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言情談

"동국진체, 남도에서 꽃피워"

푸른하늘sky 2018. 11. 16. 12:03

학정 이돈흥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서예가이다.
그는 동국진체의 맥을 계승하면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는 신동국진체의 대가라 평가받고 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8/01/2018080101606.html






                    상: 원교 이광사'대흥사 대웅보전'            하: 창암 이삼만'용비'


옥동 이서(玉洞 李漵, 1622-1723)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 1668-1715)
백하 윤순(白下 尹淳, 1680-1741)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1777)
창암 이삼만(蒼巖 李三晩, 1770~1847)
기산 모수명(箕山 牟受明)
설주 송운회(雪舟 宋運會, 1874~1965)
송곡 안규동(松谷 安 圭 東, 1907~1987)

해남 대둔산 대흥사에 한자로 씌여진 편액 ‘대웅보전(大雄寶殿)’과 ‘침계루(沈溪樓)’, ‘지리산천은사’ 는 원교 이광사가 쓴 동국진체 서예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원교의 묵적은 이곳 말고도 광주ㆍ전남지역에서 상당수 발견된다. 남도는 한국 서단에서 조선풍의 서체인 '동국진체'를 꽃피운 서예의 고장이다. 18세기 영ㆍ정조시대 조선조 특색을 잘 담아낸 '동국진체'는 옥동 이서와 공재 윤두서, 백하 윤순을 거쳐 원교에 이르러 완성됐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중기의 서예는 한석봉체가 기본틀을 형성하면서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로 이어져서 이 양송체(兩宋體)가 율곡학파의 기본서체로 자리를 잡아간다. 그런데 겸재와 거의 동시에 남인 쪽에서는 옥동 이서(玉洞 李漵)가 출현하여 동진(東晋) 왕희지(王羲之)의 <악의론(樂毅論)> 에서 필력을 얻었다고 표방하면서 조선화된 조맹부의 송설체(松雪體)와 조선의 한석봉체에다 북송 미불(米芾, 자는 元章)의 서법을 부분적으로 가미하여 새로운 서체를 창안해 내고 이를 동국진체(東國眞體)라 이름하고 「필결(筆訣)」을 지어 『주역』의 이치로 서론을 전개한다.

이 역시 조선성리학이 주도해 나가는 시대정신을 반영한 진경문화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는 바, 그래서 그랬던지 이 서체는 남인 쪽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서인과 가까웠던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에게 전해져서 공재의 이질(姨姪)로 서인이던 백하 윤순으로 이어진다. 백하와 원교는 인척간으로 그 맥은 원교에까지 이른다.

백하 윤순(白下 尹淳)은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나 이조판서 대제학까지 지낸 인물로 그의 글씨는 천부적인 재질로 획과 결구가 아름다워 마치 봉황이 춤추고 구슬이 찬란하게 빛나는 듯하여 우리나라 백여 년간에 으뜸이라고 칭송을 받을 정도였다.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는 '원교체'라는 특유한 필체를 만들었고 <원교필결(圓嶠筆訣)>과 <원교서결(圓嶠書訣)>이라는 자료를 남겨 후진양성과 서예 중흥에 크게 공헌했다. 원교 이광사의 삶은 재앙의 연속이었다. 그는 왕족으로서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당쟁으로 인해 그의 집안은 하루아침에 역적으로 내몰리고 만다. 조부는 호조참판을 지낸 이대성(李大成)이고 부친도 대사헌을 지낸 이진검(李眞儉)이나 소론으로 당쟁에 휘말리면서 노론이 추대하는 영조가 즉위하자 역적 집안이 되었다. 영조를 비판하는 나주벽서사건에 연루되어 1732년 진도로 유배됨을 시작으로 국토의 양끝인 함경도 부령과 전라도의 진도, 신지도에서 무려 23년간이나 유폐되어 살다가 생을 마쳤다. 그의 글씨에서 그런 참담한 일생이 읽혀진다.

그가 완도 신지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병풍족자, 비지, 서첩 등을 써달라는 주문이 많아 날을 택해 서장(書場)이 섰을 정도로 그의 글씨는 당시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아버지를 따라서 함께 신지도로 간 그의 아들 이영익은 조석으로 아버지의 시중을 들었던 내용을 신재집(信齋集)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다. 이후 원교는 출사를 단념하고 글씨에만 몰입하여 조선 최고의 명필이 되었다.

스승이었던 백하 윤순은 “아무개의 글씨는 우리나라 수천 년 이래 없던 바 일 뿐만 아니라 중국에 있어서도 마땅히 위진(魏晉)에 비길만하고 당(唐) 이후로는 견줄만한 것이 없었다.”고 하여 원교의 글씨를 높이 평가했다.

완도 신지도에 유배된 이광사에 의해 완성된 동국진체는 해남, 강진, 보성, 광주, 전주를 거치면서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에서도 선풍적 인기를 얻은 동국진체는 다시 지방으로 확산, 전국적인 붐을 이뤘다. 지방예술이 중앙에 영향을 미치는 역류현상을 일으킨 것이다.

이런 특성으로 동국진체는 남도 특유의 한과 풍류가 응축된 독특한 남도 서예의 밑바탕으로 자리잡았다. 물론 남도서예는 여말선초로부터 시작된 남도 출신 학자들의 출사와 낙향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들의 높은 학문은 남도 서예의 진보에 직ㆍ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끼쳐왔음은 불문가지 사실이다. 주요 인물로는 면앙정 송순, 사촌 김윤제,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송강 정철,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노사 기정진 등이 그들이다. '글씨가 곧 그 사람의 인품'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던 이들은 인품이 갖춰지지 못한 사람이 서예를 하는 것은 재주로 글씨라는 기예만 익힌 천한 사람으로 여겼다. 이는 곧 남도 서예정신의 근본이 됐다.  

원교의 글씨는 전주 출신의 창암 이삼만(蒼巖 李三晩)에게 이어진다. 그의 일생은 그다지 알려진 것이 없다. 하지만 그에 관한 이야기들을 모아보면 그의 삶에도 상처가 깊이 새겨져 있다. 그 역시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무척이나 가난하게 살았다. 그의 부친이 약초를 캐러 다니다 독사에 물려 죽자, 그의 집안은 더욱 곤궁해졌다.

그는 가난한 살림에 나뭇가지와 지팡이로 글씨를 썼다. 종이가 귀해서 베를 빨아 쓰고 또 쓸 정도로 종이나 붓을 살 만한 형편도 아니었다. 당대 명필이었던 원교의 글씨를 배웠는데 글씨에만 몰두한 나머지 가산은 더욱 기울었다. 글씨 배우기를 청하는 자에게는 1점 1획을 한 달씩 가르쳤으며, 병중에 있을 때도 벼루 3개를 모두 먹으로 구멍을 내겠다는 결심으로 하루 1,000자씩 글씨를 썼다 한다. 특히 초서를 잘 썼기 때문에 그 글씨를 ‘창암체’, 속칭 ‘유수체’라 했다. 유필로 하동 칠불암(河東七佛庵)의 편액(扁額)과 전주판(全州板)의 칠서(七書) 등이 있다.

호산 서홍순과 기산 모수명, 해사 김성근, 노사 기정진이 그의 제자이다. 호산 서홍순(湖山 徐弘淳, 1798-미상)은 스승 창암의 일깨움처럼 언제나 겸허한 마음으로 글씨에 임했고, 평생 글씨를 쓰면서도 처음 붓을 잡는 마음으로 일관하여 끝이 문드러진 붓이 큰 독으로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초서에 능했고 태서(苔書, 작은 글씨)로 유명하였다. 그의 아들 호운도 글씨에 능했고, 그의 손자인 우운은 난을 잘 그려 호산의 필력이 3대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기산 모수명(箕山 牟受明)은 함평 출신으로 함평모씨이다. 함평은 읍내 동북방 함평공원의 언덕과 그 아래로 흐르는 함평천을 일러 중국 하남성의 기산영수와 견줄만한 곳이라 하여 기산영수(箕山潁水)라 했는데 모수명은 고향 함평의 별명에서 그의 호를 취했다.

창암에게서 해서와 초서를 배워 명필의 칭호를 들었고 만년에는 호남을 비롯한 호서지방까지 두루 다니며 서법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는 창암에게서 배운 겸허한 자세를 강조하며 가르치는데 서법을 익히는 기간을 3개월씩 단계를 정하고 그동안 가르친 공이 이루어지면 반드시 2백금의 사례를 받았으며, 당시 사람들은 만년에 그의 필체를 모체(牟體)라 일컬었다고 한다. 기산의 필맥은 다시 고창의 석전 황욱, 전남의 설주 송운회, 호암 박문회로 이어진다.

설주 송운회(雪舟 宋運會)는 보성 출신으로 유배 중이던 영재 이건창에게서 형 송명회와 함께 학문과 서예를 익혔고 기산 모수명으로부터는 글씨를 배웠으며 중국의 서체와 우리의 동국진체를 섭렵했다. 특히 중국의 동기창과 하소기의 필법에 심취했다. 5체에 고루 능했으나 해, 행, 초를 주로 썼으며 ‘선(仙)의 경지에 이른 신필(神筆)’이란 찬사를 받았다. ‘보성강물이 온통 설주선생의 붓 헹구는 먹물’이라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그의 서맥은 송곡 안규동으로 이어져 그 맥이 현재까지 간단없이 이어지고 있다.

송곡 안규동(松谷 安 圭 東)은 보성 출신으로 '송곡체'라는 독특한 서체를 남겼다. 그는 설주 송운회와 전서의 명필인 효봉 허소(曉峰 許炤)에게서 배웠다. 또 1963년 근원 구철우, 지상호, 최태근 등과 함께 광주서예연구회를 창립해 후진을 양성하고 우리 고유의 필묵정신을 부흥시키는 등 서예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는 특히 많은 제자들을 두어 남도의 서단을 확장했으며 동국진체의 서맥을 면면히 이어지게 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