閑雲野鶴

간송미술관과 전형필

푸른하늘sky 2019. 8. 26. 01:32

간저송(澗底松)

百尺大十圍(유송백척대십위)-백 척 되는 소나무 굵기만도 열 아름

坐在澗底寒且卑(좌재간저한차비)-냇가 아래 자리 잡아 한미하고 비천하다

深山險人路絶(간심산험인로절)-냇가 깊고 산은 험해 사람 자취 끊기어

老死不逢工度之(로사불봉공도지)-죽기까지 목수의 마름을 못 만났네.

天子明堂欠梁木(천자명당흠량목)-천자(天子)의 명당에 대들보가 부족해도

此求彼有兩不知(차구피유양불지)-제 있는 것 예서 찾아 서로 알지 못하네!

백거이(白居易)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선생의 호()가 여기서 나왔다.

간송(澗松)의 뜻은

냇가의 소나무는 덕과 재주가 높은데도 지위는 낮은 사람을 비유하는 의미다.

인품은 높고 덕은 많으나 겸손하고 자기를 낮추는 의미다.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국보제 70호인 훈민정음(訓民正音) 해례본(解例本)을 입수한 과정.

 

먼저 훈민정음(訓民正音) 해례본(解例本)을 간단히 설명한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은 총 33장으로

해례본(解例本), 예의본(例義本)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훈민정음하면 해례본(解例本)말하는 것이다.

 

예의(例義)-세종이 직접 지은 것으로 한글을 만든 이유와 한글의 사용법을 간략하게 설명한 글이다.

모든 글자는 합하여 음()을 이룬다처럼 한글의 사용법을 간략하게 설명한 글

예의(例義)구성되어 있다.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짜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세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아니하여서)

우리가 학생시절 외운 이 유명한 구절이 바로 세종대왕이 직접 쓴 서문을 한글로 풀이한 예의(例義)내용 이다.


해례(解例)-성삼문 박팽년 등 세종대왕을 보필했던 8명의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의 자음(子音)과 모음(母音)이 어떻게 만들어 졌으며, 발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한글의 쓰임새를 상세하게 설명한 글이다.

다섯 해설(解說)”과 하나의 예시(例示)”가 실려 있어서 해례(解例)”라고 부른다.

 

국보제 70호인 훈민정음(訓民正音) 해례본(解例本)을 입수한 과정.

1937년 일본은 만주를 침략하고 중일 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은 아시아 대부분을 장악한 후 1941127일 진주만을 공습함으로써 미국과

전쟁을 확대 시켰다.

 

일제(日帝)는 전시체제를 강화하고 조선인의 민족의식과 저항의식을 잠재우기 위해서 특단의 압박 조치를 취한다.

식량배급제가 강화되고 일제의 식량 공출과 수탈이 혹독해져 식량이 부족하게 되었다.

지방의 양반집에서 가지고 있던 문화재급 서화(書畵)들이 서울의 간송이 운영하는

한남서림(翰南書林)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일제의 횡포가 얼마나 간악했고 힘들었으면 가보(家寶)를 시장에 내놓았겠는가?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우리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라고 배웠다.

 

일본과 미국과의 전쟁은 태평양까지 확장되었다.

194212월 일본어 사용에 반대하여 한글을 연구 학술단체의 임원 33인을 투옥시킨 조선어학회사건이 발생한다.

 

이 무렵 조선역사의 문화재와 학문적 성과 중 하나가 바로 훈민정음 언해본(諺解本)발견이었다.

훈민정음 언해본(諺解本)은 훈민정음 서문(序文)과 예의(例義)를 한글로 풀어 쓴 것이다.


일제는 훈민정음 언해본(諺解本),

“18세기에 만들어진 위작(僞作)”이라는 등 언해본 자체를 가짜라고 몰아갔다.

훈민정음 자체를 인정 안하는 것이다.

 

반면에 뒤로 일제(日帝)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을 찾느라 혈안이 되었다.

해례본(解例本)을 없앤다면 조선 세종대왕의 한글창제의 신화는 물거품이 될 수 있으며 조선의 정신을 담는

한글의 뿌리와 기원을 허구화 시킬 수 있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일본이 훈민정음 해례본을 없앴다면 오늘날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역사는

증명할 수 없는 것이다.

 

당시 간송 전형필 선생이 경영하는 한남서림은 골동의 거간뿐만 아니라 조선 출신

지식인들의 모임 장소였다.

  

이 사람들 중 김태준(金台俊)이라는 당대 천재 국문학자가 있었다.

어문학에 조예가 깊고 학문의 수준이 매우 높았다.

경성제대(지금의 서울대학)에서 국문학 강의를 했고 따르는 제자도 많았다.

어느 날 김태준은 제자인 이용준(李容準)으로부터 자기 집 가보로 훈민정음 해례본을 가보로 내려와 보관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용준(李容準) 가문은 세종 때 조상이 여진 토벌에 공을 세워 해례본을 하사받았다는 것이다. 김태준은 우선 간송을 만나서 해례본에 대한 정보를 귀띔하였다.

해례본을 사려면 1000원은 족히 들어야 한다는 말도 했다.

1000원은 당시 큰 기와집 한 채 값에 해당하는 큰돈이었다.

간송 전형필은 위험을 무릅쓰고 구입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일본이 알면 훈민정음 해례본도 빼앗기고 바로 죽음이 따르는 위험이다.

 

그 무렵 사회주의자였던 김태준(金台俊)은 반역으로 일본 헌병에 체포되었다가

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감시망이 강화되었다.

조선의 명사(名士)인 간송 전형필 역시 세간(世間)의 눈과 일제의 감시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런 사회분위기 속에서도 전형필은 충직한 문화재 중개상인 거간(居間) 이순황(李淳璜)통해 어렵사리

훈민정음 해례본의 진품여부를 확인하였다.

 

간송은 준비한 1000원을 최초 제보자 김태준(金台俊)에게 사례비로 주었다.

그리고 훈민정음 해례본의 값으로 일만 원으로 주었다.

훈민정음 해례본 주인이 1000원을 요구하는데 열배인 1만원을 준 것이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반드시 해례본을 찾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당시 아무리 값비싼 문화재급 서책이라도 일백 원을 넘지 않는 것이 상례였다.

 

일천원 거액을 사례비로 받은 김태준의 가슴도 떨렸을 것이다.

김태준(金台俊)은 해례본이 있는 경북 안동의 이용준(李容準)의 주소를 알려주었다.

간송의 지시를 받은 이순황(李淳璜)은 즉시 안동으로 달려가 해례본을 품 안에 넣었다.

목숨을 건 드라마틱한 순간이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해례본 내용은 총 333

1부는 47면으로 훈민정음 본문이

2부는 해례를 2651면으로

3부는 정인지의 서문을 36면으로 싣고

마지막에 정통 11(1446) 9월 상한(上澣)으로 적시되어 있었다.

그것은 세종실록에 언급된 사실과 정확히 일치했다.

 

간송은 광복후 보화각(葆華閣 간송미술관 처음 이름)으로 조선어학회 간부들을 초대해 해례본의 존재를 공개하고

한글연구를 위한 영인본(影印本)제작을 발표한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영인본(影印本)1946년 조선어학회본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간송과 간송미술관의 도움으로

만들어졌다.

 

그로부터 한글의 창제 원리와 한글의 역사적 배경이 하나둘씩 밝혀지게 된다.

1962년 간송이 서거(逝去)한 후 같은 해 12월 해례본은 국보 제 70호로 지정된다.

그리고 199710월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재된다.

(위의 내용은 간송미술관의 자료이다)

 

아래 사진은 서울 도봉구 방학동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선생의 고택(古宅)이다.

기둥에 있는 주련(柱聯)의 글씨는 추사 김정희 글씨다




 

大烹豆腐瓜薑菜(대팽두부과강채)-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

高會夫妻兒女孫(고회부처아녀손)-최고 좋은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 모임

春風大雅能容物(춘풍대아능용물)-봄바람 같이 크게 부드러워 능히 만물을 포용하고

秋水文章不染塵(추수문장불염진)-가을 물같이 차고 맑은 문장은 속세의 먼지에 물들지 않는다

萬樹琪花千千圃藥(만수기화천천포약)-만그루는 기이한 꽃이요 천이랑은 작약밭이다.

 


고택(古宅)의 이름은 옥정연재(玉井硏齋)”

옥정(玉井)우물에서 퍼 올린 구슬 같은 맑은 물로 먹을 갈아서 글씨를 쓰는 집

이라는 뜻이다.

이 편액(扁額) 글씨는 조선 최고의 문화재 감식가이며 3,1운동 33인중 한사람이며

서예가인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선생이 썼다.

  

옥정(玉井)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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