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詩한

삐딱구두 / 이정록

푸른하늘sky 2019. 2. 14. 14:45



삐딱구두 / 이정록

뭔 일 저질렀나?
늦기는 해도 외박은 없던 양반인데 말이여.
일이 손에 안 잡혀. 물동이를 이어도 똬리가 쪽머리에 걸치고
고추 순을 집어도 가지째 꺾어대야. 아니나 다를까 저물녘에
개똥참외처럼 노란 택시 한 대가 독 오른 복어처럼 들이치더구나.

반가운 마음하고 속상한 마음을 썩썩 비벼서 한마디 쏴붙이려는데
삐딱구두에 명태알 같은 스타킹이 택시 뒷문에서 나오는 거여.
먼저 내린 아버지가 양산을 펼쳐주며 눈꼬리에 은방울꽃을 매달더구나.

들고 있던 연장을 휘둘러도 시원치 않을 판에 내가 뭔 죄를 졌다고
땀 닦고 치마에 검불을 떼어내며 머리를 조아렸는지 몰라.
아버지가 누추한 내 몰골에 혀를 차더니, 작은댁 출출할 테니
조기 굽고 닭 잡아서 뚝딱 밥상 차리라고 으름장를 놓더구나.

머리로는 쥐약에 살충제를 간간하게 섞어서 국 끓이고
된장 독 구더기만 꺼내다가 호박전을 부쳐주고 싶었다만
이 악물고 소찬이나마 정갈하게 한 상 차려 올렸지.

뭔 구경났다고 빡빡머리 새끼들은 어미 입성 한번 보고 그 쪽 한번 보고
그 양반은 애들 차례로 불러 동전닢 뿌리며
구정물에 양조간장 치듯 싱긋싱긋 웃어대는데 환장하겠더라.

숟가락 놓자마자 삐딱구두를 툇마루 옆 토끼장으로 불렀지.
토끼가 먼저 울었는지 붉은 눈으로 쳐다보더구나.

앞길이 창창한 마지기고 밭도 몇 뙤기 있으니 밥은 굶지 않을거여.
종갓집이니 제사와 시제는 당연하고 한식 차례도 잘 부탁하네.
내가 밭이 성해서 삼남 이녀 골고루 뒀으니 후손은 걱정 말게.
이미 들었겄지만 시어머님이 두 분이니 공경심이 곱으로다 필요할 거여.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 있으니 꼭 들어줬으면 하네.
자네는 이제부터 농사짓고 밥하고 빨래하며 살아가야 할 테니
그 필요 없는 삐딱구두와 양산은 나에게 선물로 줌세.
나도 고것만 있으면 읍내 제일은행원도 사귈수 있겄구먼.

어뗘? 빛바랜 양산과 구두 한 켤레를 비싼 논밭하고 맞바꾸면
괜찮은 거래 아닌감? 내가 말의 시치미도 거둬들이질 안 했는데
바깥마당으로 나가서 기다리던 택시에 겨들어가더라고.

한 시간 안에 저 여우를 다시 태우고 나가게 될 거라고
택시 기사와 내기를 걸었거든. 돈을 걸었지만 어떻게 받겄어.

삼십 년도 더 지난 얘기여. 지금 읍내 제일은행에 손녀가 다니는데
들를 때마다 나 혼자 머쓱하고 불콰해지고 그랴.
그때 삐딱한 인연을 바꿔치기했으면 어찌 됐을까, 하고.


                - 이정록 시집 <어머니 학교>















Edward Simoni / Feuer Tan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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