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함은 불교경전을 보관하기 위해 고려시대에 만든 함입니다. 몸체는 직사각형 상자 모양이며 뚜껑 윗부분은 네 모서리를 모죽임하여 경사지게 만들었습니다. 표면은 흑칠을 하고 작은 자개로 만든 모란넝쿨무늬[牡丹唐草文]로 장식하였습니다. 각 면의 진한 고동색 테두리는 후대(後代)에 보수를 위해 칠을 한 흔적입니다. 함의 내부는 붉은 칠[朱漆]을 하였습니다.
경전함 - 불심(佛心)을 담은 함
고려는 왕실에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불교를 숭상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크고 작은 각종 불사(佛事)가 이루어졌고 더불어 많은 불교 경전을 펴냈습니다. 더구나 거란, 몽골 등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부처님의 공덕(功德)으로 국난(國難)을 극복하기 위해 나라의 평안을 비손하면서 대장경(大藏經)을 펴냈습니다. 이때 불경(佛經)을 넣을 경전함도 함께 만들었을 것입니다.
고려시대 경전함은 원(元)의 요구에 따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1272년, 고려 원종(元宗) 13년에 원 황후(皇后)가 고려에 대장경을 요구하자 이를 보관하는 경전함을 만드는 임시 관청인 전함조성도감(鈿函造成都監)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대규모 불경 간행 사업을 미루어 볼 때 경전함 역시 대량으로 만들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 전하는 나전 칠 경전함은 모두 9점뿐입니다. 단독 국화꽃무늬가 규칙적으로 배열된 것 1점, 주 무늬가 국화넝쿨무늬[菊花唐草文]인 것이 6점, 모란넝쿨무늬인 것이 2점입니다. 대부분 형태나 크기, 주 무늬 표현, 제작 기법 등에서 거의 차이가 없기 때문에 전함조성도감과 같은 국가기관에서 동일한 장인들이 만들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나전으로 장식한 경전함
나전(螺鈿)은 전복이나 소라와 같은 조개껍데기의 안쪽 면을 얇게 갈아내고 무늬대로 오려내어 장식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나전(螺鈿)이라는 한자어 말고도 ‘자개’라는 순 우리말을 사용할 만큼 전통 공예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경전함은 자개와 금속 선(線)을 사용하여 만든 모란넝쿨무늬로 표면을 장식하였습니다. 모란꽃과 잎 무늬는 자개로 만들었습니다. 모란꽃의 가운데는 끝부분이 세 갈래로 갈라진 보주(寶珠) 모양을 배치하였는데 아마도 꽃술을 표현한 듯합니다. 그 양 옆으로는 끝이 갈라진 꽃잎이 4개씩 있습니다. 무늬 하나하나를 잘라내는 주름질 기법으로 표현한 모란꽃은 무려 450여개나 됩니다. 모란꽃에 연결된 줄기에 달린 잎은 여러 형태지만 세 갈래로 갈라진 형태, C자 형태 두 종류가 대부분입니다. 이렇게 구성된 모란넝쿨무늬는 옆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칠로 보수한 테두리 부분은 아래에도 자개 장식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두 두 종류인데 하나는 원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선이 뻗어나가 서로 연결되는 마엽문(麻葉文)입니다.
숨어있는 또 하나의 무늬는 귀갑문(龜甲文), 곧 거북등무늬와 같은 육각형 무늬로 함 몸체 아래를 꾸몄습니다. 마엽문이나 귀갑문은 모두 자개를 가늘게 잘라 무늬를 표현하는 끊음질 기법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경전함 장식에는 자개뿐만 아니라 금속도 썼습니다. 우선 모란꽃과 모란꽃을 이어주는 줄기는 외줄[單線] 금속을 사용하였습니다. 엑스레이(X-ray)로 확인된 줄기의 흐름을 보면, 넝쿨무늬의 흐름을 더욱 자연스럽고 율동적으로 표현하기에는 자개보다 금속선이 더 적당했을 것입니다. 또한 무늬와 무늬 사이의 경계와 혹은 함의 바깥 부분에도 금속선이 있습니다. 이 부분의 금속선은 두 개의 단선(單線)을 새끼줄처럼 꼰 형태로, 나란히 두 줄로 배치하여 마치 화살 깃과 같은 모양입니다. 이렇게 자개와 함께 금속을 사용한 것 역시 고려 나전칠기의 대표적 특징이기도 합니다.
제작 과정의 특징
칠이 벗겨져 바탕이 드러난 부분을 자세히 보면 직물 조직이 드러납니다. 본격적으로 칠을 하기 전에 나무 바탕에 베를 바르는 과정을 '베싸개'라고 하는데, 이렇게 하면 그릇의 형태를 견고하게 잡아주고 습도 변화로 나무가 변형되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나전칠기에서는 주로 고급품 만들기에 쓴 방법입니다. 간혹 고려시대 나전칠기에서 비단을 사용한 예도 있습니다.
그 다음에 칠을 바르고 자개를 붙인 뒤 그 위에 칠을 하고 자개에 덮인 칠을 벗겨내고 다시 전면(全面)에 칠을 하는 과정을 많게는 수십 번 반복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나전의 재료로 전복을 이용하였습니다. 이 경전함에 사용된 나전의 두께는 0.3~0.8mm 정도의 매우 얇습니다. 그리고 무늬 하나의 크기는 채 1cm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매우 작습니다. 이는 고려시대 나전칠기의 또 하나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단단하면서도 툭툭 부러지는 성질의 자개는 어떻게 잘라냈을까요? 현재 자개를 오려낼 때 사용하는 실톱은 1900년대 이후 일본에서 들어왔다고 합니다. 이전에는 무늬 외곽선을 바늘이나 송곳으로 촘촘하게 뚫어 무늬를 떼어 내고 둘레의 거친 부분을 다듬거나 가위로 잘라낸 것으로 보입니다. 이 작업이 좀 더 수월하도록 자개를 찻물이나 식초 물에 담가 부드럽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방법은 주름질로 무늬를 만들 때 사용합니다.
마엽문이나 귀갑문과 같은 무늬는 끊음질 기법을 사용했습니다. 주름질과 마찬가지로 식초 물에 자개를 담가두었다가 실처럼 가늘고 길게 잘라내 상사(祥絲)를 만듭니다. 그리고 무늬에 맞추어 자개를 짧고 길게 끊어 칠을 한 표면에 붙이게 됩니다. 이 나전칠기에 사용된 끊음질 기법은 비교적 간단한 방법이지만 조선 후기에는 상사를 자유자재로 이어 붙여 산수(山水) 풍경 같은 회화적인 표현까지 가능하였습니다.
“세밀하고 정교하니 귀하다고 할 만하다.”
1123년 고려를 방문한 송(宋)의 사신(使臣) 서긍(徐兢)이 고려 나전칠기를 보고 한 말입니다. 고려는 귀족계층이 정치 사회의 중심인 시대였습니다. 이에 따라 귀족 취향을 반영한 화려한 문화가 조성되었고 특히 공예 분야에서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이중에서도 나전칠기는 청자, 불화(佛畫)와 함께 고려 미술을 대표하는 분야로 지금도 그 예술적 가치를 높이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고려시대 나전칠기는 20여 점 정도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경전함은 채 1cm도 되지 않는 작은 무늬에 가느다란 선각(線刻)으로 세부를 표현하여 정교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매우 작은 무늬를 촘촘하게 반복적으로 배치하여 규칙적이고 율동적인 느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송의 사신 서긍이 이와 같은 경전함을 보고 고려 나전칠기를 극찬하였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모두 2만 5천여 개의 작은 자개조각을 사용한 이 경전함은 고려 나전칠기 더 나아가 고려시대 공예미술의 정수(精髓)를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하겠습니다.
* 국립중앙박물관(황지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