閑雲野鶴

KBS 한국사전 – 국보를 되찾다, 문화유산지킴이 간송 전형필

푸른하늘sky 2020. 10. 20. 10:09

 

 

'간송 전형필의 아들' 전성우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

 

 

 

보물창고 활짝 연 '國寶 창고지기'
"도심 한복판 전시, 사실 지금도 겁나요… 문화재 다칠까봐"


아버지의 이름으로
美서 뒤늦게 悲報 전해듣고 두달간 울면서 그림만 그려…
귀국후 돌아본 아버지의 遺産, 창고지기의 삶이 시작됐다


미술품, 70여년 만의 외출
서울시 제안에 DDP서 3년, 최초로 대규모 외부 전시…
"문화재는 우리 모두의 것…아이·젊은층 많이 와 기뻐"

1962년 미국에서 활동하던 화가 전성우(全晟雨)는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의 산속으로 들어가 두 달 동안 울면서 그림을 그렸다. 비교적 건강했던 아버지가 57세를 일기로 급작스럽게 타계한 것이다. 그는 장례식이 끝난 지 석 달이 지나고 나서야 누나의 편지를 받고 그 사실을 알게 됐다. 아버지는 자신의 죽음을 그에게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했다. 요즘처럼 미국을 쉽게 오갈 수 없던 시절이었다.

전설적인 문화재 수집가이자 '문화 독립운동가'라 불리는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의 아들 전성우(80)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지난 후 귀국했다. 그는 간송미술관을 돌보며 화가이자 서울대 미대 교수로, 또 보성고등학교 교장과 이사장으로 일했다. 간송미술관은 그의 동생 전영우 현 간송미술관장, 최완수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 등이 중심이 돼 운영해왔다.

지난 3월 31일 서울 성북동 자택에서 전 이사장을 만났다. 간송미술관을 지나 비탈길을 올라가면 일반인의 출입을 막는 안내판 뒤로 봄꽃 흐드러진 언덕 위에 하얀 집이 보인다. 지붕 끝이 버선코처럼 올라간 이 집은 주한 프랑스 대사관을 설계한 건축가 김중업씨의 작품이다.

1938년 완공된 간송미술관이나 1960년대에 지어진 집은 마치 세상과 시대로부터 격리돼 수십년 전에 머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요즘 이 집에 묘하게 달뜬 기운이 있으니, 그건 오로지 간송미술관에서만 품어온 국보와 보물 등 귀한 문화재들을 세상 밖으로 내보낸 후 생겨난 흥분과 불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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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우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이 사는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 뒤 자택은 도자기와 꽃, 그림과 장식물들이 한데 어우러져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을 감상하는 듯했다. 화가이자 교육자로도 활동해온 그는 지난달 31일 인터뷰에서“나는 미술관 창고지기일 뿐”이라며,“ 아버지가 모아 놓은 문화재를 지키는 것이 나의 책임”이라고 했다. / 이덕훈 기자

◇도심 한가운데로 나간 미술관

지난 주말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리는 '간송문화(澗松文華): 문화로 나라를 지키다' 전시를 보러 갔다. 동시 입장객 수가 200명을 넘지 않도록 통제한다는데도 전시장은 관람객들로 붐볐다. 엄마와 같이 온 초등학생, 젊은 커플과 중년 부부, 등산복 차림의 노인들도 있었다. 옆에 선 20대 여성들이 "세상에, 이 청자도, 아니 훈민정음도 이 사람이 샀다는데?"라며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간송 미술관 소장품들이 대규모로 외부전시에 나간 것은 70여년 만에 처음이라는데.

"최초라고 보면 된다. '한국미술 5000년' 등 해외 전시에 몇 점 내보낸 일은 있지만 이렇게 큰 규모는 처음이다. 더구나 간송이란 이름을 걸고 나간 것은 처음이다."

―산속 수장고에 고이 모셔두던 문화재를 시내 한복판으로 내보내는 결정을 하는 건 쉽지 않았을 텐데.

"서울시의 제안을 받고 1년 가까이 고민했다. 여러 가지가 염려스러웠다. DDP 건물은 그 자체가 워낙 특이하고 간송미술관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문화재를 전시할 때는 문화재의 가치를 최대한 살릴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과연 잘 조율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다."

―가장 걱정되는 부분은.

"역시 문화재 보호 아니겠나. 미술품들이 간송미술관에 있다는 것은 우리 집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지키고 있고 나도 항상 관심을 갖고 본다. 하지만 DDP는 외부이고 대중적인 장소이다. 시장과 가깝고 지하철 역과도 가깝다. 그래서 보안 문제 때문에 걱정이 많다. 사실은 지금도 겁이 난다."

―관람객 수도 통제하고 치밀하게 관리하는 것 같긴 하던데.

"관람객들을 불편하게 하려고 한 건 아닌데 문화재란 한번 파손되면 어쩔 도리가 없으니까 양해해 주시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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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서울 성북동 자택에서 두 아들과 함께한 간송 전형필. 왼쪽부터 간송과 아들 영우·성우.

◇몇 점이나 모았는지 간송도 모른다

―간송미술관이 갖고 있는 문화재 규모는 얼마나 되나.

"하, 그게 참 어려운 질문이다. 예를 들어 화첩이라고 하면 그걸 한 점으로 봐야 할지 그 안에 있는 그림을 하나씩 세야 할지 결정하기 어렵다. 미술관엔 불상처럼 큰 것도 있고 연적같이 작은 것도 있다. 세간에서 간송 수장품이 10만점이다, 1만점이다, 아니 수천점이다, 이야기하는데, 미술관 컬렉션이라는 게 몇 점이냐는 별 의미가 없다. 질이나 중요성에서 평가받아야지 숫자만 많다고 좋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수장 규모를 정확하게 밝히지 않고 전시도 1년에 몇 주만 하는 식으로 운영하니까 간송미술관에 대해 '신비주의'란 얘기가 나온 것 아닐까. 아무래도 폐쇄적으로 느껴진다.

"그런 건 아니다. 문화재를 몇 점 가지고 있다고 구체적으로 얘기한다면 그게 거짓말이다. 동생 전영우 간송미술관장 얘기로는 정확하게 몇 점인지는 '간송도 모른다'고 한다. 아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번 DDP 전시는 2부로 구성된다. 1부는 간송이 수집한 문화재와 그에 얽힌 이야기로 풀어간다. 2부는 수집 근거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간송미술관을 대표할 만한 것들을 모아 전시한다.

간송이 자신이 어떻게 문화재를 사게 됐는지 직접 밝히는 경우는 드물었다고 한다. 그의 수집 관련 일화는 대개 주변 사람들을 통해 전해졌다. 예외적으로 간송이 배경을 직접 기록한 사례가 있다.

1936년 영국인 변호사 존 개스비로부터 고려청자 20점을 사들인 과정이다. 간송은 원고지에 직접 이 사연을 썼고, 그 원고는 이번 전시에도 공개됐다.

사연은 이랬다. 일본에서 20년 가까이 명품 고려청자를 수집하던 영국인 변호사가 있었다. 간송은 어느 날 그가 영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 청자를 처분할 것이란 이야기를 들었다. 간송은 일본으로 가서 개스비를 만나 세기의 거래를 한다.

어려운 흥정 끝에 간송은 충남 공주의 논 1만 마지기를 처분해 당시 기와집 400채 값을 내고 청자 20점을 손에 넣는다. 원래 개스비가 내놓은 물건은 청자 22점이었으나 개스비는 가격을 깎아주는 대신 2점은 자신이 보관하게 해달라고 해 간송은 이 청을 들어줬다.

―간송 선생이 급성신우염으로 돌아가셨다던데.

"사인은 그렇게 나왔다. 하지만 여러 가지 복잡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심려가 컸고 과로하셨다. 내가 6·25 전쟁 막바지인 1953년 부산 피란 시절에 미국 유학을 떠나고 나서 일주일 후 아버지가 환도했는데 집에 돌아와서 보화각(�華閣·간송미술관) 상태를 보고 쇼크를 받으셨던 것 같다. 나도 귀국 후 보화각에 갔을 때 내부가 발을 디딜 수 없이 어지러운 상황인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오죽하셨겠는가. 이승만 대통령 시절 농지개혁을 하면서 전답은 다 없어졌고 상가가 있긴 했지만 당시는 상인들도 어려워 세를 낼 형편도 아니었을 것이다. 보성학교 운영도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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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리고 있는‘간송 문화전’에 출품된 간송미술관 소장품.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68호), ◇ "나는 창고지기일 뿐…"

―간송의 문화재 사랑이 어떨 때 절절히 느껴지던가.

"어릴 때 어쩌다 새벽 한두 시에 잠을 깨보면 아버지 방에 불이 켜 있었다. 호기심에 슬쩍 가보면 아버지가 도자기를 어루만지고 계셨다. 벽에 죽 걸려 있는 족자를 바라보시기도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아버지가 정말로 그것들을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너무 훌륭한 분이라 그 아들이라는 것만으로도 힘들 수 있겠다.

"나는 창고지기이다. 그저 아버지가 모은 귀중한 문화재를 지키는 사람일 뿐이다. 단 한 점도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지키는 게 책임이랄까."

―간송의 아들이지만 인정받는 화가이기도 한데.

"미국에서 활동하며 300점쯤 되는 작품을 남기고 왔다. 내 작품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꽤 있다. 하지만 화가로서의 나 자신에 대해선 내가 아니라 후세나 평론가들이 평가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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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리고 있는‘간송 문화전’에 출품된 간송미술관 소장품. 길이 8m가 넘는 현재(玄齋) 심사정의‘촉잔도권’(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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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리고 있는‘간송 문화전’에 출품된 간송미술관 소장품. 훈민정음(국보 70호).

◇훈민정음을 처음 보던 날

해방 직후 어느 날 전 이사장이 초등학생 시절,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집 분위기가 이상했다. 낯선 사람들이 뭔가를 둘러싸고 격론을 벌이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게 '훈민정음(訓民正音)'이었다. 간송은 1940년 유명한 거간을 통해 훈민정음 원본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천신만고 끝에 훈민정음을 손에 넣었다. 이 책은 훈민정음의 창제 목적과 자모 글자의 내용, 그리고 관련 해설을 담은 것이었다. 간송은 만들어진 지 500년 만에 찾아낸 훈민정음을 최고의 보물로 소중하게 여겼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는 일제의 한글말살정책이 강력하게 시행되던 시기라 내놓지 못하고 있다가 해방 후 이를 공개한 것이다. 훈민정음은 1962년 국보 제70호로 지정됐고, 1997년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간송은 어떤 아버지였나.

"밖에선 과묵하셨지만 아이들과는 잘 놀아주셨다. 엄했다는 기억이 전혀 없다. 항상 사랑받고 자랐다는 따뜻한 기억을 갖고 있다. 아버지는 야구선수를 했었는데, 초등학교 때 직접 야구를 가르쳐 주셨다. 내가 공을 잘 못 받으면 야단치지 않고 '이렇게 하는 거야'라며 보여주셨다."

―화가가 된 건 전적으로 간송의 영향인가.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뭘 하라고 하는 분은 아니었지만 무언으로 보여줬다. 선비시니까. 주변에 항상 화가들이 많았다. 어렸을 때부터 청전 이상범, 춘곡 고희동 등 유명 화가들이 우리 집에서 작품을 하셨다. 나도 옆에서 먹 갈고 심부름을 많이 했다. 아버님도 그림을 잘 그리셨다. 글씨는 말할 것도 없고. 휘문고보 시절엔 훗날 서양화의 대가가 된 이마동 선생보다 간송의 미술 점수가 더 좋았다고 한다. 하하."

◇'바람의 화원', 간송을 대중 속으로

간송미술관을 세상 밖으로 한 발짝 더 끌어낸 건 2008년 방영됐던 드라마 '바람의 화원'이었다. 주인공 혜원 신윤복이 여자였다는 허구를 바탕으로 한 드라마는 신윤복이 그린 '미인도'가 사실은 자화상이었다는 이야기로 이어지면서, 사람들이 미인도를 보기 위해 간송미술관 앞에 줄을 섰다.

전 이사장은 "혜원은 신비성이 있는 작가다. 혜원에 대한 기록도 별로 없다. 그런데 드라마에서 '혜원이 여자'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니까 미술관에 계속 그게 사실이냐고 문의가 오더라"고 했다.

'와사등'으로 유명한 김광균 시인의 딸인 전 이사장의 부인 김은영씨는 "미술관이 10시에 여는데 관람객들이 한 시간 전부터 줄을 서기 시작했다. 그래서 외출할 일 있으면 9시 전에 얼른 나가서 일 보고 들어오고 그랬다. 그렇게 기다리시는 거 볼 때마다 너무 죄송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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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무렵 서울 성북구 자택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던 전성우 이사장이 손녀 재원과 손을 잡고 있다. 전 이사장은 이 시기 청화백자에서 영감을 얻어 푸른색과 흰색만으로 작업했다. / 전성우 이사장 제공

―거기 간송미술관의 딜레마가 있는 것 아닌가.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고 또 그래야 하지만 그러려면 지키고 보존하는 어려움이 더 커진다.

"그런 고민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래도 간송의 문화재를 보고 싶어 하는 분들이 많으니까 부담스러우면서도 기쁘다."

―어마어마한 문화재를 갖고 있으면서 잘 공개하지 않는다는 이미지 때문에 세상의 오해도 많았을 텐데.

"억울한 이야기라면 아버지가 제일 많이 들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개인 박물관이라는 게 있을 수가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이게 우리 모두의 것이지 어떻게 개인 것일 수 있는가. 이번에 재단을 만들고 DDP 전시를 결정한 것도 그런 뜻에서 한 것이다."

―DDP 전시는 3년 예정이라는데.

"일단은 서울시와 그렇게 하기로 했다. 우선 특별전으로 1부, 2부를 하고, 3부는 이제 기획이 거의 끝났다."

―전시에 가보니 초등학생도 있고 20~30대 젊은이들이 많았다.

"예전엔 골동품이라고 하면 연세 많고 재력 있는 사람들이나 수집하는 것이란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이젠 어느 개인이나 특정인들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전시는 일종의 교육이다. 어린이와 초등학생이 많이 오는 것은 참 고무적이다."

―컬렉션은 한 시대의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다. 간송의 컬렉션엔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나.

"좋은 물건에는 시대가 없다. 영원한 것이다. 그런 안목에서 봐야 한다."

조용헌씨의 책 '명문가'를 보면 간송 집안은 일본강점기 서울의 3대 부자에 들었다. 간송은 이러한 부와 열정을 우리 문화재를 지키는 데 쏟았다. 그것이 간송이 한 '문화 독립운동'이자 '문화로 나라를 지키는 것'이었다.

―간송은 해방 후엔 문화재 수집을 중단했나.

"완전히 중단한 건 아니었지만 의미가 달랐다. 이전에는 우리 문화재를 지키는 차원에서 했다면 이후엔 개인적인 취미 차원에서 했다."

―지금도 미술관에 골동품을 들고 와서 사라는 사람들이 있나.

"그런 경우가 있긴 하다. 하지만 좋은 물건은 이제 거의 없다. 대부분 누군가가 소장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누군가 가짜 골동품을 들고 오면 간송은 어떻게 했나.

"가짜라는 말은 안 했다. 그런 말을 할 분이 아니다. 그냥 '좋은 겁니다. 잘 두십시오'라고 했다."

―간송이 수집한 물건 중에 가짜도 있었나?

"가짜인 줄 알면서도 사신 게 있다. 기회를 자꾸 만드는 거다. 본인은 가짜라는 걸 알지만 거간이 좋은 물건을 가지고 오게 하기 위해선 투자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신 거다. 친구 분들이 집에 와서 술을 마실 땐 청자 잔을 냈다. 다들 청자 술잔을 들고 부들부들 떨면서 '이거 진짜냐'고, '정말 좋다'고들 했다. 그러면 간송은 그건 가짜라면서 진짜를 꺼내 보여주시곤 했다."

―좋은 물건을 볼 줄 아는 안목이란?

"안목이란 꼭 미술품을 보는 눈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냥 생활 자체의 안목이라는 게 있는 것이다. 안목은 오랜 시간 좋은 것을 많이 보면서 키워야 하는 것이다. 그동안 안목은 특수층의 전유물인 것처럼 여겨져 왔지만 결국 민도라는 게 뭔가. 국민 전체의 안목이 높아지는 것이다.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같은 걸 오래 두고 보는 게 중요하다. 좋은 물건을 봤을 때 전에는 보지 못하는 걸 보게 된다면 그것이 안목이 성장하는 거다."

―간송은 그간 사립미술관이었다가 이제 비영리공익법인인 간송미술문화재단으로 출범했다. 앞으로 어떻게 달라지나.

"그동안 봄가을 전시를 해왔지만 그런 시스템으로 미술관의 역할을 다 하기는 힘들었다. 특히 최근 몇년 동안 우리 문화에 대한 수요가 엄청나게 늘어나면서 사립 미술관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좀 더 규모 있게 시스템을 갖춰 일하기 위해 재단을 만든 것이다."

재단 측은 지금 간송미술관 근처에 상설전시가 가능한 규모가 큰 미술관 건립도 검토하고 있다.

점점 뜨거워지는 우리 문화에 대한 대중의 사랑이 결국 '은둔의 미술관'을 세상 밖으로 끌어낸 것이 아닐까. 제도적인 뒷받침과 후원이 계속돼 널찍한 미술관을 짓게 되면 성북동 산기슭에서 줄 서지 않고 간송의 문화재들을 상시적으로 감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문화독립운동가' 간송 전형필… 私財 털어 국보·보물 지켜내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재 수장가(收藏家)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1906~1962)은 거부인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재산을 바탕으로 1934년부터 본격적으로 서화·골동품 등 우리 문화재를 수집했다. 국보 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 등 우리 문화재가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은 것이 그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힌다.

그가 1938년 서울 성북동에 세운 보화각(?華閣)은 한국 최초의 사립미술관으로 꼽힌다. 1962년 전형필이 세상을 뜬 후 그의 아호를 따 ‘간송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국보 제70호 ‘훈민정음’, 제135호 ‘혜원전신첩’ 등 국보 12점, 보물 제284호 ‘금동여래입상’ 등 보물 10점이 이곳 소속이다. 정확한 소장품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다. 미술관은 1971년부터 매년 봄, 가을 2주씩 특별전시회를 열어 소장품을 일반인에게 무료로 공개해 왔다. 지난달 21일 DDP에서 첫 외부 전시이자 상설전인 ‘간송미술문화전’을 개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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