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자격, 스테이트크래프트(statecraft)
동아시아연구원 2012. 02. 29
세계화, 민주화의 진전, 그리고 정보화의 발전, 특히 SN기술의 확산에 따른 정치환경의 변화는 새로운 거버넌스의 필요성을 가중시키고 있다. EAI는 한국의 민주화 진전에 따른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2002년 대통령의 성공조건, 2007년 대통령직 인수의 성공조건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민주화 이후 바람직한 대통령의 역할, 권한, 책임에 관한 제도화 방안을 강구해 왔다. 이제는 제도보다는 어떻게 안정적인 국정운영의 리더십을 확보하느냐 하는 '거버넌스의 질'이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이에 EAI는 지난 정부들의 국정운영의 성과와 방식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정치환경에 부합하는 거버너빌리티(governability) 형성과 성공적인 대통령직 수행의 조건을 탐구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우선 민주화 이후 전반적인 국정운영의 경험과 학식을 겸비한 고위 인사들을 초빙하여 한국의 거버넌스에 관한 심도 깊은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2012년 2월 22일 한국지방발전연구원 윤여준 이사장을 모시고 제1차 라운드테이블을 진행하였으며, 주요 발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공적인 대통령의 조건은 당선 이후의 통치력, 스테이트크래프트이다
문민정부 이후, 역대 대통령들이 모두 성공한 대통령으로 평가 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창업과 수성의 차이를 모르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천하를 얻는 것보다 다스리기가 더 어렵다’고 하였다. 민주주의 시대의 수성은 이보다 훨씬 더 어렵고 복잡하다. 그럼에도 대통령후보자들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에만 집중하지, 정작 대통령이 된 후에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제대로 준비를 하지 않았다. 국가의 흥망성쇠를 책임지기 위해 갖추어야 할 통치능력인 스테이트크래프트를 얼마나 갖추느냐 하는 것이 대통령직 수행의 성패를 결정짓게 되는데, 그 점을 간과한 것이다.
스테이트크래프트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는 시대적 과제를 인식하고 그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것, 그리고 그 비전을 구현하기 위한 정책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새로운 제도를 창출하거나 변경하는 것, 인재를 등용하는 것, 그리고 우리 현실에서 분단을 관리하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이를 위한 해박한 이론적 지식과 경험을 통한 실천적 지식을 겸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지금까지 대통령들은 이러한 스테이트크래프트가 부족했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 심지어 스테이트크래프트의 기초적 소양마저 부족한 경우도 많았다. 즉, 국가가 무엇이며,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것이다.
스테이트크래프트의 구축은 공공성의 회복이다
막강한 국가 강제력 행사의 근거인 공공성에 대한 대통령의 인식부족은 권력의 사유화를 초래한다. 대통령의 권력사유의식은 가족과 측근으로 급속히 확산되어 비리와 부정을 낳는다. 역대 대통령들의 실패에는 바로 이 권력의 사유의식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국가권력을 선거를 통해 쟁취한 전리품이라는 잘못된 생각은 국가를 군주의 사적 가산으로 취급하는 소위 가산제(patrimonialism)의 폐해를 가져오는 것이다.
여기에 경제적 불안, 안보 불안을 가져오는 정책적 실패는 국가가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불신을 초래하면서 공공성의 파괴를 촉진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가장 큰 과오는 공공성의 상징이어야 할 대통령 자신이 공공성 파괴에 앞장 설 뿐 아니라 이를 규범화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대통령의 핵심과제는 무너진 공공성을 다시 세우는 것이다. 공공성을 다시 세우는 실천적 출발점은 ‘공적인 인사’이다. 국민불신의 대상이 되는 편협한 코드인사 혹은 정실인사를 탈피하여 공적 기준에 준거한 적재적소의 인사를 해야 한다. 대통령과 일면식도 없지만 능력 있는 인재를 선발하게 되면, 관료집단, 시장, 국민, 언론으로부터 신뢰를 받게 될 것이다.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하라
다음으로 대통령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 부족이다. 민주화 이후 25년이 경과하고, 김영삼, 김대중 전대통령 같은 민주화 투쟁의 상징이었던 지도자들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군사정권에 대응하여 민주화 투쟁에 평생을 바쳤던 분들이 정작 권위주의적 국정운영을 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국가운영과 정치의 방식이나 사회적 삶의 방식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제도나 체제 중심의 절차적 민주주의를 우선시하였기 때문이다. 의회정치에 대한 몰이해는 국회나 야당, 비판적인 언론을 적대시하고, 선거과정에 과도하게 개입하여 집권당을 다수당으로 만들어 국회를 지배하고자 하는 정치행태로 연결되었다.
민주주의의 핵심인 집단적 의사결정을 부정하고 자의적인 권력행사를 하는 것도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부족이다. 민주화 투사였던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의 경우도 민주적 지도자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이명박 정부의 소통부재 문제는 대의정치체제의 소통창구인 정당을 무력화하였기 때문이며, 이 배경에는 결과가 좋으면 과정은 상관없을 것이라는 잘못된 실용주의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민주화는 정치민주화의 토대이다
경제민주화도 대통령의 스테이트크래프트가 요구되는 중요한 어젠다이다. 경제민주화는 정치민주화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비록 권위주의적이지만 재벌에 대한 견제가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민주화 이후 통제력이 급속히 약화되고 재벌이 급격히 팽창하여 권력화됨으로써 민주주의 발전에 장애물로 평가되고 있다. 이 같은 맥락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이제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탄식한 바 있다. 그리고 대통령의 스테이트크래프트 부족은 정책아이디어를 대기업산하의 경제연구소에 의존하는 경향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국가정책이 특정 기업의 이익에 복무하는 위험을 초래하게 된다. 이명박 정부의 친기업적 정책에 의해 막대한 이익을 얻은 재벌기업들이 일자리창출과 투자에는 성과를 보이지 않는 것도 국민들의 불만을 증폭시키고 있다. 우리 사회의 양극화 심화에 따라 경제민주화는 차기 대통령이 다루어야 할 핵심 어젠다가 될 것이다.
민주화 이후 네 분의 대통령을 거쳐 온 결과, 우리는 스테이트크래프트를 제대로 갖춘 인물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지 않으면 국가운영이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앞날이 대통령의 스테이트크래프트에 달려 있다. 차기 대통령에게는 공공성을 핵심적 가치로 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실천적 지식에 입각한 스테이트크래프트를 갖추기를 기대한다. ■
윤여준 이사장은 단국대 정치학과 졸업하였다. <동아일보>와 <경향신문> 기자를 지냈으며, 1977년 주일대사관 공보관으로 관계에 투신한 이래, 청와대 의전·공보·정무 비서관과 국정원장 특별보좌관, 대통령 공보수석 비서관을 지냈다. 1997년 환경부장관을 역임하였으며,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한나라당)을 지냈다. 두 차례에 걸쳐 여의도연구소 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한국지방발전연구원 이사장으로 있다. 최근 <대통령의 자격>(2011)을 발간하였다.
사회자
이숙종, EAI 원장, 성균관대학교 교수
참석자
강원택, 서울대학교 교수
윤성이, 경희대학교 교수
이곤수, EAI 거버넌스연구팀 팀장
이내영, EAI 여론분석센터 소장, 고려대학교 교수
이재열, 서울대학교 교수
장용석, 연세대학교 교수
정원칠, EAI 여론분석센터 선임연구원
정한울, EAI 여론분석센터 부소장
한규섭, 서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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