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화성행차, 8일간의 기록
우리문화연구 / 김인선
► 鷺梁舟橋度步圖 - 노량진에서 배다리를 건너다
► 始興還御行列圖 - 시흥행궁에 돌아오다
► 得中亭御射圖 - 득중정에서 활쏘기를 하다
► 西將臺城操圖 - 서장대에서 군사훈련을 하다
► 洛南軒養老宴圖 - 낙남헌에서 양로잔치를 열다
► 奉壽堂進饌圖 - 봉수당에서 회갑잔치를 열다
► 洛南軒放榜圖 - 낙남헌에서 과거 합격자를 발표하다
► 華城聖廟展拜圖 - 화성향교를 참배하다
첫째날(윤2월 9일)
1795년(정조 19) 윤2월 9일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창덕궁을 나섰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잔치를 수원에서 열기 위한 것이었다. 33년 전 뒤주에서 운명을 다했던 사도세자 역시 올해 환갑이 되는 해였다. 이날의 행차 인원은 6,000여 명이었는데, 이중 4,500명은 장용영을 비롯한 5군영의 군사들이었다.
숭례문을 통과하여 용산을 지난 정조는 한강을 건너기 위하여 배다리를 지났다. 배다리를 건넌 후 정조는 노량진에 있는 용양봉저정(노량진행궁)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용양봉저정은 한강나루를 건넌 후 잠시 어가를 쉬게 하기 위하여 1789년 이후에 지은 정자였다. 점심식사를 마친 정조의 행차는 장승백이를 지나 시흥대로를 거쳐 시흥행궁으로 도착하였다.
둘째날(윤2월 10일)
시흥행궁을 떠난 정조의 행차는 시흥대로를 따라가던 길에 만안교를 건넜다. 만안교는 정조가 화성 행차를 위해 짓도록 명한 튼튼한 돌다리였다. 사근평행궁에서 점심식사를 마친 정조는 지지대고개를 지나 노송지대에 이르렀다. 노송지대는 정조가 화성을 축성하면서 현재의 파장동, 송죽동, 정자동에 걸쳐 조성하게 한 소나무숲이다. 노송지대를 지난 정조의 행차는 장안문을 거쳐 화성행궁에 도착하였다.
셋째날(윤2월 11일)
화성에서의 첫날 화성향교의 대성전을 참재하기 위하여 새벽 5시 45분(卯初 3각) 행궁을 나선 정조의 행차는 팔달문을 통해 화성을 나왔다. 원래 화성향교는 화성군 봉담면 와우리에 있었던 것을 정조가 지금의 수원시 권선구 교동으로 옮겼다. 정조는 대성전에 모셔진 공자의 위패에 네 번 절하였다.(화성성묘전배도)
8시경(辰時) 정조는 낙남현에서 화성 인근 지역의 유생을 대상으로 문무과별시를 실시하고, 오후 2시(未正) 합격자 명단을 발표하였다. 이날 과거급제자는 문과 5명, 무과 56명이었으나, 그림에는 훨씬 많은 사람들을 그려놓았다.(낙남헌방방도)
4시경(申時) 정조는 이틀 후에 있을 회갑잔치 예행연습을 위해 봉수당으로 나갔다.
넷째날(윤2월 12일)
새벽 4시 45분(寅正 3각)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아버지 사도세자가 모셔져 있는 현륭원으로 향했다. 원래 사도세자의 묘소는 양주 배봉산에 있었으나, 1789년 종조가 당시 최고의 명당으로 꼽이던 이곳 화산 기슭에 이장하였다. 정조는 이전에 몇 차례 이곳을 참배한 일이 있었으나, 혜경궁 홍씨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현륭원 참배를 마치고 행궁에 돌아온 정조는 오후 4시 15분(申正 초각) 서장대에서 군사훈련을 지휘하였다. 이날의 군사 훈련은 주간과 야간 두 차례에 걸쳐 시행되었고, 3,700여 명의 군사가 참여하였다.(서장대성조도)
다섯째날(윤2월 13일)
이날 봉수당에서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축하하는 잔치를 벌였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은 본래 6월 18일이었으나, 미리 앞당겨 열었다. 봉수당은 1789년 수원부의 처소를 새로 옮기면서 지은 건물로 원래의 이름은 장남헌이었으나,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를 계기로 봉수당(奉壽堂)으로 이름을 바꾸었다.(봉수당진찬도)
여섯째날(윤2월 14일)
오전 8시 15분 정조는 신풍루에서 사민(四民: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사람) 50명과 가난한 사람 261명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다. 이어 이 지역의 노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낙남헌에서 양로잔치를 베풀었다. 이날 양로연에 초대받은 노인은 영의정 홍낙성을 비롯한 기로대신 15명과 화성 사는 노인 384명이었다.(낙남헌양로연도)
12시경(午時) 장안문을 거쳐 화홍문, 방화수류정 등을 방문하였다.
오후 4시경(申時)에는 낙남현 바로 뒤에 위치한 득중정에서 신하들과 함께 활쏘기를 하였다. 득중정은 1790년 정조가 활쏘기를 한 후 편액을 내려준 건물이었다. 득중정에서의 활쏘기는 정조가 화성에서 가진 마지막 공식적인 행사였다.(득중정어사도)
일곱째날(윤2월 15일)
오전 8시 45분(辰正 3각) 정조의 행차는 화성을 떠났다. 행차가 미륵현에 도착하자 정조는 이 고개를 건너면 더 이상 화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슬퍼하며 현륭원쪽을 바라보며 차마 발길을 떼지 못했고, 행차는 계속 ‘지체되었다[遲遲].’ 이후 미륵현의 이름은 지지대고개로 바뀌었다. 1800년 화성어사 신현은 이곳에 정조의 효심을 기리는 지지대비(遲遲臺碑)의 건립을 주청하였고, 1807년에 완성되었다. 지지대고개를 넘어 사근평 행궁에서 점심식사를 한 정조와 혜경궁 홍씨는 저녁 무력 시흥행궁에 도착하였다.(시흥환어행렬도)
여덟째날(윤2월 16일)
오전 6시 45분(卯正 3각) 정조의 행차는 시흥행궁을 떠나 용양봉저정(노량진행궁)으로 향했다. 용양봉저정에 점심을 마친 정조는 이어 배다리를 건넜고, 배다리는 윤2월 17일에 해체되었다.(노량주교도섭도) 정조의 행차는 숭례문과 돈화문을 거쳐 창덕궁으로 들어섰으며 이로써 8일간의 화성챙차 일정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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