香遠益淸

미술품 수장가 김찬영의 영욕 김병기 화백의 증언

푸른하늘sky 2019. 8. 26. 02:37

"간송의 국보 '고구려 금동불상'은 아버지 소장품이었다'"

입력 2017.03.16 01:26 수정 2017.03.16 01:36

http://v.media.daum.net/v/20170316012609729

 

 

한세기를 그리다 - 101살 현역 김병기 화백의 증언
⑩ 미술품 수장가 김찬영의 영욕

[한겨레]

완물상지(玩物喪志). 유교 문화의 조선 사회를 상징하는 말이다. 물건을 즐기면 뜻을 잃게 된다는 것. 여기서 물건은 미술품으로 좁혀 말하고 싶다. 서화나 도자기 같은 골동 취미의 집착을 경계하는 것. 그래서 그럴까, 조선왕조 500년간 유명 컬렉터는 보기 어려웠다. 물론 초기의 안평대군으로부터 말기의 오경석-오세창 부자까지 예외는 있다. 미술품 수집 붐이 일기 시작한 것은 아무래도 일제 강점기 일본인의 영향을 염두에 둘 수 있다. 1922년 경성미술구락부라는 미술품 경매회사의 탄생이 그것이다. 미술품 매매를 공개적으로 체계화시켰다는 점, 그것도 다중 상대로 진행했다는 점을 주목하게 한다. 이제 미술품은 감상을 위한 수집의 대상이 되었고, 또 매매를 위한 상품이 되기도 했다. 경성미술구락부는 20년간 260회의 경매를 통하여 매상총액 165만엔 이상을 올렸다는 기록도 있다.

 

김병기의 부친 김찬영은 1930년대 이후 고미술품 수집에 몰두해 ‘10대 명품 수장가 김덕영’으로 또다른 이름을 남겼다. 현재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계미명 금동 삼존불 입상’(국보 72호, 고구려 불상 추정)은 지금껏 입수 경위가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김병기는 “1940년대 김찬영이 골동품 중개상을 통해 전형필에게 양도했다”고 증언했다.

 

김병기의 부친 김찬영의 1940년대 장교동 시절 모습. 남아 있는 2장의 김찬영 얼굴 사진 중에 한장이다.

“서구화와 모던이 등가를 이루며 일상에 침투했고, 골동 거래 역시 대단히 활성화되었다. 앞에서 살펴본 고미술품 거래의 시작기(1900~1910년대), 고려청자광 시대(1910~1920년대), 대난굴 시대(1920~1930년대)를 거쳐 고미술품 거래의 호황기에 접어들었던 것이다. 경성의 인구는 1935년까지 45만명이 되지 못했지만 당시 경성에서는 거의 매월 골동 교환회 및 경매회가 열렸고, 30개가 넘는 골동상들이 매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김상엽, <미술품 컬렉터들>, 2015)

 

근대 시기의 주요 수장가는 오세창, 김용진, 박영철, 김찬영, 함석태, 장택상, 오봉빈, 이병직, 이한복, 박창훈, 손재형, 박병래, 전형필, 김양선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가운데 오봉빈은 민족지사 오세창, 중추원 참의 박영철, 미술가 김찬영, 치과의사 함석태, 서예가 손재형, 외과의사 박창훈을 대표적 인물로 꼽았다.

오봉빈은 1940년 자신이 운영하던 조선미술관 개관 10주년 기념전 등에 이들 조선 10대 수장가의 명품으로 전시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런데 수장가들 명단에는 중인 출신이 많아 보인다. 전통적 양반가문은 미술품 컬렉션의 본격 입문에 거리를 두었다.

 

신문화 수용의 선진적 지역이었던 평양 출신 김찬영은 이 대목에서도 두드러진다. “유방 김덕영(김찬영의 개명)씨는 세상에서 드물게 보는 선인이요, 호인이라. 조선에서 제일이라는 고려기를 위시하여 서화 골동 전부가 호품이요 진품이다.”(오봉빈, <동아일보>, 1940년 5월1일) 김찬영은 초기 고려청자를 중심으로 수집하다 서화 분야까지 범위를 넓혔다. 그것도 명품 위주였다. 김찬영은 오봉빈의 전시관에 소장품인 심사정의 지두화(指頭畵) <절로도해도>(折蘆渡海圖)를 출품한 적도 있다. 부친의 장교동 시절, 그 그림을 자주 본 김병기 화가는 증언한다.

 

“우리집 사랑에 자주 출입한 고미술 애호가들은 송은 이병직, 무호 이한복, 소전 손재형 등이었는데, 나도 종종 인사를 했다. 송은 이병직은 구한말 마지막 내시 출신으로 서화에 일가를 이룬 분이었다. 상서(箱書)라고 부른, 미술품 보관용 오동나무 상자의 글씨는 무호와 소전이 주로 썼다. 아버지는 서울에 정착하면서 호적을 새롭게 정리했는데, 그때 김덕영(金悳永)이라는 새 이름을 만들었다. 이 이름은 주로 골동가에서 사용했는데 그나마 즐겨 쓰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소장품을 전시에 출품할 때도 본인 이름 쓰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사돈집안이 되는 화신백화점의 박흥식 이름으로 출품하기도 했다.

 

1938년 간송 전형필이 지은 국내 첫 사립미술관 보화각의 개관 기념일을 맞아 북단장 사랑에 당대 쟁쟁한 예술인과 수장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왼쪽부터 이상범 박종화 고희동 안종원 오세창 전형필 박종목 노수현 이순황. 사진 간송미술관 제공

아버지의 서울 거처는 가회동~도정궁~장교동~돈암동~회현동~후암동으로 이어졌다. 소장품은 한때 조선왕조의 별궁(別宮)인 도정궁의 누각에 모아뒀다. 현재 사직공원 옆 사직터널 부근이다. 그 누각에 고려청자 등을 가득 보관했다. 아버지의 미술품 수집은 ‘고려’부터 출발했다. 아무래도 평양 출신이라는 지역 연고와도 관계있을 것이다. ‘청자 수장의 최고 컬렉션’이라는 평을 들었다. 돈암동 한옥은 아버지가 직접 설계해 지은 집으로 마당에 신라석등이 있었다. 해방 직후 이 집을 조병옥에게 양도하고 회현동(지금의 신세계백화점 부근)의 큰건물을 인수했다. 20여개 점포가 들어 있었는데, 세입자들이 일본 적산가옥이니 나갈 수 없다고 주장해 소유권을 갖지 못한 채 물러났다. 컬렉터로서 아버지의 전성시대는 을지로 입구의 장교동에 있을 때였다. 그 부근에 살던 해주 사람 장규서도 사랑을 자주 출입했다. 그는 골동 중개업도 해서, 아버지가 소장하던 고려청자 대부분을 이대 총장 김활란에게 양도하게 했다. 그를 통해 상당수의 아버지 컬렉션이 이화여대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를 자주 찾아온 골동 중개업자로 대구 출신 장봉문도 있었다.

 

1940년 오세창의 아들 오봉빈의 조선미술관 개관 10돌 기념전에 출품한 김찬영의 소장품 심사정의 <절로도해도>는 손가락으로 그린 지두화의 명품이다.
삼성미술관 리움에 있는 ‘고려청자 오리 연적’에 대해 김병기는 부친 김찬영이 자신과 누이동생에게 물려주기로 했던 명품 중 하나였다고 밝혔다.

 

청자 오리 연적 한쌍은 애초 아버지가 나와 내 누이에게 하나씩 주기로 해서 늘 생각이 난다. 내가 고른 것은 주광빛이 도는 밝은 비취색 오리였는데 자취를 모르겠고, 누이 몫이었던 연잎을 입에 물고 있는 오리는 지금 삼성미술관 리움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마도 손재형을 통해 인연이 된 듯 싶다.

 

김찬영의 집에 늘 걸려 있던 ‘완당’ 낙관이 찍힌 추사 김정희의 휘호 ‘다반향초’는 지금 미국에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버지 컬렉션 가운데 가장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는 작품은 추사(완당) 김정희의 글씨이다. 추사의 <다반향초>(茶半香初) 작품은 원작과 함께 목각 현판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서화 컬렉션 가운데 추사 작품이 가장 많았다. 그만큼 추사를 좋아했고, 서예를 중히 여겼다. ‘다반향초’는 집안에 늘 걸려 있었다. 나는 ‘차가 절반쯤 마시면 향기가 난다. 즉 인생도 오래 사귀면 향이 난다’로 이해했다. 하지만 언젠가 조심스럽게 아버지에게 그 뜻을 물었더니, ‘차를 마시다 절반쯤에 향을 피운다’라고 직설적으로 풀이해주셨다. 다도와 함께 향도(香道)도 있다는 뜻이었다. 이 시구절은 가지각색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차를 반이나 우려 마셔도(다반) 그 향기는 처음처럼 유지된다(향초)는 해석도 있다. 황산곡 작품으로 전문은 이렇다. ‘정좌처다반향초(靜坐處茶半香初) 묘용시수류화개(妙用時水流花開). 고요히 앉아 차를 마시는데 반쯤 마셔도 향기는 처음 그대로이고, 슬슬 거니니 물이 흐르고 꽃은 저절로 핀다.’ 이런 번역도 눈길을 끈다. ‘다반향초’는 어떤 인연인지 현재 미국의 지인이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가세가 기울어 소장품을 처분할 때도 있다. 일본인이 거금을 내세워 명품 양도를 요구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고구려 금동불상이다. 하지만 외국으로 넘길 수 없어 아버지는 거간꾼 최아무개씨를 통해 간송 전형필에게 양도했다. 깎아준 금액이었는데도 기와집 여러 채 값이라고 전해들었다. 그만큼 명품 중의 명품이었던 것이다.”

 

간송미술관 소장 고구려 불상이라면, ‘계미명 금동 삼존불 입상’일지 모르겠다. 이 삼존불은 북위(北魏) 양식으로 계미(癸未)라는 연호를 가지고 있다. 당당한 광배에 주존불과 협시보살의 전형적인 삼존불 불상이다. 1962년 ‘국보 제72호’로 지정되었다. 미소를 살포시 띠고 고개를 숙인 본존의 모습이 가히 명품이다. 이 불상의 원소유자가 김찬영이었다면 한국 불상 전래의 역사 혹은 골동품 유전(流轉)의 역사에 흥미로운 사례로 기록될 만하다.

 

김찬영의 말년은 그렇게 행복하지 않았다. 박병래는 그의 <도자여적>(陶瓷餘滴)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해방 후 김씨는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아주 비운에 빠지게 되었다. 부족한 것을 모르고 지내던 그가 별안간 몰아닥친 가난과 함께 몸이 불편하니 옆에서 보는 사람 역시 딱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5만여원이란 거금을 주고 산 연적을 잃고 언어가 부자유스러운 가운데 나를 붙잡고 눈물짓던 일이 생각난다. 그 연적은 수구가 있는 곳에서 개 한 마리가 한쪽 다리를 들고 귀를 긁는 시늉을 하고 있는 아주 보기 힘든 물건이었다. … 연적과 함께 적잖은 가산마저 슬슬 빠져나가고 병고에 시달리게 되니 김찬영씨의 말로는 한결 애처로워 보였다. 더욱이 6·25사변이 일어나기 여러 해 전에 세상이 떠들썩하던 회현동 권총강도 사건의 피해자가 김씨의 부인이었으니 한층 충격이 컸을 것이다.”

김찬영의 서울 부인이자 김병기의 서모는 빼어난 미인으로, 파인 김동환이 발행한 대중잡지 <삼천리>(1935년 11월호)에서 ‘서울의 대표적 미인’으로 꼽을 정도였다.

사실 김찬영의 서울 부인(정충실)은 장안 최고의 미인으로 소문나 있었다. 장교동에서 산다고 해 ‘장교 미인’이라고 불렸다. 대중잡지 <삼천리>(1935년 11월호)는 ‘서울의 대표적 미인은 누구누구인가’ 주제로 ‘현대 장안호걸 찾는 좌담회’를 실었는데, 미인으로 여성주의 운동가 송계월, 양명의 부인 조원숙, 근우회의 김정원, 문학가 김명순, 미국 유학생 출신 박인덕 등을 열거하다, 극작가 이서구가 이렇게 발언했다. “딴말이지만 숨은 미인은 김찬영 마누라야. 변호사 김찬영 말고, 영화배급 하던 김찬영이 말이야. 미인이지. 고향이 진남포라는.”

 

김병기의 증언도 마찬가지다. “돈 많은 남편은 골동을 사고, 부인은 보석을 산다는 말이 있던 시절이었다. 서모는 보석을 좋아했다. 서울 장안에서 제일 비싼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있었다. 이 소문이 퍼져 1947년 봄 어느 날 권총강도가 회현동 집에 들어와 피살당했다. 그때 아버지는 중풍으로 반신불수 상태였다. 이 소식을 장인이 해주의 나와 형님에게도 전해주어 그 다음날 바로 내가 월남을 하게 됐던 것이다. 홀로된 아버지와 더불어 골동품을 모시기 위해서였다. 그때야 생전 처음 우리 부부는 아버지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서모는 진남포 출신으로 빼어난 미인으로 소문났다. 해주에서 간호사로 일했는데, 그때 무슨 일로인지 입원했던 아버지와 인연이 됐나 보더라. 백계 러시아 계통의 미인처럼 하얀 피부가 돋보였다. 아마도 아버지의 모사화인 듯싶은데, 영국 라파엘 전파의 로세티 작품을 연상시키는 작품, 즉 머리 빗는 여인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집에 있었다. 뒤에 보니 그림 속의 얼굴이 서모하고 같은 모습이었다. 서모는 최고의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 때문에 불행하게 이승을 떠났다.”

 

회현동 권총 떼강도 사건은 장안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진짜 흔든 것은, 그러니까 김찬영의 컬렉션을 뒤흔든 것은 전쟁이었다.

 

“1950년 9월 인민군 치하 때 명륜동 쪽에 숨어 지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직후 거리에 나서보니 창경원 부근에서 온통 초록색 군복 차림의 국군과 미군의 행군행렬이 보였다. 자칫 ‘공산당’처럼 보이면 총을 맞을 수 있는 위험한 때였지만, 급히 후암동 본가로 달려갔다. 거리는 시체투성이였는데, 사람 형태는 보이지 않고 무슨 기름걸레처럼 보였다. 처참했다. 집에 도착하니 온통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지하 비밀 창고에 골동품을 가득 보관하고 있었는데, 이 무슨 변괴인가. 서화는 이미 재가 되었고, 고려청자가 녹아 흘러내리고 있었다. 전소(全燒),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집도 없어졌지만 평생 모은 민족의 미술품이 전부 사라진 것이다. 아버지의 분신이 없어진 것이다. 가회동 누이 집에 있다가 달려온 아버지는 단장을 치면서 통곡했다. 일생을 모은 민족의 보배가 한순간에 재가 됐기 때문이다.”

 

김찬영의 컬렉션은 그렇게 사라졌다. 기왕에 타인에게 양도했던 명품이 그나마 살아남는 역설을 남겼다. 김찬영과 가깝게 지냈던 창랑 장택상의 컬렉션도 전쟁의 악몽을 피하지 못했다. 그처럼 미술품 수장은 독특한 매력과 영욕을 남긴다.

 

“미술은 민족적으로 사수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광영을 자랑하자면 미술이 아니고는 증거할 수 없다. 우리는 그나마 수중에 남아 있는 미술품도 인식 부족으로 다 버리고 말았다. 참 비참한 사실이다. … 다른 사업도 필요하지마는 우리 정화의 결정품(結晶品)을 보존하자. 조선 미술의 구세주가 다시 나지 않을까. 학수(鶴首)고대한다. 우리 실력으로 지금이라도 자각만 한다면 많은 미술품을 수장할 수 있다. 유지자(有志者)여, 한 번 생각을 다시 하여 보자. 섬씽 이즈 베터 댄 너씽(Something is better than Nothing)이 우리의 모토이다.”(장택상, <동아일보> 1934년 6월21일)

 

구술·집필 윤범모/동국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