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學笛

추사 김정희와 수선화 이야기

푸른하늘sky 2018. 3. 14. 10:19

추사 김정희와 수선화 이야기

수선화는 수선화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로 지중해 연안이 원산지라고 한다.
서양에서 수선화의 속명은 나르키수스(Narcissus)이다.
이는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하며 나르시스(Narcissos, 나르키소스)라는 미소년이
물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물 속에 빠져 죽었는데, 그곳에서 수선화가 피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연유되어 수선화는 자기애(自己愛), 자기주의(自己主義)라는 꽃말을 가진다.

이에 비해 동양에서의 수선화는 사뭇 다르다.
수선(水仙)이란 꽃 이름은 중국에서 쓰기 시작하였는데, 하늘에 있는 천선(天仙), 땅에 있는 것을 지선(地仙),
그리고 물에 있는 것을 수선(水仙)이라고 하였는데 신선의 상징으로 여겨질만큼 이 꽃은 높은 품격으로 지칭되어 왔다.

한 겨울 추위 속에서도 매화, 동백과 함께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강인함과 더불어 청초한 자태와 향기를 지닌 수선화,
시인 묵객들의 작품과 노래에도 자주 등장할 만큼 옛 선비들은 사군자처럼 수선화를 아주 귀하게 여겼다.
조선시대에는 수선화를 지금처럼 쉽게 만날 수 있는 꽃이 아니었다.
북경에 다녀오는 이들에게 부탁하여 구근을 얻어다가 수선화를 키우는 것은
선비들의 큰 즐거움이자 호사였다. 추사 김정희 또한 수선화에 대한 사랑이 유별났다.

1840년 추사가 55세 되던 해에 제주도로 유배길에 오른다.
조선시대 제주도의 유배는 그 자체가 죽음의 여정이었다.
다시 유배가 풀릴 희망보다는 험난한 뱃길에 제주로 살아서 들어갈 수 있을지가 우선 걱정이었다.
모진 풍랑을 뚫고 제주로 들어온 추사는 "백 번 꺾여서 온 이곳"이라며
아득한 심정을 표현하였다지만 제주에서 이어질 유배 생활도 녹녹치가 않았다.
추사는 가혹하게도 주거지 주위에 가시나무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서만 생활해야 하는 위리안치(圍籬安置)에 처해졌기 때문이다.
유배 형벌로 제주도에 와보니 지천으로 널려있는 것이 수선화였다.
추사는 제주의 수선화 풍경을 보고 친구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수선화는 과연 천하에 큰 구경거리입니다. 절강성 이남 지역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이곳에는 촌동네마다 한 치, 한 자쯤의 땅에도 이 수선화가 없는 곳이 없는데,
화품(花品)이 대단히 커서 한 가지가 많게는 10여 송이에 꽃받침이 8~9개, 5~6개에 이릅니다.
그 꽃은 정월 그믐께부터 2월 초에 피어서 3월에 이르러서는 산과 들, 밭두둑 사이가
마치 흰 구름이 질펀하게 깔려 있는 듯, 흰 눈이 장대하게 쌓여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토착민들은 수선화가 귀한 줄 몰라서 소와 말에게 먹이고 함부로 짓밟아버리며,
또한 수선화가 보리밭에 잡초처럼 많이 나기 때문에 시골의 장정이나 아이들이 보자말자 호미로 파내어 버리는데,
파내고 파내도 다시 나기 때문에 이를 원수 보듯 하고 있으니, 수선화가 제자리를 얻지 못함이 이와 같습니다.”

고독한 유배생활 중에서도 그를 종종 위로해줬던 것은 바로 수선화였다.
추사의 유별난 수선화 사랑은 쉽게 풀려날 줄 알았던 유배생활이 길어지고
면식도 없는 유배지에서 쓸쓸히 지내는 자신의 신세와 닮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육지에선 귀한 대접을 받는 이 수선화를 이곳 농부들은 논밭 아무 곳에서나 자라는 잡초로 취급하고
보리밭에 있는 아름다운 꽃을 원수 보듯이 파버리거나 소와 말의 먹잇감이 되어버리는 것을 보고는
하나의 사물이 제자리를 얻지 못하면 이런 딱한 일을 당한다며 안타까운 마음에 추사는 수선화에 대한 애잔한 시를
여러 편 남기기도 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수선화에 대한 편지글을 쓰기도 했다.

추사는 24세가 되던 해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연경에 가서 처음 수선화를 보았다.
추사는 수선화의 청순함에 감동하여 이때부터 평생 곁에 두고 완상하면서 사랑한 꽃이 되었다.
43세 때 평안감사로 부임한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가 때마침 연경에서 오는 사신이 그의 아버지한테
선물한 것을 받아서 그 수선화를 경기도 남양주의 여유당에 기거하는 다산 정약용에게 보냈다.
뜻밖의 선물에 정약용은 다음과 같은 수선화라는 시를 지었다.

仙風道骨水仙花   신선의 풍채나 도사의 골격 같은 수선화가
三十年過到我家   30년을 지나서 나의 집에 이르렀다
茯老曾携使車至   복암 이기양이 옛날 사신길에 가지고 왔었는데
秋史今移浿水衙   추사가 이제 대동강가 아문으로 옮기었다오
窮村絶峽少所見   외딴 마을 동떨어진 골짝에서는 보기 드문
得未曾有爭喧譁   일찍이 없었던 것 얻었기에 다투어 떠들썩한다
穉孫初擬薤勁拔   어린 손자는 처음으로 억센 부추잎에 비유하더니
小婢翻驚蒜早芽   어린 여종은 도리어 일찍 싹튼 마늘싹이라며 놀란다
縞衣靑ㅇ相對立   흰 꽃과 푸른 잎새 서로 마주 서 있으니
玉骨香肌猶自浥   옥 같은 골격 향그런 살결에서 향내가 절로 풍기는데
淸水一盌碁數枚   맑은 물 한 사발과 바둑알 두어 개라
微塵不雜何所吸   티끌조차 섞이지 않았으니 무엇을 마시는지

다산은 경상도 장기에 유배되어 있을 때 복암 이기양이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가져온 수선화를 선물 받고
시를 지은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 또 추사로부터 수선화를 선물받자 감회가 다시 일어났던 것이다.
시의 원제목은 <수선화>이고 다산은 시의 부제로 "늦가을에 벗 김정희가 향각에서 수선화 한 그루를 부쳐 왔는데
그 화분은 고려청자였다"고 적었다. (秋晚 金友喜香閣 寄水仙花一本 其盆高麗古器也)
추사가 얼마나 다산을 좋아했으면 평양에까지 와서 여유당으로 꽃을 보냈을까.  
추사와 다산에 대해 특별함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수선화는 자생지가 아니더라도 지금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이 되었지만
조선시대에는 수선화를 수천 리 떨어진 중국에 다녀오는 이들에게 부탁하여 가져올 정도로 귀한 꽃이었다.
추사는 친구인 정학연의 아버지이자 선배학자인 다산 정약용에게 직접 고려청자 화분에다 수선화를 고이 담아
선물하였던 수선화가 제주도에선 잡초 취급을 받고 말 먹잇감이 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어이가 없어
혀만 끌끌 찼을 것이다. 그 안타까운 심정을 시에 담았는데 수선화에 대한 추사의 시는 모두 다섯 수가 전해온다.

一點冬心朶朶圓(일점동심타타원)  한 점의 겨울 마음 송이송이 둥글어라
品於幽澹冷雋邊(품어유담냉준변)  그윽하고 담담하고 냉철하고 빼어났네
梅高猶未伊庭체(매고유미이정체)  매화의 기품이 높다지만 뜨락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淸水眞看解脫仙(청수진간해탈선)  맑은 물에서 참으로 해탈한 신선을 보네.

碧海靑天一解顔(벽해청천일해안)  푸른 바다 푸른 하늘 한결같이 웃는 얼굴
仙緣到底未終慳(선연도저미종견)  신선의 맑은 풍모 마침내 아끼지 않았어라.
鋤頭棄擲尋常物(서두기척심상물)  호미 끝에 버려진 심상한 이 물건을
供養窓明几淨間(공양창명고정간)  밝은 창 정갈한 책상 그 사이에 공양하네.




추사 김정희(1786~1856년)는 훗날 그를 사모하는 이들이 많아 '완당 탁묵'이라고 불리는 여러 탁본이 만들어졌다.
그 중에 '수선화부'는 수선화를 노래한 청나라의 호경의 명문장을 추사체로 쓰고
끝에 감옹(憨翁)이라는 낙관과 함께 "아무렇게나 붓질하여 한 다발 그려보았다"는 수선화 한 폭이 실려 있다.
이 그림은 비록 목판화이긴 하지만 청초한 가운데 애수(哀愁)와 적조(寂照)의 미가 넘치는 사랑스런 작품이다.
아마도 제주도 시절에 여러 모로 위안이 되었던 그 수선화의 이미지를 담은 것이기에 이처럼 애잔한 그림이 된 것이 아닐까.

추사의 성격이나 행동은 직설적이고 불같았다고 한다.
대단히 까다롭고 오만해서 안하무인이었으며 자기 주장이 강한 사람이었고 매사에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
추사는 유배생활 9년간 제주에 머무는 동안 추사체를 완성하고 생애 최고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세한도를 비롯하여 많은 서화를 남겼다,

외로워서 쓰고 그리워서 쓰고 끓어서 쓰고 화나서 쓰고 슬퍼서 쓰고...그렇게 스스로 울분을 삭히고  
마음을 다스리면서 벼루 열 개를 구멍 낸 그의 노력이 결국 세계적인 추사체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