閑雲野鶴

백호(白湖) 윤휴(尹鑴)

푸른하늘sky 2022. 2. 23. 10:09

 

백호(白湖) 윤휴

 

윤휴가 충북 보은(報恩) 삼산의 외가댁에 머문 때는 나이 11∼12세, 15세, 20세 때였다. 송시열이 윤휴의 명성을 듣고 찾아가 담화를 나눈 후 높은 학문에 탄복했다고 한 것으로 볼 때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시기는 윤휴의 나이 20세 때인 1636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윤휴를 만나고 돌아온 송시열은 동문(同門)의 대학자인 송준길에게 편지를 보내 “내가 삼산에 가서 윤휴를 만나 그와 더불어 3일 동안 학문을 논하였다. 그런데 우리들이 30년 독서한 것이 진실로 가소로웠다”고 하며 크게 탄식했다고 한다.

<중략>

윤휴와 송시열의 관계는 윤휴가 포의(布衣)의 신분이었을 때에도 학문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숙명의 라이벌이었다.

 

특히 윤휴가 『대학(大學)』과 『중용(中庸)』 등에 주자의 해석과는 다른 독창적인 주석(註釋)을 담은 저술을 잇달아 내놓자 ‘주자학의 수호신’임을 자처한 송시열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와 관련 윤휴의 ‘행장(行狀)’에 에피소드 하나가 기록되어 있다.

 

어느 날 송시열이 자신의 일가 사람인 송기후(宋基厚)의 집에 갔다. 그런데 송기후가 책상에 한 권의 책을 놓고 읽고 있었다. 송시열은 “그대가 읽고 있는 책이 무슨 책인가?”라고 물었고, 이에 송기후는 “이 책은 윤휴가 『중용(中庸)』에 대해서 논의한 책이다. 그런데 그 논설이 이전 사람이 미처 드러내 밝히지 못한 것을 확실하게 밝히고 있다고 할 만하다. 내 마음에 들어 책 읽는 것을 스스로 그만둘 수 없다”라고 대답했다.

 

송시열은 버럭 화를 내며 “이 책은 바로 주자(朱子)의 논의에 어긋나는 것이다. 후학(後學)을 그르치는 책인데 무엇 때문에 읽고 있는가!”라고 했다. 그리고 윤휴를 심하게 헐뜯고 자리를 떠났다. 그 후로 송시열은 늘 윤휴를 이단(異端)이라고 배척하고 다녔다는 얘기다.

 

윤휴가 『중용설(中庸說)』을 완성한 때는 여주의 백호에 거처를 마련하고 백호라는 호를 쓰기 시작하던 1644년 나이 28세 무렵이다.

 

이렇듯 젊은 시절부터 윤휴는 ‘천하의 이치란 한 사람이 모두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자신만의 철학을 갖고 주자의 학설이 아니라 오직 진리만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주자는 비록 윤휴 자신의 학설과 주장을 인정하지 않을지 몰라도 공자와 맹자는 반드시 인정할 것이라고 하며 공공연하게 ‘반주자학’의 입장을 피력했다.

 

주자의 권위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주자학을 벗어나 독자적인 경전 연구와 해석의 길을 걷겠다는 윤휴의 입장에 대해 송시열은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밝혔다.

 

“윤휴라는 자가 처음에는 말로만 주자를 비난하다가 이제 문자를 지어서까지 주자를 공격했다. 내가 ‘이것은 도저히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다’고 생각해 마침내 드러내어 윤휴를 배척했다.”

 

이에 송시열은 본격적으로 윤휴를 두고 성인인 주자의 사상과 학문을 그릇되게 어지럽히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보면 송시열은 1644년 무렵 부터 수 십 년 동안 윤휴를 이단으로 배척하고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일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송시열의 거센 비난과 공격 앞에서도 윤휴는 의연하게 1667년(나이 51세)과 1668년(나이 52세)에 연이어 『대학설(大學說)』과 『중용장구보록서(中庸章句補錄序)』를 저술해 세상에 내놓았다.

 

천하의 이치는 결코 한 사람이 모두 알 수 없다는 윤휴의 확고한 견해와 끊임없는 저술 활동은 송시열의 분노와 윤휴에 대한 증오심을 더욱 가중시켰다. 성인(聖人)인 주자가 이미 모든 학문의 이치를 명명백백하게 밝혀 놓았는데 감히 윤휴 따위가 주자학을 더럽히고 모욕하고 있다는 게 바로 송시열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제주도로 귀양 가던 마지막 순간에도 송시열은 스승인 김장생의 묘소 앞에 나아가 “불행하게도 뒤틀리고 그릇된 기운이 뭉쳐서 세상에 나온 윤휴란 자가 있었습니다. 그 자가 감히 주자를 공격하고 배척하기에 전력(全力)을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소자가 제 자신을 돌보지 않고 온 힘을 다해 그 자를 배척하였습니다”라고 하면서 마치 자기 일생의 최대 업적이자 중대사가 윤휴를 배척하고 죽인 일인 것처럼 자랑스럽게 고하기까지 했다.

 

주자의 화신이자 주자학의 수호신임을 자부하며 학계와 정계 모두를 장악한 채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권위에 복종하기를 바랐던 송시열의 입장에서 윤휴는 학문적으로는 주자학의 법도와 질서를 어지럽히는 도적이고 정치적으로는 자기 당파(서인)의 권력을 위협하는 역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여하튼 수십 년 동안 정치적·사상적 라이벌 관계를 유지해오던 송시열과 윤휴의 갈등과 대립은 1674년(현종 15년·나이 58세) 벌어진 제2차 예송논쟁에서 윤휴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송시열이 파면·유배당하고 서인 세력이 대거 실각하게 되자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리고 송시열과 그를 추종하는 서인 세력의 윤휴에 대한 반감과 증오심은 결국 숙종 6년인 1680년 남인 세력을 조정에서 대거 축출한 경신환국(庚申換局) 때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이 해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 권력을 거머쥔 서인의 영수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사사(賜死)했다.

 

5월20일 오후 유배지인 갑산으로 향하던 중 서대문 밖 여염집에 머물며 혹독한 국문 탓에 얻은 장독(杖毒)으로 신음하고 있던 윤휴 앞에 한 사발의 사약이 내려왔다. 그때 윤휴의 나이 64세였다. 송시열보다 10년 늦게 세상에 나왔지만 그보다 9년 앞서 세상을 떠난 셈이다.

 

그러나 송시열의 만행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국가 차원에서 윤휴를 사상적으로 매장하는 후속 작업이 이어졌다.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음에 이르도록 한 송시열의 감정이 유감없이 드러나 있는 기록이 윤휴의 죽음 7년 후인 1687년(숙종 13년) 2월4일자 『숙종실록(肅宗實錄)』에 실려 있다.

 

“불행하게도 윤휴란 자가 처음부터 이황과 이이의 학설을 배척하고 또한 문간공 성혼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자신의 학설을 지어 신(臣: 송시열)에게 보냈기에 신은 깜짝 놀라 이를 나무랐습니다. 그는 하늘을 쳐다보고 웃으면서 신에게 ‘당신이 무엇을 알겠느냐?’고 했습니다.

 

이미 주자의 주석과 해설을 옳지 않다면서 자신의 견해에 따라 바꾸었고 『중용』에 이르러서는 장구(章句)를 없애버리고 새로운 주석까지 달아 자신을 따르는 무리에게 주었습니다. 또한 그 마지막에는 자신의 학설을 저술하여 스스로 공자에 견주고 염구(冉求: 공자의 제자)를 주자로 쳐놓았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윤휴의 패류(悖謬)한 짓이 이에 이르러, 세상의 도리를 해침이 매우 심하였습니다. 한때 소위 고명(高明)하다는 사람들이 그에게 중독되었는데 윤증의 아버지인 윤선거가 특히 심했습니다.

 

… 윤휴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이고 윤선거는 당여(黨與)로 주자를 배반한 사람입니다. 춘추(春秋)의 법에 난신적자(亂臣賊子)를 다스리려면 먼저 당여부터 다스렸습니다. 왕자(王者)가 있다면 마땅히 윤선거가 윤휴보다 먼저 법의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숙종실록』, 13년 2월4일

 

필자는 윤휴의 ‘반주자학 선언’은 16세기 종교개혁의 선봉장이었던 마르틴 루터가 교황청과 다르게 성경을 해석한 사건에 비교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주자학의 광기(狂氣)가 지식 사회를 휩쓴 조선의 17세기에 윤휴만큼 ‘사상계의 혁신’을 당당하고 용감하게 외친 선비는 없었기 때문이다.

 

언제가 장선충이라는 이가 윤휴에게 “온 세상사람 모두가 선생을 비난하며 배척하는데 선생은 어떻게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지 않을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윤휴는 “무엇 때문에 내 마음이 동요하겠는가. 단지 이 시대를 위하여 개탄할 뿐이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장선충이 맹자가 말한 ‘부동심(不動心)’에 윤휴의 뜻을 비유하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황세충이라는 이가 “윤휴의 기상이 맹자의 기상과 같다. 이 때문에 우리 주자학도들이 매우 걱정하는 것이다”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그러나 윤휴의 죽음 이후 오늘날 ‘실학’이라고 일컫는 새로운 사상과 지식 경향이 재야 지식인들 사이에서 출현하기 이전까지 조선의 지식 사회는 주자학의 공포정치에 굴복한 나약한 존재였을 뿐이다.

 

조선 후기 들어 서인 세력의 집권이 공고화되면서 주자학의 정통성을 부정하거나 그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일신(一身)을 망치는 일이 되었다. 그것은 서인 세력에 의해 권력에 대한 도전이자 체제에 대한 부정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침묵’과 ‘굴종’으로 얼룩진 오욕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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