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香萬里

다향선미 21 칠불사

푸른하늘sky 2017. 12. 13. 21:46

다향선미 21 칠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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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쌓인 창가 화로처럼 마음 녹여주는 ‘잭살’

우리차문화 중흥발원지--- 칠불사

우리가 버리는 곳에서 얻는 것이 있고, 얻었다 하면 다시 버려지는 것이 있다. 우리차문화의 원형을 찾아가다보면 이와같이 만감이 교차하는 한 지점을 만나게 된다.

그곳은 바로 지리산 칠불선원이다. 그곳에 초의스님이 없었으면 우리나라 차문화의 중흥은 좀더 뒤로 밀렸을 것이고, 우리차문화도 마치 다른 전통문화와 같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초의스님으로 하여 우리차문화의 한 뿌리가 잊혀지고 다시 살아나는 빌미를 마련하게 된다.

초의스님의 〈동다송〉에서 칠불선원이 있는 옥부대의 스님들이 차만드는 방법을 질타하면서 다음과 같이 소중한 차이야기 한편을 마치 엽서처럼 끼워놓는다. 그러나 이 기록이 우리차문화의 뿌리를 찾는 귀중한 자료가 될지는 초의스님도 몰랐을 것이다.

‘지리산 화개동에는 차나무가 40리에서 50리가 널렸는데 우리나라의 차밭으로는 짐작컨데 이보다 더 넓은 곳은 없다. 이 골짜기에는 옥부대가 있고, 그 대 아래에는 칠불선원이 있는데 늘 좌선하는 무리들이 잎이 쇈 찻잎을 따서 섶나무를 말리듯 햇빛에 쬐어 차를 만드는데, 마치 나물국을 끓인 듯 하고 색이 탁하고 붉으면서 그 맛이 쓰고 떫다. 〈정소〉에 이르기를 ‘천하의 좋은 차를 속된 사람들의 손에 의해 쓰레기로 만들어 놓는다’고 하였다.

요사이 차계에 우려되는 일가운데 하나가 중국차의 범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차 이른바 보이차와 철관음과 오룡차로 대표되는 발효차가 우리차문화계를 강타하고 있다. 그래서 시작은 우리차로 하였다가 차를 조금 마셨다고 하면 현란한 중국차의 세계로 빠져들어 ‘우리 잎차는 속이 찬 사람들이 먹으면 안된다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발효차의 세계로 행보를 옮겨 간다.

그런데 이 발효차가 바로 햇빛에 쬐고 말려서 만들던 쓰레기라고 한, 초의스님이 외면한 그 차와 같은 갈래의 차라는 것을 알면 초의스님은 우리차문화를 세우는데 일조를 하였고, 그리고 우리차를 죽이는데 한 몫을 한 셈이 된다. 그 쓰고 떫은 차의 가치를 초의스님은 왜 몰랐을 것인가.

그 발단은 이렇게 시작된다. 초의스님이 〈만보전서〉를 인용하면 ‘차에는 진향(眞香)이 있고 난향(蘭香)이 있으며/ 청향(淸香)이 있고 순향(純香)이 있다// 겉과 속이 한가지면 순향이라 하고, 설익지도 너무 익지도 않으면 청향이라 하며// 불기운 조절이 고르게 머물면 난향이라 하며, 곡우전(양력 4월 20일 전후) 신기가 갖춰지면 진향이라 한다 / 이를 차가 가지는 네 가지의 향기라 한다! 고 하여 차가 가져야 할 4가지 향의 덕목을 강조하고 있다. 즉 어린찻잎으로 난꽃향기가 나는 차를 사랑한 초의스님은 차의 5대분류에서 말하는 녹차매니아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미 그 시절, 세계 차문화의 흐름은 거세게 발효차의 문화로 달려가고 있었다는 것을 스님이 모르셨을리 없다. 〈동다송〉을 짓게한 홍현주의 차시에 연경에서 온 보이차가 등장하는 것이나, 후발효차의 모습을 하고 있는 몽정차와 육안차에 비교하여 우리차가 조금도 뒤질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초의스님이고 보면, 우리차 문화의 자긍심을 살리는 일은 차의 바탕이라고 할 수 있는 바로 오늘의 녹차라고 불리는 잎차를 되살리는 일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녹차를 마시면 몸이 찬 사람들은 속앓이를 한다고 하여 일부 계층의 사람들이 외면을 한다. 그리고 차의 성품이 차기 때문이라고 하는 말을 잊지 않는다.

그러나 초의스님은 우리차에는 육안다의 맛과 몽정차의 약효가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오늘에 전하여지는 영호남의 사찰에서의 차마시는 방법을 가만히 살펴보면, 오늘과 같이 물을 식혀서 미지근하게 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라 열탕 !

즉 뜨거운 물로 차를 마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차가 일본의 녹차와 같은 류가 아니라 가벼운 경발효를 한 발효차일 가능성을 알려주는 부분이다. 즉 초의스님이 바로잡은 차가 아닌 다른 제다법의 차가 우리전통차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이 칠불사가 자리한 화개골과 박경리의 소설인 〈토지〉로 유명한 이웃의 악양에는 이곳 사람들이 지켜온 발효차인 ‘잭살’이라는 차가 전하여 온다. 햇빛에 시들리어 잎이 부들부들 해지면, 비비고 비비다가 쌓아두었다가 발효가 되기를 기다려서 따뜻한 방에서 건조를 시키는 이른바 솥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여 ‘생차’라고도 하는 이 차는, 가정상비약으로 장만되어 배앓이나 감기 몸살에 아직도 쓰이고 있다.

단 그 만드는 방법이 세련되지 못하여, 그냥 보리차처럼 끓여서 꿀이나 설탕으로 떫고 쓴 맛을 감추기도 하지만, 잘만들어진 이 잭살에는 차의 풋맛과 함께 부드러운 단맛이 어울려 감칠맛이 난다. 집집마다 만드는 방법도 가지가지, 발효의 개념을 잡지 않았기에 같은 잭살이라는 이름을 쓰더라도 비슷한 차맛을 만나기는 힘들다.
이와같이 우리차문화 흐름의 분수령을 만드는 이곳 칠불선원에서 차를 통해서 우리가 만나는 초의스님은, 이른바 달마스님에서 육조혜능에 이르는 선종의 5가가 내뿜는 그런 숨막히는 선풍의 스님은 아니다. 오히려 봄바람같이 자애로운 모습을 느끼게 하는 좋은 스승이다. 〈다신전〉의 발문에 보이는 초의스님은 마치 어린 손주를 생각하는 할아버지와 같이 자상함과 넉넉함이 함께 하고 있다.

/무자년 비오는 때에, 스승을 따라서 지리산 칠불사 아자방에 갔다가 이 책자를 등초(騰抄)하여 내려 온 이후 다시 정서(正書)하여 한 권의 책으로 묶으려고 하였지만 예기치 못한 신병(身病)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사미승 수홍(修洪)이 때마침 시자실(侍者室)에 있었다. 그가 다도(茶道)를 배우고자 하여 다시 정초(正抄)에 손을 대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그것도 또한 몸이 편치 못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등초를 그대로 놓아두었다. 이 때문에 좌선하는 틈틈이 짬을 내어 편치 못한 몸으로 힘겹게 붓을 들어 이를 완성한 것이다.

옛 책에 “시작이 있고 끝맺음이 있다.” 함은 어찌 유학자들 만의 일이겠는가. 총림(叢林)에서도 조주(趙州)의 끽다선풍(喫茶禪風)이 있다고 하나 모두가 다도를 모르고 있다. 이에 이를 초록하여 보이니 두려운 바이다. 경인(1830)년 2월에 휴암병선(休庵病禪)은 눈 쌓인 창가에서 화로를 안고 삼가 이 글을 쓰다./

〈동다송〉을 홍현주의 다도에 대한 물음에 답한 것이라고 하면, 〈다신전〉은 그를 따르는 제자인 수홍사미를 위하여 다시 정리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글을 문맥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 일은 마치 차의 불모지였던 시절 눈쌓인 창가의 화로처럼 우리 마음을 녹여주는 따뜻함이 있다.

칠불선원이 어떤 곳인가, 우리나라 제일의 선원인 동국제일의 선원이 있는 곳이 아닌가. 지금부터 200년도 채 안되던 그 시절 이 곳에서 마시던 잭살차와 차문화의 새바람을 일으키는 초의스님을 생각한다. 여기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찾을 것인가. 그래서 두렵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일이 아닐까. 아니 초의스님의 제다법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나는 초의스님의 공과를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문득 두려운 맘이 앞선다.

●함께 둘러볼 만한 풍광
매암차 박물관
이른바 우리식 발효차인 잭살차가 부활을 알리는 가운데, 일찍부터 이 잭살차의 맛을 지켜오는 용강의 쌍계제다원, 정금의 지리산제다원 등 몇몇 제다업체의 노력은 사뭇 의미롭다.

그리고 김필곤씨가 재현하는 달빛차와 이번 야생차 잔치에 선보인 목압의 황로담(黃露潭)은 몇 해전부터 불기 시작한 우리식 발효차인 잭살차에 대한 접근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여기서 ‘잭살’은 ‘작설차’의 작설을 일컫는 이곳의 사투리로, 1970년대만 하여도 차하면 이 ‘잭살’을 일컬었다고 한다. 이를 오늘의 학자들은 일쇄황차라는 조금은 어려운 이름을 붙였는데, 햇빛에 시들리어 만든 탕색이 노랗게 우러나는 차라는 뜻이다. 여기서 여러분들의 오해가 있기 쉽다. 본래의 황차는 녹차를 만드는 과정에서 후발효가 진행된 것인데 반하여, 이 곳의 잭살은 처음부터 발효를 염두에 둔 차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우리는 너무 어리디 어린 찻잎에만 매달려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반성과 함께 칠불사를 다시 살펴본다. 칠불사에서 가장 신비한 자리는 운상원이 있는 옥부대이다. 쌍계사가 불교음악인 범패와 선이 어울린 곳이라면, 이곳 옥부대는 바로 우리의 풍류문화인 가야금과 선이 어울린 자리이기 때문이다. 또한 아자방(亞字房) 온돌은 한겨울 동안거 때 불을 피우면 해제를 할 때까지 그 온기가 남아있다는 세계적인 건물이 있던 터이다,

이와같은 문화적 유산의 향기를 갖춘 칠불사 이름이 가야국의 일곱왕자가 성불한 것에 비롯한 것이라는 사실은 험준한 산속 깊숙하게 자리잡은 칠불사가 우리나라 불교의 역사가 자그마치 20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사실에 우리는 다시금 경외감을 감출 수가 없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골짜기를 빠져나오는 길에 만나게 되는 최치원이 세상을 등지고자 귀를 씻었다는 세이암과 그 앞에 꽂았던 지팡이가 자라났다는 푸조나무는 이 공간을 신화적 공간으로 만드는 또하나의 볼거리이다. 그리고 섬진강을 따라가다보면 마치 어머니 품처럼 아담한 악양을 만나게 된다. 이곳 악양의 큰대밭, 정동에서 만들어진 차는 우리가 우리차문화의 정체성을 찾는데 또한 밑거름이 되어준다. 그리고 작년에 문을 연 매암차박물관이 있는 정서리는 소설 ‘토지’의 무대이기도 한데, 이 박물관 전시장인 매석관(39평), 매헌관(20평)에는 차 제조 유물과 전통 다기 등 1백여 점이 전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