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學笛

天下公物 何事非君

푸른하늘sky 2018. 3. 5. 10:33



[기축록]의 표지와 본문. 기축옥사의 전말과 관련 문서를 수록한 책이다. 2권 1책. 필사본. 편자와 편찬 연대는 미상이며, [대동야승()]에 수록되어 있다.




조선 중기,  정체불명의 예언서가 나돌게 되며, 이는 민간신앙으로 까지 자리를 잡아 간다.  "李씨는 망하고 鄭씨가 흥한다"다는 정감록이었다


이 정감록은 "감결"이 원전으로서 ㅡ조선의 선조인 한륭공(漢隆公)의 두 아들 이심(李沁)과 이연(李淵)이 조선 멸망 후 일어설 정씨(鄭氏)의 조상 정감(鄭鑑)과 금강산에서 마주앉아 대화ㅡ를 나누는 형식으로 엮어져 있다


내용중에는 전주 李씨의 한양 도읍 몇백 년 다음에는 계룡산에서 정씨가 몇백 년 =>  다음은 가야산에서 조씨가 몇백 년 =>그 다음은 완산(完山)에서 범씨(范氏)가  몇백 년 => 그 다음은 개성에서 왕씨(王氏)가 몇백년.....그리고 중간 중간에 언제 무슨 재난이 있어 세태와 민심이 어떻게 될것이라고 정감록은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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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전주에서 태어난 정여립은 24살에 과거에 급제한다. 그러나 정여립은 왕권체제 하에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혁신적인 사상을 품는다.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줄 때 혈통세습이 아닌 능력세습"이라며 왕권의 세습을 비판하였고,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는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 그리고 신분철폐를 주장한다


민주주의와 공화정(共和政)을 정여립은 그 당시에 이미 외친것이며, 이는 공화정의 원조겪인  영국의 정치가 "크롬웰"보다 50년 앞선 것이었다


정여립의 이러한 사상이란 당시 세습 왕조국가인 조선에서 도저히 용납될수 없는 사상이었다.  정여립은 선조대왕 아래에서  벼슬을 내놓고는 고향인 전주로 낙향 한다.  정여립은 전주 모악산 근처를 중심으로 대동계를 조직하여 계원들로 하여금  매월 보름날에 활을 쏘며 무예를 익히도록 하고 잔치를 벌였는데 대동계원은 양반. 상놈. 승려 등 신분귀천이 없었다


선조 20년에  왜군이 손죽도로 쳐들어오자, 정여립은 전주 부윤 남언경의 협조 요청을 받아들여 평소  무예훈련을 하던  대동계원들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화근이 되고 말았다. 정여립이 대동계를 중심으로 역성혁명을 준비한다는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더구나, "李씨는 망하고 鄭씨가 흥한다"는 정감록이 민간에서 기승을 부리던 때였고, 정여립이 바로 그 "정氏"가 아니던가?


1589년(선조 22년) 황해도 관찰사, 안악군수, 재령군수 등은  "호남의 사림 50여 인이 정여립과 함께 역모를 꾀하며, 한강이 얼 때를 틈타 한양으로 진격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조정에 고하였다


이에 대동계원들은 물론이고 정여립과 연관이 있거나 친분이 있는 호남의 선비들은 모두 체포되었으며,  정여립은 아들과 함께 죽도(竹島)로 도망하였다가 관군에게 포위되자 자살하고 만다


이 사건은 적극 확대가 된다. 조정에서 몰리고 있던 "서인"들이 정여립 역모사건을 이용하여 "동인"들을 누르고자 한 것이다. 결국 1.000여명이 넘은 동인과 호남의 학자들이 처형당하고 말며, 이것이 조선시대 가장 큰 사화라는 "기축사화"("기축옥사"라고도 한다)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라도를 본격  "반역의 고장"으로 낙인찍어 호남 인물들 등용은 철저히 배제를 하는, 천하의 몹쓸 지역색 정치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다


권력의 세습이 당연한 조선 시절에도 정치가로서 정여립은  "민주주의"와 "공화정"사상을 가졌고, 그 이상을 펼쳐보고자 했다. 그리고 이 사상은 뜻있는 선비나 민중들의 공감을 받게 된다


북망산천 골짜기에 굴러다니는 뼈다귀도 진골이 있고 천골이 있어 권력은 진골 뼈다귀 한테 세습이 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조선 중엽의 선조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 폐단을 알아 지식인 정여립은 "천하공물"(天下公物)과 "하사비군"(何事非君論)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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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역모의 진위를 둘러싼 논쟁은 지속되었다. 조작설로는 당시 서인의 참모로 활동한 송익필()은 신분이 비천했는데(할머니가 천첩의 소생이었다) 동인이 자신의 친족을 노비로 환천(- 양인이 된 천민을 다시 천민으로 되돌림)시키려고 하자 옥사를 조작해 보복했다는 견해와 위관(- 사건의 추국과 판결을 맡은 책임자)인 정철()이 옥사를 확대시켰다는 주장을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