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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한(李明漢. 1595∼1645)의 시고(詩稿)

푸른하늘sky 2019. 5. 15. 23:10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문신인 이명한(李明漢. 1595∼1645)의 시고(詩稿)
<크기> 21.3×32m
<참고> 이명한(李明漢.
1595(선조 28)∼1645(인조 23).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천장(天章), 호는 백주(白洲). 좌의정 이정구(李廷龜)의 아들이다. 1610년(광해군 2)사마시에 합격하고, 1616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전적·공조좌랑에 이르렀는데, 앞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여 파직되었다. 그뒤 병조좌랑·교리 등을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에 제수되고, 이어 이조좌랑이 되어 어사로 관동(關東)에 나가 이정(吏政)과 민막(民瘼)을 살피고, 다시 옥당(玉堂)에서 근무하다가 이조로 옮겨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면서 승문원제술관(承文院製述官)·한학교수(漢學敎授)·교리·사국수찬(史局修撰) 등을 겸대하다가 이조정랑이 되었다.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공주로 호종하여 이식(李植)과 함께 팔도에 보내는 교서를 지었다. 이어 응교·사간에 승진된 뒤 검상(檢詳)·사인(舍人)·집의·이조참의로 승진하고, 다시 호당에 사가독서를 허락받고 승문원부제조가 되었다. 그뒤 병조참의·우승지·형조참의·좌승지·남양부사·대사간·대사성·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639년(인조 17) 도승지 등을 거쳐 1641년 한성부우윤·대사헌이 되고, 이해 도승지로서 홍문관·예문관의 양관 대제학,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43년 이경여(李敬輿)·신익성(申翊聖) 등과 함께 척화파로 지목되어 심양(瀋陽)에 잡혀가 억류되었다. 이듬해 세자이사(世子貳師)가 되어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를 환행하기 위하여 심양에 가서 소현세자와 함께 돌아왔으며, 1645년에 명나라와 밀통하였다는 자문(咨文)을 썼다 하여 다시 청나라에 잡혀갔다가 풀려나와 예조판서가 되었다. 아버지 정구, 아들 일상(一相)과 더불어 3대가 대제학을 지낸 것으로 유명하다. 병자호란 때 심양까지 잡혀갔던 의분을 노래한 시조 6수가 전한다. 저서로 《백주집》 20권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