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청으로 푸른빛을 얻다 - 권현형
푸른 기운을 죽여야 한다는,
살청殺靑이라는 말이 놀라웠다
무쇠 솥에서 찻잎을 덖어서 맛보는 자의
사지가 부드러워지고 혀의 독毒이 빠지는 순간
들끓는 생각이 묽어지는 그런 때를 말함이라면
껍질 안에서 이미 딱딱해져 있거나
아직 몸이 촉촉한 강낭콩의
푸른빛을 벗기고 앉아 있을 때
모처럼 둥근 고요가 양푼 가득 찾아오듯이
대청 아래 묶인, 흰 개의 눈을 들여다본다
짐승의 시간을 지나간 것이라면
무연하게 깜박이는 흰 빛을 말하는 것이라면
부칠 수 없었던 내 뜨거운 문장들도 부디 살청이었길
어두워져가는 악양岳陽*의 무쇠 빛 산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을 때
저녁 해가 손바닥만큼 남은 빛으로
지리산 골짜기의 비의를 거둬들이고 있다,
살청이다
*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권현형 시집 『포옹의 방식』(문예중앙. 2013)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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