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學笛

사소한 것들의 소중함 - 안도현 시의 밑바닥 군산과 만경평야

푸른하늘sky 2018. 1. 4. 00:22
사소한 것들의 소중함
안도현 시의 밑바닥 군산과 만경평야
정상철 기자  

10여 년 전 전주의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안도현 시인과 소주를 마신 적이 있다. 꼼장어 한 접시 옆으로 빈 술병만 자꾸 늘어났고, 밤은 깊었다. 은근히 빈 주머니가 걱정될 무렵 안도현이 “오늘 원고료 받았다”며 호기를 부렸다. 그의 경제력을 감안하면 술값이 상당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안도현은 <아내한테 차비 좀, 하면/월말이라 세금 내고 뭐 내고 해서 천 원짜리 몇뿐이라는데/사천 원을 받아들고 바지주머니 속에 짤랑거리는 동전이 얼마나 되나> (‘나의 경제’ 부분)를 셈하던 해직교사 시절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모닥불』의 뜨거운 불기운이 그를 지피고, 군산 금강의 탁류가 내면에 흐르던 때이기도 했다.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과 『모닥불』을 써내던 시절 그를 지배하던 공간은 군산과 전군가도 건너편으로 드넓게 펼쳐진 만경평야였다. 그는 세상이 무겁게 내려앉은 날이면 군산선 기차에 몸을 실었고, 군산항에 들어 파닥거리는 갯냄새에 가려진 역사의 단면들을 읽어냈다. “그 때는 문학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현실에 복무해야만 하는 시절이었다”는 게 안도현의 말이다.
<지난 일요일엔 군산 횟집에 앉을 자리도 없더라며/전국에서 가장 긴 벚꽃 터널이 가까이 있다고/…/눈뜨고는 못 볼 처참한 기분으로/벚꽃이 진다니 군산으로 가야겠다/이 길이 뱃길로 하나로 이어져/어느 항구에 닿아야 할 길인데> (‘군산행2’ 부분)

지금은 ‘백리 벚꽃길’로 명성을 떨치는 전군가도는 김제 만경평야에서 생산된 곡식을 일본으로 가져가는 수탈의 길이었다. 전국에서 가장 긴 벚꽃 터널의 그 길이 전국에서 가장 먼저 포장이 되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옥구현에 불과했던 군산은 전군가도를 통해 기형적 성장을 했다. 반대로 땀흘려 생산한 쌀가마를 모두 빼앗겼던 인근의 평야지대들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많은 세월이 흘러 전군가도는 길이 가진 원래의 기능조차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주와 군산을 잇는 새로운 자동차전용도로가 생겨나면서 더러는 새 길에 포함되고 더러는 길에서 유배되어 봄 한 철 상춘객들의 주차장으로 전락해 있었다. 안도현은 초겨울 바람에 앙상한 가지로 흔들리는 벚나무들을 굽어보며 “전군가도에는 눈물 같은 역사가 스며 있다. 이 길에서 똑똑히 보아야 할 것은 벚꽃의 아름다움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 탁류가 역사처럼 꿈틀거리는 군산항에 선 안도현 시인.

ⓒ 전라도닷컴


연애로부터 시작한 ‘서울로 가는 전봉준’
안도현의 초기시들에서 두드러진 인상은 문학을 통한 세상 바꾸기다. 그는 뒤틀린 현실을 바로바로 언어로 풀어냈다. 그리고 그런 인식들은 사실 전라도라는 땅이 심어준 것이었다. 지금은 전라도 사람이 다 됐지만 그는 성장기의 전부를 경상도 땅에서 보냈다. 대학 진학을 위해 전라도에 왔을 때만 해도 그는 문학 지상주의를 꿈꿨다. 그러나 순수한 꿈은 금방 어긋났다. 그가 대학에 입학하던 해 광주에서는 80년 오월이 있었다.

80년 5월15일 그는 광주에 있었다. 송수권 시인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광주에서는 피의 전주곡이 울리고 있었다. 우연히 만난 뜨거운 현장 앞에서 그는 “소주 먹고 시집만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게 문학이 아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실상 그의 등단작인 ‘서울로 가는 전봉준’의 시작은 치열한 역사의식이 아니었다. 당시 안도현은 같은 학교 국사교육과에 다니는 처자와 눈이 맞았다. 안도현은 그녀의 호감을 얻을 요량으로 그녀가 보는 역사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고, 어느 날 그녀에게 빌려온 책 뒤표지에서 관군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는 전봉준의 사진 한 장을 만났다.

<눈 내리는 만경 들 건너가네/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 가네/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우리 봉준이/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서울로 가는 전봉준’ 부분)
당시 안도현의 눈에 들어온 만경평야는 꼼짝 않고 누워있는 들판이 아니었다. 들판을 태우며 선연하게 타오르는 들불, 그것이었다. 들판뿐만 아니라 세상 자체가 이분법으로만 분화되어 있었다. 적 아니면 동지였으며 전봉준의 좌절은 여전히 현실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전군가도를 벗어나 김제 방면으로 달리며 만나는 초겨울의 만경평야는 맨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 해 동안 끝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의 들녘을 키운 강물은 바다로 스며들었다. 거기 만경강의 끝자락에서 둘러본 마을들은 동학군의 사발통문처럼 둥그런 모양을 하고 들녘 군데군데 박혀 있었다. 그 마을들 사이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푸른빛을 키우는 논보리가 <한세상 똑부러지게 살다 가야겠다고/살아 꽃피며 수군거리> (‘만경평야의 먼 불빛들’ 부분)고 있었다.

▲ 넓은 들녘 뒤로 만경강이 바다에 닿는다.
ⓒ 전라도닷컴


탁류가 고인 회색도시, 군산
안도현에게 군산이라는 도시는 생명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그의 표현처럼 군산은 <오래된 책표지 같은> 어두운 회색빛으로 서 있는 곳이면서도 동시에 날것의 생명력으로 파닥거리는 공간이기도 하다.

바다 구경을 거의 해본 적 없는 내륙 대구의 촌놈(?)이었던 안도현은 젊은 날 시간만 나면 어시장의 흥정거리는 분위기를 찾아 군산 앞바다로 향했다. 항구 가장자리로 길게 늘어선 포장마차에 앉아 ‘숭어회 한 접시’를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며 군산을 문장 속으로 옮겼다. 그는 “군산은 역사가 진화하며 발전한 게 아니라 외부적 요인에 의해 기형적 성장을 이룬 곳이다. 군산의 탁류는 장소의 특이성과 맞물려 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고 말했다.

<시커먼 물이 돌이킬 수 없도록/금강 하구 쪽에서 오면/꾸역꾸역, 수면에 배를 깔고/수만 마리 죽은 갈매기 떼도 온다/사랑도 역사도 흉터투성이다/그것을 아둥바둥, 지우려고 하지 않는 바다는/늘 자기반성하는 것 같다> (‘군산 앞바다’ 부분)
군산은 흉터투성이의 도시다. 군산 앞바다를 가득 채운 탁류가 군산이 가진 지형적 역사적 성향과 무관해 보이지 않듯이 그곳은 수많은 흉터를 만들며 버텨왔고, 지금은 지나온 세월을 반성하듯 도시 전체를 암울한 회색으로 덮고 있다. 사람도 땅도 그렇게 반성하며 역사를 위로 밀어 올린다.

안도현의 시들은 군산을 담은 『모닥불』 이후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다가 다섯 번째 시집 『그리운 여우』부터는 거대한 담론들에서 벗어나 사소한 것들에게로 전향한다. 그 시기는 시대의 변화와 어느 정도 일치한다. “시대가 변하고 적과 동지의 구분이 모호해지면서 민중시들이 지겨워졌다. 더 이상 시대적 의무감에 갇혀 이름만 가리면 똑같은 시들을 써낼 필요가 없어졌다”는 게 안도현의 말이다.

<물푸레나무 가지 끝에 알을 낳으려고/연어는 알을 낳은 뒤에 죽으려고/죽은 뒤에는 이듬해 봄 물푸레나무 가지 끝에/수천 개 연초록 이파리의 눈을 매달려고/연어는 떼지어 나무를 타고 오른다/나뭇가지가 강줄기를 빼닮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강과 연어와 물푸레나무의 관계’ 부분>

세상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관계맺음으로 형성된다. 안도현은 모든 관계를 생명의 관점 안에서 풀어낸다. 강물이라는 똑같은 대상에서 그는 전혀 다른 것을 건져 올렸다. 한때 꿈틀거리는 변혁의 물줄기였던 강물이 연어와 물푸레나무가 관계 맺어 서로 닮아 가는 생명의 강으로 변모한 것이다.

안도현의 시가 직접적 현실에서 멀어지면서, 그 즈음 발표한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가 속된 말로 대박을 터트리면서 지금껏 안도현은 ‘상품성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일각에서는 아예 동화작가로 나서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던지기도 한다. 이후 안도현의 이름을 달고 무수히 쏟아져 나온 우화집이나 산문집들도 혐의를 짙게 하는 데 일조했다.

군산항을 벗어나 전주로 돌아오는 길에 안도현은 “자연도 현실이다. 사소한 것들에 담긴 소중함을 깨달았을 뿐 현실에서 눈을 뗀 것은 아니다”며 어렵게 자신의 변을 남겼다. “어른 동화를 첩으로 두기는 했지만 조강지처인 시를 홀대할 순 없다. 나는 시의 힘을 믿는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오로지 시인으로 살고 싶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안도현

안도현은 스스로를 후천성 시인이란 말로 표현한다. “시를 쓰는 것보다 만드는 것을 먼저 배웠고, 만드는 데 열중하다 보니 쓰는 시도 가끔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그는 한 편의 시를 세상에 내놓기 위해 고치는 행위를 무수히 반복한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너에게 묻는다’는 단 삼행으로 이루어진 짧은 시이지만 원래는 20여행이 훌쩍 넘는 장문이었다. 50번이 넘는 퇴고를 반복하는 동안 단 세 줄만 남아 세상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는 최근에 와서 다른 생각을 한다. 쉽고 부드러운 시만이 능사가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이제 오히려 거친 그대로 던져 놓고 싶다”는 게 안도현의 말이다.
196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난 안도현은 시인을 위해 유배를 자청하는 심정으로 전북 익산의 원광대 국문과에 진학했다. 이후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문단에 나왔다.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되어 5년 간 교직을 떠났다가 94년 복직되었다. 97년에는 가르치는 일보다 오직 글 쓰는 일에만 전념할 요량으로 교직을 떠나 지금껏 전업작가로 살고 있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 『모닥불』 『그대에게 가고 싶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리운 여우』 『바닷가 우체국』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등 7권의 시집을 냈으며 어른들을 위한 동화로 『연어』 『관계』 『짜장면』 등을 펴냈다.


 [출처:전라도닷컴]*2003년12월 쓰여진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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