周遊天下

[박종인의 땅의 歷史] 우리 선화 공주는 어디로 가 버렸을까?

푸른하늘sky 2018. 1. 24. 16:32

[조선알보]

입력 : 2018.01.03 03:03

[105] 미스터리 王都 익산과 서동요(薯童謠)

국경 초월한 사랑 '서동요'
백제 총각과 신라 공주, 헛소문 유포 끝에 서동-선화 결혼에 성공
익산에는 거대한 왕궁터, 선화공주가 세운 미륵사, 부여에는 '궁남지'
익산… 부여… 전설 경쟁 서로 '서동요 배경' 주장
2009년 미륵사 석탑 조사 '엉뚱한 사람'이 절 주인… 선화공주 전설 와르르…
'서동=동성왕' 설… 일본 설화와 쌍둥이 설…
선화 전설 부활 위해 익산은 열심히 발굴 중

박종인의 땅의 歷史

일정한 직업도 재산도 없는 시골 노총각이 도시에 예쁜 여자가 산다는 소문을 들었다. 뒷조사 과정에서 부유한 권력자 집안임을 알게 된 사내는 아이들에게 접근해 낭설을 퍼뜨리게 하였다. 금품 제공도 잊지 않았다. '여자가 밤마다 어떤 사내와 동침을 하고 새벽에 집으로 돌아간다.' 사내가 제공한 간식에 현혹된 아이들이 노래를 불러댔다. 아버지는 딸을 쫓아내 버렸다. 여성은 수치심 속에 걸어가며 이를 갈았다. 미칠 노릇이었다. 그때 노총각이 나타나 그녀를 위로하니, 영문 모르는 여성은 점차 마음을 열고 몸을 허락하여 동거에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미성년자 약취-유인죄와 허위 사실 유포에 따른 명예훼손죄와 모욕죄, 기망에 따른 사기죄를 저지른 끝에 성립된 혼인이 그 유명한 서동이와 선화공주의 사랑, 서동요(薯童謠)다. 서동은 우리말로 '맛동' '마동'이라 한다. 마동이는 무왕(재위 600~641년)이다. 명예훼손죄는 피해자가 원하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으니 죄는 성립하지 않았다. 모욕죄 또한 고소를 해야 성립하니 또한 무죄. 나머지는 공소시효가 지나도 1000년이 넘게 지나버렸다. 이제 1300년 전, 낭만으로 포장된 서동요 사건을 추적해본다. 마동은 누구인가, 그리고 선화는 누구인가.

수수께끼의 도시 익산

백제는 크게 두 번 수도를 옮겼다. 경기도 하남 위례성에서 충남 공주로, 그리고 공주에서 부여로 천도했다. 위례 백제와 웅진 백제, 사비 백제라 한다. 세 도시는 공통점이 몇 있다.

위례는 한강 남쪽이고 웅진은 금강 남쪽이며 사비 또한 백마강 남쪽이다. 도시마다 산성이 있었다. 산성 아래 왕궁이 있었다. 왕궁 옆에 왕실 사찰이 있었다. 도시 가운데에는 국민이 다니는 거찰(巨刹)이 있었다. 또 하나는 땅 이름이다. 위례성에 만들었음 직한 흙성 이름은 몽촌토성이다. 몽촌의 '몽(夢)'은 '꿈'인데, 옛말은 '곰'이었다. 한강이 좁아지기 전 몽촌토성 앞까지 강이 흘렀다. 그 강변마을을 백제인은 곰마을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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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익산 고도리에는 정체 모를 돌부처 한 쌍이 200m 정도 거리를 두고 서 있다. 도로 하나를 건너면 거기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왕궁 유적이 있다. 그 왕궁에서 서동과 선화가 사랑을 했고, 그 사랑이 미륵사를 창건했다고 했다. 기록이 적기에, 진실은 돌부처도 모른다. /박종인 기자

공주로 천도를 하니, 웅진(熊津)이라 불렀다. 곰마을이다. 공주 나루터 이름은 고마나루, 곰나루다. 훗날 고려시대 주(州)를 설치할 때 '곰'이라는 한자가 없기에 공주(公州)라 했다.

공주에서 천도를 할 때 역시 금강 변에 도읍을 정하니, 부여다. 금강이 부여에 이르면 백마강으로 이름이 바뀐다. 원명 '금강(錦江)'은 비단 같은 강이 아니라 '곰의 강'을 뜻한다. 지금도 공주에서는 금강을 '곰강'이라 부른다.

이렇게 백제 왕도(王都)가 갖는 모든 요소를 전북 익산이 가지고 있다. 왕궁이 있던 곳은 왕궁리이고 거대 사찰은 미륵사이며 나루터 이름은 곰개(웅포)이며, 웅포나루가 있는 강은 금강, 곰강이다.

왕궁터 발굴도 마무리 단계고 압도적인 규모의 미륵사지 서탑(西塔)도 복원이 끝이 보인다. 그런데 누가 이 도시를 건설했고 누가 살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익산 사람을 포함해 많은 대한국인이 믿는 바는 하나 있다. 마동이와 공주가 바로 익산에서 사랑을 했다는 믿음.

미륵사지의 비밀과 선화

'선화가 엄마로부터 노잣돈으로 받은 금덩이를 마동에게 내놓았다. 마동이 물었다. 이게 뭐요? 금이오, 금. 귀한 것이오. 남편이 말했다. 이런 거, 산에 산더미처럼 쌓아두었다네. 그리하여 금 삼천 냥을 장인 진평왕에게 보내니 왕이 결혼을 허락하였다. 훗날 마동이 왕이 되었는데, 선화가 절을 지어 달라 하여 지어주니 그게 미륵사다.'(삼국유사)

익산 왕궁터에 서 있는 오층석탑.
익산 왕궁터에 서 있는 오층석탑.

익산 왕궁터에 있던 왕궁은 인공 개울이 있는 후원(後園)까지 완비한 화려한 궁궐이었다. 나라가 망하는 바람에 미완에 그친 왕도라는 설, 지금 세종시처럼 행정수도였다는 설이 오간다.

미륵사에는 거대한 목탑 하나와 그만큼 거대한 석탑이 두 개 있었다. 석재(石材)만 흩어져 있던 동탑은 1992년 저비용과 신속성과 얕은 상상력을 기초로 복원돼 역사적인 흉물로 기록됐다. 서쪽 석탑은 다 허물어져 해골처럼 서 있다가, 일제강점기 최첨단 접착제인 콘크리트로 보강 작업을 했다. 서탑은 지금 그 콘크리트를 벗고 복원을 앞두고 있다.

2009년, 탑 복원을 앞두고 마지막 조사가 시작됐다. 지상 석재를 들어내고, 탑 가운데에 있는 심주석 뚜껑을 열었다. 사리함이 나왔다. 9000개가 넘는 보물이 쏟아졌다. 금판이 나왔다. 가로 15.5, 세로 10.5㎝짜리 금판 앞뒤로 193자가 새겨져 있었다. 발굴팀 심장이 요동쳤다. 탑을 지은 사람 이름이 나왔는데, 선화가 아닌 것이다. 사택적덕(沙宅積德)이라는 고위 관리의 딸이라는 것이다.

그해, 선화를 사랑했던 사람들과 백제사를 공부했던 사람들은 좌절했다. 자기네 땅에서 무왕과 선화가 사랑했다고 믿는 부여와 익산 사람들은 억장이 무너졌다. 학자들은 선화의 부활을 꿈꾸며 그해에 여섯 차례나 학술대회를 열었다. 회생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굉장히 많은 주장이 쏟아졌다.

서동, 마동이와 동성왕

일연이 기록했다. '서울 남쪽 못가에서 과부와 용이 관계해 서동이 태어났다. 고서에는 그가 무강왕이라고 하나 잘못이다. 백제에는 무강이 없다.'(삼국유사 기이제이(紀異第二)) 참고한 고서가 뭔지 알 수 없으나, 무강왕이 없으니까 무왕이라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무왕은 재위 41년 동안 신라와 열세 번 전쟁을 치렀다. 3년에 한 번꼴이다. 천하 미색이어도 결혼할 상황이 아니었다.

복원을 눈앞에 둔 미륵사지 서탑.
복원을 눈앞에 둔 미륵사지 서탑.

기록상 백제와 신라가 결혼으로 맺은 시기는 한 번이다. '493년 3월 동성왕(東城王, 재위 479~501년)이 신라에 혼인을 요청하니 신라 왕이 이찬 비지의 딸을 시집보냈다.'(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편) 동성왕의 이름은 모대(牟大), 마모(摩牟)(삼국사기), 혹은 말다(末多)(일본서기)다. 삼국사기에는 진평왕의 딸이 둘만 나온다. 서동요에 나오는 진평왕 댁 셋째 딸은 일연만 주장하는 여자다. 그러니까 '마동' 혹은 '서동'이라는 청년은 '모대' '마모' '말다'가 본명인 동성왕이고 그와 신라 고위직 딸의 결혼이 윤색된 전설일 확률이 높다.

일본으로 간 선화와 서동?

2004년 일본에서 놀라운 논문이 나왔다. 저자는 리쓰메이칸(立命館) 아시아태평양대 교수 김찬회, 제목은 '오이타현의 마나노(眞名野) 장자 전설과 한국'.

익산 웅포에서 본 금강.
익산 웅포에서 본 금강. 웅포는‘곰나루’라는 뜻이다.

'미에마치(三重町) 마을에서 숯 팔아 먹고사는 스미야키 고고로(炭燒 小五郞)에게 아름다운 다마쓰(玉津) 공주가 와서 같이 살았다. 어느 날 공주가 엄마로부터 받은 금덩이를 주자 스미야키는 연못에 사는 원앙에게 던져버렸다. 기가 막힌 공주가 말했다. 이것은 귀한 황금이오. 스미야키가 말했다. 연못이랑 숯가마에 산더미처럼 있다네. 훗날 부부가 황금 삼천 냥을 당나라 천태산에 시주하니 백제국에 사는 연성법사가 부부 마을에 불상을 가져와 절을 세웠다. 스미야키는 마나노(眞名野) 장자로 불렸다.'

김찬회에 따르면 마나노 장자 설화 배경은 6세기다. 무왕보다 앞선다. 2004년 8월 '미에마치 마나노 장자 전설연구회' 회원들이 익산을 찾았다. 익산 사람들은 이들을 반갑게 맞았다. 서로가 궁금한 게 하나둘이었겠는가.

미궁(迷宮)에 빠진 그리움

익산 사람들은 마동이가 태어난 연못이 익산 마룡지(馬龍池)이고, 그 뒷산 오금산이 마동이가 금을 산더미로 쌓아뒀다는 산이라 철석같이 믿는다. 부여 사람들은 궁남지(宮南池)가 '무왕과 왕비가 뱃놀이를 한 궁 남쪽 인공 연못(삼국사기)'이라고 철석같이 믿는다. 부여 궁남지는 1965년 지금처럼 정비됐다. 못 가운데에 있는 정자 포룡정 현판은 부여 출신 정치인 김종필이 썼다.

무왕 부부가 묻혔다는 쌍릉 소왕묘.
무왕 부부가 묻혔다는 쌍릉 소왕묘.

익산에는 마룡지도 있고 오금산도 있고 왕궁도 있고 미륵사도 있다. 무왕과 선화공주가 묻혔다는 왕릉 쌍릉(雙陵)도 있다. 그런데 기록이 없다. 부여에는 삼국사기라는 기록이 또렷하게 남아 있다. 그런데 1990년대 궁남지를 파보니 대규모 인공 연못의 흔적이 나오지 않았다. 기록은 있는데 땅에 없는 것이다.

지난해 익산은 쌍릉을 재발굴하기로 결정했다. 일제강점기 발굴 유물을 다시 보니 중년 여자 치아와 신라 토기가 나온 것이다. 익산 어딘가에 삼국사기에 나오는 '궁 남쪽 큰 연못'이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 이 또한 발굴하기로 했다. 이래저래 선화에 대한 그리움이 증폭되고 있는 중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1/03/201801030004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