周遊天下

[박종인의 땅의 歷史] 뭔 일이 있었건대 山이 저리 타는 것이냐!

푸른하늘sky 2018. 1. 24. 16:20

[조선일보]

입력 : 2018.01.24 03:04

[108] 무주 제1경 나제통문과 덕유산, 비밀의 역사

조선 문인들 찾던 덕유산 '삼백 리 이어진 노을'
무주 제1경 나제통문 '신라와 백제 국경'이라며 국사 교과서에도 실려
통문은 1920년대 건설된 무주 금광 개발용 터널
1960년대 관광개발 위해 무주 33경 지정하면서 '역사'로 굳어버려
칠연계곡에는 150여 의병들 집단묘지
'눈에 보이지 않는 역사를 보라'

박종인의 땅의 歷史

1980년대 멀리 떠난 낯선 마을 담벼락에 수시로 보였다. 방첩표어다. '지나가는 저 나그네 간첩인가 다시 보자.' 체제 경쟁이 적대적인 폭력으로 분출되던 냉전시대 여행길이었으니, 역사적인 촌극이라 이해하고 넘어간다.

세상이 바뀌었다. 이제 여행지에 도착하면 눈을 부릅뜨고 정신 똑바로 차린다. 손바닥에 볼펜으로 이렇게 적어본다.

'옆에 있는 저 안내판, 정말인가 다시 보자.' 관광이 돈이 되는 시대, 돈벌이를 위하여 옛일을 엉뚱하게 기록한 안내판에 관한 이야기다.

노을이 삼백 리, 덕유산

1898년 편찬한 무주군지인 적성지(赤城誌)에는 미수 허목(1595~1682)의 덕유산 산행기가 나와 있다. 허목은 17세기 대표적인 문인이다. 그가 이리 적었다. "남쪽 명산 가운데 최고는 덕유산인데, 아주 기이하다(南方名山絶頂德裕最奇). 늘어선 봉우리에는 안개와 노을이 삼백 리나 뻗쳐 있다(列岫烟霞三百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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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선 봉우리에는 안개와 노을이 삼백 리나 뻗쳐 있다.’ 300년 전 덕유산에 올랐던 문장가 미수 허목(1595~1682)은 능선에 내린 안개와 노을을 인상 깊게 보았다. 겨울 덕유에 오르거든, 그 광대한 안개와 노을 뒤 숨어 있는 역사를 똑바로 본다. /박종인 기자

실로 그러하다. 운수가 대통하여, 시야가 가리지 않은 날 덕유산에 오르면 300년 전 허목이나 21세기 등산객이나 덕유산에 대한 찬미는 동일하다. 바로 능선들이다. 산해(山海)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게다가 덕유산 아래 스키장 곤돌라와 리프트가 1614m 높이 향적봉 코 아래까지 올라가니, 게으르고 시간 없는 사람들에겐 이런 호사가 없다.

덕이 있고 너그러운 땅이라 덕유산(德裕山)이라 했다. 남도의 동서를 가르는 산이라, 이름과 달리 산을 차지하려는 전란(戰亂)도 많았다. 전쟁의, 전쟁과 전쟁 사이 평화의 흔적과 삼백리 노을이 두루 섞여 사람들을 부른다.

무주 제1경 나제통문

덕유산 자락에는 구천동이 있다. 계곡이다. 구씨와 천씨가 많이 살았다고 구천동이라는 말도 있고 성불한 불자가 구천 명이라 해서 구천동이 됐다는 말도 있다. '아홉'은 많다는 뜻이고 천(千) 또한 많다는 뜻이니 굽이가 험하고 깊은 골짜기라는 말도 된다. 무어가 되었든, 구천동에는 33경이 있다. 10경도 많거늘, 자그마치 33경이다. 맨 마지막 33경은 향적봉이고, 제1경은 나제통문(羅濟通門)이다. 무주군 설천면과 무풍면 사이 석모산 아래 뚫린 암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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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 제1경‘나제통문’. 일제강점기 건설한 터널이 백제-신라 통로라는 괴담으로 포장돼 국사 교과서에까지 실렸다.

이름에서 짐작하듯, 이 굴은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 국경 출입문이었다. 그 아래 흐르는 설천과 높이 50m 정도 얕되 기다란 석모산 줄기는 그 산 양쪽 지역을 확실하게 나누는 경계다. 통문 앞 다리 아래 설천에는 작은 소(沼)가 있다. '파리소'라 부른다. 전투를 벌이다 죽은 신라와 백제 병사들 시체 위로 파리 떼가 들끓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바위에는 이를 한자로 적은 '蠅沼(승소)'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설천은 옛날에 신라와 백제 경계에 위치한 국경 병참기지.'

자, '이름에서 짐작하듯'부터 '새겨져 있다'까지 여덟 문장은 몽땅 거짓말이다.

국경 출입문도 아니었다. 백제·신라 병사들 죽은 연못도 아니었다. 설천이 국경 병참기지였다는 설명은 근거가 없다. 아니, 통문 자체가 삼국시대에는 없었다.

진실은 이렇다. 나제통문은 1925년 일제강점기 무주 금광 개발을 위해 뚫은 인공터널이다. 터널 개통과 함께 설천 위로 다리가 놓이고 30번 국도가 산을 관통했다. 나제통문이라는 이름은 1963년 관광지 개발을 위해 명명됐다. 원래 이름은 '기니미굴'이었다. 삼국 통일 전 국경이 이 통문이었다는 주장은 맹랑하다. 동쪽으로 경상도 땅 경계까지는 30번 국도로 15㎞ 거리 덕산재를 넘어야 한다. 하나 더. 바위에 커다랗게 새겨진 한자 두 글자는 승소가 아니라 '鶴潭(학담·학이 있는 연못)'이다. 대한민국 여행자들은 가슴에 또 한 번 이렇게 새겨둔다. '옆에 있는 저 안내판, 정말인가 다시 보자.'

무주 사람 오재성과 기니미굴

‘나제통문’사진이 실려 있는 1996년 고등학교 국사 국정교과서 삼국시대 대목.
‘나제통문’사진이 실려 있는 1996년 고등학교 국사 국정교과서 삼국시대 대목. 나제통문은 1920년대 건설된 통로다.

1947년생인 오재성은 나제통문 동쪽 무풍면에 살았다. 그가 말했다. "전쟁이 터졌을 때, 우리 집이 통문 동쪽 이남 마을에 피란 가서 살았다. 이남 마을 이름은 그때 기니미 마을이었다. 석모산에 굴이 있었는데 다들 기니미굴이라 불렀다." 전쟁이 끝나고 1960년대, 찢어지게 가난하고 길도 제대로 없는 무주에 관광업 바람이 불었다.

천하 오지라, 잘 보존된 구천동 계곡을 관광지로 개발하자는 이야기였다. 민간에서 구천동 아름다운 곳곳에 이름을 붙이고 길을 냈다. 1961년 명승고적 33군데를 골라 이름을 붙였다. 지도를 만들어 그 명승지마다 이름 적은 종이를 만들어 핀을 꽂았다. 사진을 찍고 관광지도를 다시 만들었다. 무주 구천동 33경은 그때 만들어졌다. 1962년 4월 20일 구천동 33경이 당시 교통부가 주관한 대한민국 10대 관광지에 선정됐다.

그때 그 종이판을 만들고 핀을 꽂은 사람이 오재성이었다. 그가 말했다. "가난했으니까, 무슨 역사의식 같은 건 있을 리가 없었다. 기니미굴이라고 하면 누가 오겠는가. 그냥 관광객 모으려고 근사하게 나제통문이라고 이름 붙인 거지. 게다가 나는 어렸으니까 어른들한테 뭐라 할 처지도 아니었고."

세월이 갔는데, 이상하게 갔다. 돈벌이를 위해 만든 이름이 역사가 되더라는 것이다. 국정 국사 교과서에 당당하게 나제통문 사진이 등장하는 게 아닌가. 오재성이 말했다. "이건 아니다 싶어서 1980년에 국사편찬위원회에 갔다. 내가 이름 붙인 거다 그러니까, 아니래. 삼국시대 것이래. 그래서 뚫은 것이 일제강점기 뚫었고, 목격한 사람도 다 있다, 그렇게 난리를 치러서 1990년대 들어서야 교과서에서 사진이 빠지게 된 거지."

나제통문의 진실

'일제 때 산을 뚫어서 통로가 되었다(日治時鑿山通道).' 1957년 발간된 무주군지 적성지 기록이다. 구천동 33경이 지정되기 전 기록이다. 그런데 1967년 다시 만든 적성지 속지(續誌)에는 기록이 바뀐다. '동굴 입구는 옛날 신라와 백제 국경이니 당시 무기 쟁탈전에 대해선 말하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천여 년이 지나자 굴 동쪽과 서쪽 백성들은 풍속과 관습에 차이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순수하게 관광으로 먹고살기 위해 만든 33경 첫 경치가, 그 기이한 풍광과 전설이 뒤섞이며 역사가 되어버리고, 급기야 고등학교 교과서까지 진실된 역사라 인정하게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21세기 지방자치단체들이 속칭 '스토리텔링'이라는 명분을 들먹이며 있지도 않은 허구를 진실인 것처럼 안내판에 적어내리는 행위와 똑같다.

그런데 오재성이 말한다. "정말 역사로 기록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우리는 정말 우리 고장을 위해서, 우리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했던 일이다."

그런데 또 오재성이 말한다.

"군청에 이야기했다. 이거 잘못된 거다. 이러더라, 알지만 관광이에요, 근데 여기가 이 기니미굴이 경상도에서는 수학여행 길이에요, 백제를 평정할 때 김유신이 지나갔다 해가지고. 그런데 그게 1925년도에 뚫었다고? 그러면 어떡해요, 안 된다고 그래." 그가 말을 잇는다.

"나는 바담 풍해도 너는 바람 풍해라? 이게 가치관의 혼선이지. 고쳐야지. 그런데 아직도 나제통문이라고 하니까, 아 역사 왜곡이라는 게 바로잡기가 어렵구나. 40년밖에 안 됐는데도 바로잡는 데 40년이 아니라 400년이 걸리겠구나, 그런 생각…. 우리가 후손들한테 뭘 남겨줄 건가. 계속 거짓을 남겨줄 순 없지 않나. 거짓에서 탈피를 해야지."

무주에서 보아야 할 것들

구천동 33경을 주도한 사람은 김남관이다. 당시 육군 대령이었다. 구천동 계곡에 매혹돼 고향 무주를 발전시키겠다는 생각으로 길을 내고 절경을 골라낸 사람이었다. 구천동 초입에 그를 기리는 공적비가 서 있다. 서른세 군데나 되는 절경을 두고 '경치 인플레'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척박한 땅에 그렇게 절경지를 선정하고 길을 낸 그 마음 덕분에 지금 대한민국 사람들은 향적봉 붉은 노을 삼백 리를 쉽사리 즐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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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 칠연계곡 초입에 있는 칠연의총. 1908년 전사한 의병장 신명선과 부대원 150명이 묻힌 봉분이다.

칠연계곡 칠연의총은 반드시 가본다. 경술국치 2년 전인 1908년 항일투쟁에 나섰다가 순국 한 150여 의병들을 기리는 공간이다. 의병장 이름은 신명선이고, 전직 왕실 군인이었다. 나머지 의병부대원 이름은 모른다. 그들이 칠연계곡에서 몰살당하고 훗날 1969년 향토예비군이 유해를 수습해 만든 집단분묘가 거기 서 있다. 이곳 안내판은 썩 훌륭하다. 계곡 등산로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 쉽게 발길이 닿지 않는다. 되도록 꼭 가본다. 아름답고, 처연하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1/24/201801240000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