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詩한

서울로 가는 전봉준 - 안도현

푸른하늘sky 2018. 1. 4. 12:04
서울로가는 전봉준

                                                   김호석 作 전봉준


서울로 가는 전봉준 - 안도현


눈 내리는 만경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 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 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주지 못하였네
못다 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나라 풀뿌리들이
입춘 경칩 지나 수군거리며 봄바람 찾아오면
수천 개의 푸른 기상나팔을 불어제낄 것을
지금은 손발 묶인 저 얼음장 강줄기가
옥빛 대님을 홀연 풀어헤치고
서해로 출렁거리며 쳐들어갈 것을

우리 성상(聖上) 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
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 목숨 타오르겠네
봉준이 이 사람아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흰 무명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 시인의 자서 (시집,서울로 가는 전봉준)

그때, 나는 이십대 초반의 뜨겁고 푸른 청춘이었구나. 세상에 대한 끝도 없는
동경과 문학을 향한 짝사랑과도 같은 열정. 그리고 풋내 나는 치기까지 여기
고스란히 숨어 있구나. 심약하고 부끄럼움 많았던 나여. 그것을 감추려고 시를
통해 이 세상과 정면 승부를 걸었던 것은 아닌지. 그 싸움에서 누가 이기고
누가 졌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나를 적시고 간 상처들과의 싸움이 있었기에
나는 한 시절을 버텨낼 수 있었다. 이 시집은 그때 터진 코피 자국이다.

그것을 굳이 닦아내지는 않으니라.           ㅡ1997년 3월 안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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