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영시서(菊影詩序) - 정약용
국화는 여러 꽃 가운데 특히 빼어난 점이 네 가지 있다.
늦게야 꽃을 피우는 것이 한가지이고, 오래도록 견디는 것이
한가지이며, 향기로운 것이 한가지이고, 어여쁘지만 요염하지
않고 깨끗하지만 차갑지 않은 것이 한가지이다.
세상에서 국화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스스로 국화의 운치를
안다고 하는 사람들도 이 네 가지의 범위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나는 이 네 가지 외에 또 다만 등불 앞의 그림자를 꼽는다.
매일 밤 이를 위해 방의 벽면을 치우고 등잔 받침과 등잔을 차려
놓고 가만히 그 가운데 앉아서 혼자 즐기곤 했다.
하루는 남고(南皐) 윤이서(尹彛敍)에게 들렀다가 이렇게 말했다.
“오늘 저녁 자네가 우리 집에 자면서 나와 함께 국화를 보는 것이
어떻겠나?” 윤이서는, “국화가 비록 아름답다고는 하나 어찌
밤중에 볼 수가 있겠는가?” 라고 하며 아프다고 사양하였다. 내가,
“어쨌든 가보기나 하세.” 하며 억지로 청하여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이 되었다. 짐짓 동자를 시켜 등잔을 잡고 꽃 한 송이에 바싹
갖다 대게 하고는 윤이서를 당겨서 이를 보게 하며 말했다.
“기이하지 않은가?” 윤이서가 한참을 살펴보더니 말했다. “자네의
말이 더 이상하군. 나는 아무리 봐도 기이한 걸 모르겠는걸.” 내가
말했다. “자네 말이 옳아.”
조금 있다가 동자를 시켜 법대로 하게 하였다.
이번에는 옷걸이와 책상 등 여러 가지 방안에 있던 산만한 물건들을
치우고, 국화의 위치를 정돈하여 벽에서 약간 떨어지게 하였다. 그리고
등잔도 꼭 알맞은 위치에 놓아두고서 불을 밝혔다. 그러자 기이한 무늬와
희한한 형상이 갑자기 벽에 가득 차 오는 것이었다. 가까운 것은 꽃과 잎이
엇갈려 있고 가지와 줄기가 또렷하고 가지런한 것이 마치 수묵화를
그려놓은 것만 같았다.
그 다음 조금 떨어진 것은 너울대고 어른대는 그림자가 춤추듯 하늘거리는
것이 마치 동산에 달이 떠올라 뜨락의 나뭇가지가 서쪽 담장에 일렁이는
듯하였다. 먼 것은 흐릿하고 모호해서 마치 구름 노을이 엷게 깔린 것만
같고, 사라질 듯 여울지는 것은 파도가 넘쳐흐르는 듯해서, 황홀하고도
비슷한 것을 이루 형언할 수가 없었다.
이에 윤이서가 즐거워 크게 소리 지르며 뛸 듯이 기뻐하다가 손으로
무릎을 치면서 감탄하며 말했다. “기이하고 기이하다! 천하의 뛰어난
광경일세 그려.” 한참을 그러다 흥분이 가라앉자 술을 내오게 하였다.
술이 거나해지자 서로 시를 지으면서 즐겼다.
이때 주신(舟臣) 이유수(李儒修), 혜보(徯父) 한치응(韓致応),
무구(无咎) 윤지눌(尹持訥) 등도 또한 같이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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