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學笛

정여립

푸른하늘sky 2018. 1. 2. 15:55
"천하는 공물" 모악산 자락 제비산서 혁명 꿈꿔



.모악이 낳은 역사상 인물로 정여립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정여립은 그 출생에 관한 사실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태어난 시기도 불분명하고 출생지도 전주 동문 밖 또는 남문 밖이라는 설만 나돈다.
모악산의 지맥인 제비봉 아래 지금의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동곡마을이 그가 태어난 곳이란 설도 있다.
역사적으로 정여립의 모반 사건은 전라도에 대한 편견의 한 이유처럼 거론됐다.

정여립이 죽은 뒤 전라도를 반역향(反逆鄕)이라 하여 호남인의 등용을 일시 제약, 차별하게 되었다는 지적과 함께
전주시사(1986년 간행)는 이 사건이 “전라도를 반역향으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기록할 정도이다.
이런 사건의 출발이 모악산 언저리와 관계있음은 흥미롭다.
모악산은 계룡산과 함께 남한 2대 신흥종교 발상지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특히 동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보이는 증산교의 창시자가 이곳에서 도를 얻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정여립의 출생지란 설이 있는 동곡마을은 증산 강일순이 깊은 인연을 맺었던 오리알터와는 지척지간이다.
또 금평저수지에서 바라본 제비산과도 마주친다. 해발300m인 제비산은 모악산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으며
정여립이 혁명을 꿈꾸며 머물던 생거지가 있었다. 제비산 중턱에선 조선중기의 기와조각이 발굴되기도 했다.
기축옥사 때 제비산은 조선왕조에 의해 파괴됐으며 ‘역모의 땅’이라 해 건물이 들어선 적이 없었다.
정여립의 집자리 근처는 지금 월명암이란 암자가 차지하고 있다.
정여립의 제비산 집터는 역모 사건 후 당시 조정에서 땅을 헤어치고 숯불로 혈맥을 끊어버렸다고 한다.

정여립은 어릴 때부터 늠름하고 통솔력이 뛰어났으며 1570년 과거급제 해 예조좌랑과 홍문관 수찬(정6품)을 지냈다.
처음엔 서인으로 이이문하에 있다가 이이가 죽은 후 동인에 가담하게 된다.
선조의 눈밖에 난 정여립은 중앙에서 관직을 얻지 못하고 고향에 내려와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지어 강론을 하면 세월을 보낸다.

이들의 수가 많아지자 정여립은 대동계를 조직했다. 대동계는 반(班), 상(常), 노(奴) 제한 없이 계원이 될 수 있고
조직의 범위도 광역적이 됐다. 그 뒤 대동계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고 세력들을 규합해 거사를 위한 준비를 진행했다. 그러나 기밀이 누설되고 관련자들의 토벌이 시작됐는데 이것이 곧 기축옥사이다.
황해도 관찰사 한준과 재령군수 박충간이 선조2년 정여립이 황해도와 호남에서 서울에 진격한다고 고변하고
조정에서는 선전관과 의금부 도사를 전라도에 파견한다.정여립은 진안의 죽도로 도망했으나 결국 자살했다.
정여립의 자살로 역모는 사실로 굳어지고 수많은 동인세력들이 죽음을 당한다.

이 사건에 대한 당시 동인과 서인의 의견이 대립된 것도 흥미롭다.
서인들은 모반이 실재했다고 ‘선조수정실록’에 기록했고,
반면 송익필형제가 날조한 사건이라는 동인들의 주장이 ‘동소만록’에 적혀있다.
정여립이 실제 모반을 도모하고 후에 대동계라는 군사집단이 실재했다면
왜 단 한번의 항거도 없이 자살을 시도했는가 하는 의문도 생긴다.

정여립은 평소 ‘천하는 공물(公物)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며 인민주권설을 역설했고
불사이군(不事二君)에 대해서도 왕과 신하의 관계는 수직관계가 아니라며 일종의 민중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며
왕의 세습을 부인했다. 이는 조선왕조에 대한 전면적 부정이고 반왕조 혁명사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사상이다.
정여립의 사상은 후에 모반자로 몰리면서 왜곡된 채 전해졌지만 가히 혁명적 사상으로 평가된다.
결국 정여립은 기축옥사의 주동자로 몰렸다. 이로인해 전라도 자체가 반역향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고
그 뒤 호남출신의 관 진출을 어렵게 했다. 이런 영향이 조선조말까지 계속 이어져 동학농민혁명으로 이어져 왔다.

이처럼 역사는 유사 이래 항상 승리한 자 편에서 기록돼 왔다. 궁예나 묘청, 신돈의 경우 등도 그러하다.
때문에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역사를 배우기보다 잘못된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신영복 석좌교수(성공회대)의 말을 되새겨봄직하다. 
 
“정여립은 조선시대 선각자이며 혁명가입니다”신정일 문화사학자는 정여립의 억울함과 함께 혁명성을 재해석하고
숨어있는 대동사상을 찾는데 주력했다. 20여년전부터 정여립에 대한 연구를 한 신정일씨는
 정여립이 활동한 전주, 원평, 진안 일대를 중심으로 정여립의 흔적을 발굴하는데 힘을 써 왔다.
신씨는 “일찍이 단재 신채호는 정여립을 5백년 전 군신강상론을 타파하려는 인물로 추앙한 적도 있다”면서
“양반과 상놈으로 나뉘던 계급사회에서 대동교를 통해 평등사회를 구축하려던 정여립의 재조명에 힘썼다”고 밝혔다.
또한 신씨는 “전국에 걸쳐 있는 정여립에 대한 수많은 전설들을 오늘에 맞게 되살릴 필요가 있다”며
“특히 기축옥사로 희생당한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여러 형태의 기념물 조성 및 학술대회를 통해
관련저작물들을 발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여립의 기축옥사를 중심으로 역사를 바로 보는 당위성과 함께 신씨는
 “당시 서인의 송익필의 호가 붙여진 운장산도 대동여지도에 기록된 주줄산으로 개명시키는 것도 기
축옥사를 재조명하는 또 다른 방법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5백년전의 세월이 흐른 뒤 기축옥사가 계획된 역모였는가, 무고에 의한 정치적 탄압인가를 가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일찍이 대동계를 조직하고 불사이군의 절의론을 부정하며 훗날 민중사상의 토대를 마련한 정여립이 오늘날 이땅의 사람들에게 남기는 무언의 가르침은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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