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음식물의 저장, 발효용구로서 옹기가 필수적인 생활용기로 쓰여 왔다. 그러나 과학문명의 발달과 서구 문명이 들어오면서 식기재료의 발달과 주택공간의 현대화 등으로 인하여 옹기수요가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옹기의 특성
우리의 음식문화와 깊이 연관되어 있는 옹기의 특성으로, 저장성·통기성·보온성·방부성·자연환원성 등을 들 수 있다. 우리는 옹기 하면 장독·김칫독을 떠올리게 되고, 옹기에 담긴 음식물이 신선도나 맛에서 다른 그릇보다 월등함을 안다. 그 이유는 미생물의 활동을 조절해서 발효를 돕고 음식이 오래 보존되도록 하기 때문인데, 이는 즉 옹기가 숨을 쉬기 때문이다. 옹기는 고운 흙으로 만든 청자나 백자와는 달리 작은 알갱이가 섞여 있는 질(점토)로 만들어지는데, 가마에서 소성될 때 질이 녹으면서 미세한 구멍이 형성된다. 이 미세한 기공으로 공기·미생물·효모 등이 통과할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온도·습도 등도 흡수 조절할 수 있어서 발효식품을 썩지 않게 오랫동안 숙성 저장하는 데 가장 큰 장점을 지니고 있다. 한편, 옹기는 단열에도 뛰어나 여름철의 직사광선이나 겨울철의 한랭한 바깥 온도를 조절해 준다. 그리고 깨어진 옹기를 땅에 버려 두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 파편으로 남지 않고 흙으로 다시 돌아갔다가 옹기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옹기의 자연환원적 특성이다. 옹기의 종류
옹기의 이름은 그 역사만큼이나 용도에 따라 종류도 다양하고 지역마다 특징있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살림 그릇으로 사용되는 옹기의 종류를 간단히 살펴보면, 운두가 높고 중배가 부르며 키가 큰 ‘독’, 위아래가 좁고 배가 부른 ‘항아리’, 독보다 조금 작고 배가 부른 ‘중두리’, 중두리보다 배가 부르고 키가 작은 ‘바탱이’ 등이 있다. 그리고 굽 없는 접시 모양의 넓은 그릇으로 독의 뚜껑으로도 쓰이는 ‘소래기’, 둥글넓적하고 아가리가 쫙 벌어진 ‘자배기’, 자배기보다 조금 크고 속이 깊은 ‘버치’, 물을 길어 와 부어 놓고 쓰는 ‘두멍’, 몸이 둥글고 아가리가 넓으며 양 옆에 손잡이가 달려 있는 ‘동이’, 아주 작은 자배기인 ‘옹자배기(옹박지, 옹배기)’, 아래는 좁고 위는 확 벌어진 ‘푼주’, 위가 좀 벌쭉하고 밑에 높직한 굽이 달려 있으며 양쪽에 손잡이가 달려 있는 ‘소라(식소라)’ 등은 항아리보다 낮고 넓은 형태의 옹기들이다. 또한, 귀가 달린 그릇인 ‘귀때동이’, 동이보다 배가 부른 ‘동방구리’, 자그마한 항아리로 배가 부르고 목이 짧은 ‘단지’, 동이의 밑쪽을 마주 붙이고 꼭지를 달아 소주를 내리게 만든 ‘소줏고리’, 간장·기름 등을 병에 옮겨 부을 때 쓰는 ‘귀때’, 아주 작은 단지를 두 개에서 다섯 개 정도를 붙여 손잡이를 붙인 ‘양념단지’ 등도 있다. 이 외에도 장군·시루·촛병·확·확독·굴뚝·떡살 등 생활에 필요했던 모든 것들이 옹기로 만들어져 사용되었다. 그리고 알방구리·알항아리·알백이·방구리·썰단지·청단지·중단지·방퉁이·동우방퉁이·꼬맥이·맛탱이·전달이·물버지기·멍챙이·삼중단지·소락지·불백이 등 다소 촌스럽지만 구수하고 익살스러운 옹기의 이름이 지역에 따라 불리고 있다. 반백년 전통의 숨결을 빚어온 김일만 선생
중요무형문화재 제96호 옹기장 기능보유자인 김일만 선생의 옹기 제작은 5대조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온 가업(家業)이라고 한다. 1941년 12월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양복리에서 부친 김운용 선생과 모신 서갑순 여사 사이에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옹기를 건조하거나 뒷일을 돕는 건아꾼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부친을 따라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자랐는데 10살 때 강화도에서 한국전쟁을 맞이했다. 북쪽과 가까웠던 강화도는 일찍 점령당한 상황이었는데 부친의 기지로 강화도를 무사히 빠져 나와 백부가 있는 안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장호원으로 다시 거처를 옮겨간 김일만 선생은 본격적으로 옹기 일을 배우기 시작한다. 15살 나이에 수비꾼((점토를 물에 풀어 이물질을 걸러내는 일을 함), 16살에 생질꾼(밖에 있는 흙에 물을 뿌린 후 작업장에 들이는 일을 함), 17살에는 건아꾼(옹기를 건조하거나 유약을 입히는 등의 일을 함)으로 일했다. 18살이 되어서야 경기도 여주에 와서 비로소 물레질을 본격적으로 배워서 대장(옹기를 만들거나 굽는 일을 함)으로 인정받았다. 대장의 일을 배우는 동안 옹기점 주인이 요구하는 온갖 허드렛일을 다 해주며 품삯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이렇듯 공밥을 먹으며 물레질을 배우는 것은 이 당시 일반적인 옹기점의 관행이었다. 21살 되던 해 부모님이 계시는 장호원으로 다시 옮기고 22살 되던 해 부인 신종애 여사를 만나 혼인하고 이듬해 큰아들을 낳았다. 25살 되던 해에는 경기도 용인에 있는 옹기점에 가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는 건아꾼이 아닌 대장으로서 본인의 몫을 제대로 받기 시작했다. 이후 37살에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에 자신의 옹기점을 처음 설립했는데 기존에 운영되고 있던 옹기점을 매입한 것이 아닌 새롭게 옹기점을 설립한 것이어서 가마를 새로 박는 등 모든 것을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야 했다. 옹기의 품질은 결국 가마에서 굽혀 나오는 상태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처음 박은 통가마의 불을 잡지 못해 옹기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첫 해 실패를 하며 가마를 손보아 다음해부터는 소성 성공률을 높였다. 그런데 가마에서 불을 땔 때 발생하는 나뭇재가 주변 나무에 해를 끼친다고 인근 주민들이 문제를 제기하며 마찰이 일어났다. 결국 옹기점을 1980년 12월 여주군 금사면 궁리로 옮기고 대장 4명, 건아꾼 2명, 생질꾼 2멷을 고용하여 본격적으로 옹기점을 운영했다. 1983년에는 공장을 한 곳 더 확장하여 두 곳으로 공장을 나누어 운영하였다. 이때에는 대장이 10명, 건아꾼이 6명이나 되었는데, 두 공장의 사람들이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매일같이 다툼이 일어나 결국 위쪽에 있는 공장을 폐쇄하였다. 1980년대를 지나면서 옹기점의 상황이 악화되었다. 직원을 따로 쓰면서 옹기점을 운영할 상황이 못되어 결국 가족들로만 옹기점을 운영했다. 그러나 경제적인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1990년대 초 어느 잡지에 선생의 옹기점이 소개되고 이를 계기로 방송에 출연하는 등 서서히 대중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옹기점 명칭이 원래 ‘금사토기’였으나 방송작가가 김일만 선생과 네명의 아들이 함께 하니 ‘오부자 옹기’가 어떻겠냐는 의견을 내놓아 이후부터 ‘오부자 옹기’로 알려지게 되었다. 2001년에는 화재로 인해 작업장이 소실되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2002년 10월에 선생이 사용하는 질가마 1개, 통가마 2개가 경기도 민속자료 11호로 지정되었다.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주변 건물을 자유롭게 변경하는 것에 제약이 생겼다. 이 때문에 화재 후 작업장 건립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가마가 문화재로 지정된 바로 그해 11월 경기도 무형문화재 옹기장으로 인정되기도 하였다. 이후 2010년에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96호 옹기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작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