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1931 59.5 x 44.5cm 일본 동경예술대학 자료관
잔설 1926, 37.5 x 45.5cm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풍경 1927, 65.5 x 53cm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주춘소경 1928, 45 x 53cm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나부 1928, 80 x 53cm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시골 소녀 1929, 45 x 38cm 개인소장
아내의 상 1936, 72 x 52.7cm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사과밭 1937, 73 x 91cm 개인소장
남햔집 1939, 79 x 64cm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초추 1948, 90.5 x 72.5cm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포구 1948, 46 x 53cm 개인소장
무등산이 보이는 9월풍경 1949. 합판에 유채 24 x 33cm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가을풍경 1953, 49.5 x 60cm 개인소장
초동 1954, 45.5 x 52.5cm 개인소장
성닌장 1958, 45.5 x 53cm 개인소장
백양사 입구 44 x 53cm 용인 호암미술관
장미 1956, 60.5 x 49cm 개인소장
칸나 1956, 90.5 x 73cm 개인소장
선인장 1958, 45.5x 53cm 개인소장
수련 1957, 53.5 x 45cm 개인소장
석류 1960, 38.5 x 45.5cm 개인소장
유달산 60 x 72cm 한국 산업은행
추경 1965, 49.5 x 60cm 개인소장
추광 1960, 53.5 x 60.5cm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정물 1963, 39 x 30cm 용인 호암미술관
열대어 1064, 90 x 77cm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푸른 산 1968, 45 x 53cm 개인소장
만추 1969, 53 x 65cm 개인소장
항구 1967, 49 x 60.5cm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동일(冬日) 1968, 45.5 x 60.5cm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신록 1970, 50 x 60cm 개인소장
조선소 풍경 1969, 38 x 45cm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항구 1969, 53 x 73cm 고려대학교박물관
설경 1971, 97x 145cm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바다 풍경 1973, 50 x 61cm 개인소장
노르웨이 풍경 1974, 50 x 35.5cm 개인소장
피카딜리 풍경 1974, 50 x 40cm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피카딜리 풍경 1974, 50 x 40cm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일 풍경 1974, 40 x 49.5cm 개인소장
녹음 1975, 48 x 60.5cm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항구 1976, 33 x 45cm 개인소장
함부르크항의 풍경 1877, 65 x 41.5cm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북구의 정원 1976, 53.5 x 41.5cm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군선(群船) 1979, 34 x 46cm 개인소장
항구 1980, 56 x 71.5cm 개인소장
꽃 1981, 61 x 42.5cm 개인 소장
가을 풍경 1981, 45.5 x 34.5cm 개인 소장
항구 1980, 65.5 x 91cm 개인 소장
북구의 봄 1981, 47.5cm x 60cm 개인 소장
하경(夏景) 1981, 45 x 60cm 개인 소장
화원 1982, 41 x 53cm 개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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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업은 특히 서구적 취향에서 벗어나 우리의 자연미와 풍부한 색채, 밝은 빛의 재인식이라는 예술적 여과 과정을 깊게 했다는 점에서 한국 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905년 전남 화순 동복에서 태어난 오지호 화백은 휘문고보와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했다. 1935년 개성 송도고보 교사를 지냈과, 해방 이후 1949년 조선대 교수, 1055년부터는 전라남도 문화상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1956년에는 국전 초대작가가 되어 1968~73년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1976년 국전 운영위원을 지냈고, 1976년부터 작고하기까지 예술원회원으로 있었다. 국민훈장 모란장과 예술원상을 수상했으며, 작고한 뒤 2002년 금관문화훈장을 추훈받았다.
송도고보 재직 시절에는 그의 휘문고시절부터 동경미술학교까지 오랜 동기인 화가 김주경과 함께 국내 최초로 총천연색 도판으로 ‘2인 화집’을 자비로 발간, 식민시대 하에서 당시 국내 미술인들의 관심을 모았다.
그는 1931년 녹향회의 2회 전람회에 가담하면서 동족 서양화가들만의 유일한 독립단체로서 ‘조선 양화의 발전 촉진과 그 대중화’를 내세움으로써 당시 화업을 하던 젊은 예술가들이나 동료들로부터 독립 자주정신이 강렬한 작가라는 평도 받았다. 결국 녹향회는 이 사건으로 일제의 탄압을 받아 중단되는 사태를 맞았다. 그를 일컬어 ‘무등산의 별’ ‘무등산 산신령’ 등의 무등산 호칭이 연결된 말을 붙이는 것도 그의 자연주의적 삶의 태도와 회화와의 연결성을 보여준다. 1950년대 이후부터 제작된 무등산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는 ‘오지호와 무등산’ 혹은 ‘무등산과 오지호’라는 등식관계를 성립시킨 화가로 평가받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그는 특히 일반 화가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국한문 혼용론자로 1969년에는 어문교육연구회 부회장(1969년 이사, 1980년 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는데 “한글로만 교육하면 천재도 천치가 된다”는 극단적인 국한문혼용론을 펼치기도 했다.
그는 그림을 팔아서 상당한 액수를 국한문혼용운동에 투입한 것으로도 유명하며 이 운동을 위해 스스로 논문을 쓰는 등 적극적 활동을 보였다. 그는 늘 기차를 타고 여행을 자주하고 애마 ‘무등’을 타고 승마도 즐겼다. 가족들의 말에 따르면 달리는 차 속이지만 넓은 유리 사이로 보이는 차창 밖의 자연이 하나의 화폭으로 전개되어 유리창이 캔버스가 되어버리는 구도 설정을 자주 하곤 했다고 전해진다. 1939년 동아일보에 「피카소와 현대회화」라는 제목으로 피카소 비판 글을 발표, 이목을 끌기도 했던 그는 남달리 미술이론에 대한 저서도 많이 남겼다. 『현대회화의 근본문제』『미와 회화의 과학』『국어에 대한 중대한 오해 』『오지호 김주경 화집』『알파벳 문명의 종언』등은 여전히 명저로 남아있다. 1980년 아프리카 원시미술 연구차 두번째 유럽 여행을 다녀와 2년 후 「아프리카 소년들」등 해외 스케치 작품 창작을 시작하기도 했던 그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앓다가 1982년 12월 향년 77세로 타계했다. 송도고보 재직 시절에는 그의 휘문고시절부터 동경미술학교까지 오랜 동기인 화가 김주경과 함께 국내 최초로 총천연색 도판으로 ‘2인 화집’을 자비로 발간, 식민시대 하에서 당시 국내 미술인들의 관심을 모았다. 吳之湖 화백은 우리 회화사에서 가장 본격적이고 야심적인 작품활동을 펴온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綠鄕會의 후속 멤버였으며, 녹향회 정신적 지주로 사숙했던 ‘세잔'이나 ‘칸딘스키' 등 인상파의 계열을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색채를 향토적 분위기로 끌어들여 절묘한 성공을 거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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