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원(蕙園) 신윤복:
조선 후기의 생활상과 멋을 은은하게 표출한 조선 말기 화풍의 선구자
신윤복(申潤福) (1758 ~ ?)은 조선후기 풍속
화가로 그에 대한 문헌상의 기록은 몹시 희귀하여 관찬문서나 개인문집류에서 찾아보기가 어려우나 그에 관한 기록과 연구를 종합하면 신윤복 부자
(父子) 모두 회화를 관장하는 국가기관인 예조 산하의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이라는 것과 첨사(僉使)벼슬을 한 혜원은 너무 비속한 그림을
그려 도화서에서 쫓겨난 후 직업화가로서의 길을 걸었을 것이라는 등의 내용을 알 수가 있다.
단원 김홍도, 긍재 김득신, 오원 장승업과 더불어
조선 4대 풍속화가로 손꼽힌다.
신윤복의 풍속화는, 사회 각층을 망라한 김홍도의
풍속화와 달리, 도회지의 한량과 기녀 등 남녀 사이의 은은한 정을 잘 나타낸 그림들로 동시대의 애정과 풍류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신윤복은
남녀간의 정취와 낭만적인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섬세하고 유려한 필선과 아름다운 채색을 즐겨 사용하여 그의 풍속화들은 매우 세련된
감각과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인물화에 있어서는 대체로 얼굴이 갸름하고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형태로, 때로는 머리카락 하나까지 그려낼 정도로 섬세하고 유연한 선을 사용했다. 또한 그는 중국과 서양 상인을 통해 들어온 안료들을
이용하여 붉은 색, 파란 색, 노란 색 등 그림에 다양한 색채를 입히기도 했다. 신윤복의 풍속화들은 배경을 통해서 당시의 살림과 복식 등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등, 조선 후기의 생활상과 멋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혜원의 그림에는 젊음이 있고 은은한 남녀의 정이 깔려
있다. 그림의 주제가 선명하여 보는 이에게 내용 전달이 직선적이다. 오늘날에 보기에도 낯 붉어질 내용들도 없지 않으나 , 화가는 천재성을
발휘하여 승화된 아름다움으로 이를 고양시키고 있다. 농염한 중에도 절제가 있고 과감한 노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자연스레 보이게 하는 구도의
묘가 있다.
그는 산수·인물·동물 등 여러 분야에 두루 능한
직업화가이지만, 시문에도 조예가 있고 서예에도 뛰어 났으며 그가 추구한 그림세계는 진경시대 문화의 낭만상을 생생하고 감동적으로 전해준다.
신윤복의 작품에는 남녀간의 애정을 그린 것 이외에도
무속(巫俗)이나 주막의 정경 등 서민사회의 풍모를 보여주는 순수한 풍속화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으며, 산수화는 담묵(淡墨)과 담채(淡彩)를
주로 사용해 참신한 감각의 분위기를 표현하는 등 조선 말기 이색화풍의 대두에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국보 제135호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탄금(彈琴)》 등 6점으로 된 화첩과 더불어 조선 여인의 아름다움을 잘 드러낸 초상기법으로
그린 《미인도(美人圖)》가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오원(吾園) 장승업:
전통화법을 총 결산한 조선 최고의 화가
조선 말기의 천재 화가 오원 장승업(1843~97).
중세적 전통 세계에서 근대 세계로의 변환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하던 1870~90년대의 개화기 화단의 최고봉으로 손꼽혔다. 장승업은
1843년 중인가문의 대원(大元) 장(張)씨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잃고 이응헌(李應憲)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다. 주인 아이들의
어깨너머로 글과 그림을 배우던 중, 중국의 명화(名畵)들을 구경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신들린 듯 그림을 능숙하게 그리게 되는 천재성을 발휘했다고
한다. 이러한 장승업의 재질일 알아 본 이응헌의 덕분에 장승업은 그림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놀라운 기량과 넘치는 신운(神韻), 그리고 왕성한
창작력으로 장승업의 명성은 날로 높아졌고, 마침내 때문에 그의 명성이 궁중에까지 알려져 고종의 어명에 의해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성품이 호탕하고 어느 것에도 얽매이기 싫어하는
성격으로, 술을 매우 좋아하여, 몹시 취하여야만 좋은 그림이 나왔다고 하는 장승업 작품은 강렬한 필법과 묵법, 그리고 과장된 형태와 특이한
설채법이 특징으로 필치가 호방하고 대담하면서도 소탈한 맛이 풍긴다.
장승업은 당시 조선시대 말기 화단의 형식화된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 내면세계표출에 치중한 문인중심의 화풍) 뿐만 아니라 잊혀졌던 북종화풍(北宗畵風 ,진한 채색과 사진처럼 꼼꼼한
외형묘사에 주력한 전문화가 중심의 화풍) 및 당시 새로 수입된 최신 유행의 중국화법까지 받아들이면서 종합 절충하여 전통 화법의 총 결산을 이루는
업적을 달성한다.
장승업은 그림의 각 분야에서도 당대를 대표하는 양식을
확립하여 후대의 커다란 모범이 되었으며, 그가 그린 다양한 작품들은 당대 및 후대의 전형이 되었다.
산수화에서는 수많은 전통적 양식을 절충하여 동양적
이상향의 모습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였고, 인물화에서는 진정한 초월적 인간상을, 또 꽃과 새와 강아지나 고양이 등, 털이 있는 짐승을 함께 그린
화조영모화(花鳥翎毛畵)에서는 다양한 소재를 기운 생동하는 필묵법으로 소화해 내었다. 그의 기명절지화(器皿折枝畵)는 그릇과 화초 따위를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서양의 정물화와 비슷하지만, 서양의 정물화는 어떤 특정 대상을 관찰하여 묘사한 것으로 대개 사실적이며 정적(靜的)인 반면, 그의
기명절지화는 소재의 형태를 임의로 변형시키고 붓질을 과감하게 함으로써 활기 찬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그 성격을 달리 한다.
문기 어린 격조보다는 뛰어난 기량으로 평가 받는 그는
안견(安堅), 김홍도(金弘道)와 함께 조선시대의 3대 화가, 또는 정선(鄭敾)을 추가하여 4대 거장으로 꼽히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대화가(大畵家)이다.
예술을 향한 순수한 열정을 구현한 장승업의 생애와
예술은 현대에 있어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즉 투철한 예술혼이 없는 외형적 양식 추구가 과연 진정한 예술이 될 수 있을까, 예술가의 인생
자체와 융합되지 않은 예술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까라는 문제 제기에 대한 해답을 바로 장승업 자신의 생애와 작품으로써 해 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