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詩한

돼지고기 두어 근 끊어왔다는 말 / 안도현

푸른하늘sky 2017. 12. 26. 17:32



돼지고기 두어 근 끊어왔다는 말 / 안도현

어릴 때,
두 손으로 받들고 싶도록 반가운 말은
저녁 무렵
아버지가 돼지고기 두어 근 끊어왔다는 말
정육점에서 돈 주고 사온 것이지마는
칼을 잡고 손수 베어온 것도 아니고 잘라온 것도 아닌데
신문지에 둘둘 말린 그것을
어머니 앞에 툭 던지듯이 내려놓으며 한마디,
고기 좀 끊어왔다는 말
가장으로서의 자랑도 아니고 허세도 아니고
애정이나 연민 따위 더더구나 아니고
다만 반갑고 고독하고 왠지 시원시원한 어떤 결단 같아서 좋았던,그 말
남의 집에 세들어 살면서 이웃에 고기 볶는 냄새 퍼져 나가 좋을 것 없다,
어머니는 연탄불에 고기를 뒤적이며 말했지
그래서 냄새가 새어나가지 않게 방문을 꼭꼭 닫고
볶은 돼지고기 씹으며 입 안에 기름 한입 고이던 밤


                      -안도현 9번째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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