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詩한

물끄러미 / 이정록

푸른하늘sky 2020. 4. 18. 09:11


물끄러미 / 이정록

오늘 나는 작은 거울에 입김을 불어 넣고 이 말을 쓴다.
‘물끄러미’
아, 저녁 같은 이 말의 촉촉함에 나를 비빈다.
내치는 것도 아니고 와락 껴안는 것도 아니다.
‘물끄러미’라는 말속에는 적정한 거리가 있다.
대상이 녹아서 나에게 스며들 때까지의 묽은 기다림이 있다.
째려보는 것도 아니고 쏘아보는 것도 아닌, ‘넌지시’가 있다.
몰아세우고 닦달하는 것이 아니라, 안쓰러운 대상에 안쓰러운 나를 보리밥에
열무김치처럼 비비는 것. 비빔밥 옆 찬물 한 그릇의 눈을, 가슴에 들이는 것.
물끄러미. 오래 젖을 것. 풍경에 나를 덧대고,
내 안에 서려온 그늘이나 설움을 오래 문대어 들여다 볼 것...













Michael Gettel - Change My Heart Oh God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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