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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이주한의 <한국사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푸른하늘sky 2018. 1. 2.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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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묵은 민족주의라고 혀 차는 분들, 과연 그럴까요?
길거리에서 마주쳐 인사하면 아는 사람인데도 외면한다. 학교 연구실에 몰래 들어가 자료를 뒤지고 감시하기도 한다. 자신의 스승을 비판하면 부하 직원에게 하듯 야단을 친다. 공무원 신분인 국립대 교수로서, 일본 천황을 떠받드는 신도(神道) 도복을 입고 천황을 기리는 예식에 참석하기도 한다.

이들은 자기들끼리 학문적인 무리 짓기를 좋아한다. (말이 좋아 '학문'이지 내가 보기엔 '조폭' 집단이다.) 그래서 어떤 이의 주장이 자신의 정설에 맞지 않으면 그를 인신공격하고 매도하며 그 주장이나 학설을 이단으로 폄훼하거나 무시한다. 그 논거가 확실하거나, 새로 제기되는 주장이 더 이상 반박할 여지가 없이 확실하면 무대응 전략으로 입을 다무는 경우도 많다.

자, 위 두 문단에서 소개한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일제 식민 통치 시대에 '조선사편수회'라는 어용 학술 단체를 통해 일본인 역사학자들이 정립하여 널리 퍼뜨린 '식민 사관'이라는 게 있다. 그들은 이 '식민 사관'을 꿀단지처럼 꼭 붙들어 매고 있는 자칭 대한민국 '최고' 역사학자들이다. 그리고 이 '최고' 역사학자들이 괴롭힌 사람은 이들과 같은 학과에서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쳤던 동료 교수(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김용섭 교수)였다.

저자는 그 인맥의 계보를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중심으로 그리고 있다. 여기에는 한국 역사학의 태두라는 이병도를 필두로 김철준, 김원룡, 한우근, 이기백, 이기동, 노태돈, 송호정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저자는 서울대학교 법학과 출신이 대한민국 법조계를 싹쓸이 한 것처럼, 이들이 역사학계의 권력을 거머쥐고 있다고 말한다.

'식민 사관' 자학사관으로 보는 것은 몇 가지 대전제

저자가 보기에 '식민 사관'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학대하고 멸시하는 자학사관(自虐史觀)이다. 그가 '식민 사관'을 자학사관으로 보는 것은 몇 가지의 대전제, 가령 한국 역사는 짧았고 그 영역은 좁았으며 한국은 고대부터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한국 민족은 주체성이 없어 타민족의 영향과 지배를 받아야 발전했다는 등의 말도 안 되는 명제들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대전제로부터 다음과 같은 '부동의 정설', 또는 '철의 법칙'이 생겨났다고 본다.

1. 단군조선은 역사가 아니라 신화다.
2. 위만이 고조선을 통치하면서 고조선은 비로소 국가로 성장했다.
3. 한나라가 고조선을 정복하고 세운 한사군은 한반도에 있었다.
4. 중국와 일본의 지배로 한국은 발전했다.
5.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79쪽)

저자가 '식민 사관'의 핵심 주장을 '철의 법칙'으로 비유하는 것은, 그것이 역사적인 사실에 바탕을 두고 확증되었거나 논리적으로 탄탄해서가 아니다. 그들(식민사관을 신봉하는 학자들)이 내세우는 위와 같은 주장 외에는 그 어떤 것도 결코 인정하지 않는 철저한 배타성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하버드대학교 객원교수를 지냈으며, 단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던 역사학자 윤내현이 있다. 그는 일제하 어용 역사학자들이 기술한 우리 고대사가 잘못된 점이 많음을 비판해 1차 사료에 근거한 문헌 고증을 주장하고, 유적이나 유물을 통해 객관적이고 사실에 부합하는 고대사 복원을 꾀하기 위해 꾸준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이를 통해 학계에서 박수는 받지 못하더라도 함께 연구를 해나가는 데 필요한 관심은 끌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이것은 윤 교수 자신의 말마따나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었다.

"그를 학교에서 쫓아내라는 투서가 대학 총장에게 들어오고, 선배 학자의 모진 질타를 받고, 북한의 학설을 유포한다는 혐의로 주류 학계의 요청에 의해 정보기관의 내사도 받게 된다." (116쪽)

윤내현 교수가 식민사관의 잔재를 이어받은 역사학계의 권력에 반대하는 연구 결과를 내놓자 그들이 취한 조치들이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발악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저자의 말대로, "주류 사학계의 학문권력과 카르텔이 강고한 만큼 그들은 학문에서 멀어졌고, 폭력성은 치밀하게 변했다"고 말했다.

'식민 사관'의 폐해는 민족주의의 왜곡하는 과정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저자의 말마따나 민족주의 자체는 절대선이나 절대악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떤 민족주의이고, 누구를 위한 민족주의인가 하는 점에 있을 것이다. 가령 히틀러의 전체주의와 군국주의에 복무하는 민족주의는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모든 인류가 각자의 자리를 지키면서 형제처럼 지내는 사해동포주의를 추구했던 김구의 민족주의는 오늘날과 같은 어지러운 세상에서 깊이 새겨보아야 할 소중한 민족주의가 아닐까.

가짜 민족주의는 과연 어떤 모습을 취하고 있을까

그런데 저자는 '식민 사관'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이들이 이 민족주의를 심하게 뒤틀어버렸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를 '가짜 민족주의'로 규정한다. 그렇다면 이 가짜 민족주의는 과연 어떤 모습을 취하고 있을까.

대개 민족주의는 우파들이 즐겨 쓰는 개념이다. 그런데 저자는 우리나라에서는 좌파들이 민족 개념을 앞세우고, 오히려 뉴라이트와 같은 우익 진영에서는 민족을 '상상의 공동체'로 규정하면서 부정적인 시각으로 본다고 말한다. 가령 뉴라이트를 대표하는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의 박지향 교수 같은 이는 민족을 19세기 이래로 퍼지게 된 근대적인 산물로 본다. 대표적이 우익 인사인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의 이영훈 교수 같은 이는 민족이 19세기까지의 한국인에게는 낯선 개념이라고까지 말한다.

하지만 저자는 그 이전 우리나라에 우리만의 '민족' 개념이 분명히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를 밝히기 위해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과 자료를 다채롭게 활용한다. 또한 근대국가가 출현하면서 형성된 서양식의 '민족(nation)' 개념이 '국가와 국민'이라는 뜻이 있다면, 우리가 사용하는 '민족'이란 말에는 겨레와 국가, 국민이 혼용되어 있다고 본다.

그런데 앵무새가 같은 말을 되풀이하듯 서로 전공 분야가 다른 이들이 민족에 대해 이렇게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는 이렇게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민족 개념을 말하는 사람들이 유럽의 역사를 기준으로 한국사를 본다고 비판한다.

저자는 그 근거로 유럽은 19세기 중반까지 하나의 왕실이 국가를 통치하는 구조였음에 반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의 역사는 유럽과 달리 오래 전부터 민족 국가를 형성했다는 점을 내세운다. 이쯤에서 저자가 연구위원으로 있는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의 이덕일 소장의 말을 들어보자.

"조선 후기 극단적인 사대주의 유학자들이 만주, 몽골, 숙신 등의 여러 동이족을 오랑캐로 내몰면서 우리를 한족(漢族)과 같다고 주장한 것이 소중화(小中華) 사상이다. 여기에서 허구적인 단일민족론이 나왔다. 우리는 수천 년 동안 다민족 사회였고, 동이족 사이에는 언어도 서로 소통되었다. 사대주의에서 나온 소중화 단일민족론을 극복하고 선조들의 다민족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 21세기의 과제다." (이 책의 306쪽에서 재인용)

한 마디로 우리 민족은 단일 민족이 아니라 다민족·다문화 사회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그런 점에서 고조선이나 단군을 우리 역사에 편입하여 서술한다고 해서 그것이 배타적인 국수주의를 조장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 가짜 민족주의자들은 고조선이나 단국의 역사적인 의미를 밝히려는 저자와 같은 이들을 배타적인 국수주의자로 공격한다. 저자는 이들이 민족 개념을 불온시하고, 민족주의 자체를 심하게 뒤트는 배경에 이런 점들이 깔려있다고 보고 있다.

이 책을 보면서 해묵은 민족주의가 웬 말이냐며 혀를 차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다. 하지만 동북아 3국은 지금 '역사'라는 이름의 열차를 타고 끝이 보이지 않는 미궁 속으로 점점 빨려 들어가는 듯한 형국을 연출하고 있다. 과거의 역사는 현재를 규정하고 미래를 좌우하는 열쇠다. 역사 논쟁을 연구자들의 한가한 소일거리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우리는 '뼛속까지 친미, 친일'이라는 대통령을 떠나보내고,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장교로 독립군을 때려잡은 뒤 총칼로 권력을 찬탈해 20여 년간 철권통치를 한 '독재자(strongman)'의, 공주 같은 딸이 대통령이 되는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 바로 세우지 못한 역사의 후폭풍은 이렇게 이미 우리에게 다가와 버린 것일까. 저자의 말대로 우리나라는 지금 백척간두에 서 있는지 모른다. 진정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한 올바른 역사관이 필요한 까닭이다.

덧붙이는 글 | 이주한 지음(2013), 한국사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역사의아침. 358쪽. 값 1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