앞에서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는 점 등이었다.

경신환국 당시 남인에게 갖가지 죄목을 붙여 처벌하기는 했지만 윤휴의 죽음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사상이 건전하지 못하다는 죄목은 없었지만 송시열과 사상적인 적수였고 예송에서 서인을 이론으로 공격한 남인의 이론가라는 점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그의 자유로운 학문적 경향은 송시열의 경계를 받았듯 당시에는 금기 같은 것이었다. 그가 죽어가면서 “쓰지 않으려면 쓰지 않으면 되지 굳이 죽일 필요가 있는가?”라고 말한 점도 그가 서인에게 사상범으로 낙인찍혔다는 것을 암시한다.

윤휴는 10년 후 남인이 재집권을 하게 되었을 때 일시적으로 신원되기는 했지만 5년 후 다시 번복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후 노론이 계속 집권하면서 그의 사상은 20세기 초까지도 금기시되었다. 이것이 자유주의를 추구하며 교조적인 이념에 과감하게 도전했던 한 사상가의 운명이었으니, 그의 죽음 이후 주자학에 대한 비판은 고개를 들 수 없게 되었고 사상의 경직성이 두드러졌다.

윤휴는 조선 후기 보수적인 성리학 세계에 파문을 던진 이단아였다. 그는 어찌 보면 기성 학문에 도전장을 던진 새로운 학설의 창시자가 될 수도 있었으나 시대를 지나치게 앞서간 불운한 학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