習靜偸閑

우리 역사는 깊다 1, 2

푸른하늘sky 2018. 1. 3. 00:33
경복궁과 조선총독부의 1926년 이후 모습. 조선총독부 건물 주변에 잔디밭이 보인다. 일제는 경복궁 전각을 헐어버린 자리에 한국인들에게 죽음을 상징하는 잔디를 깔았다. 푸른역사 제공
경복궁과 조선총독부의 1926년 이후 모습. 조선총독부 건물 주변에 잔디밭이 보인다. 일제는 경복궁 전각을 헐어버린 자리에 한국인들에게 죽음을 상징하는 잔디를 깔았다. 푸른역사 제공
일제가 총독부 옆에 잔디 깐 이유는
경복궁의 죽음 알리고 조롱하는 뜻
동대문 옆에 군사시설이 많았던 이유는
서울의 서고동저 지형 때문
역사와 언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바람직한 공동체의 미래상 제시
우리 역사는 깊다 1, 2
전우용 지음/푸른역사·각 1만6500원, 1만7500원


일제는 조선총독부(중앙청) 건물 주변에 왜 잔디밭을 깔았을까. 1915년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산업박람회)를 열면서 대다수 전각을 헐어 가건물을 만들었고, 총독부 건물이 완공되자 전각이 있던 자리에 잔디를 조성한 것이다. 잔디는 한자로 사초(莎草)라고 하며 조상 무덤의 잔디를 갈아주는 일은 개사초(改莎草)라고 한다. 일제는 잔디가 한국인에게 죽음을 상징한다는 걸 알고 일부러 잔디를 심은 것이다. ‘죽은 왕조’의 궁궐, 경복궁은 우람한 총독부 건물 뒤켠에서 누추하고 초라했다.


한국인이 다니는 학교는 (특별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보통학교와 고등보통학교로 불렀고, 오늘날의 국립현충원에 해당하는 장충단 옆에는 일본인들을 위한 공창(신마치 유곽)을 설치해 모욕을 가했다. 장충단 제단 자리에는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의 이름을 따 박문사라는 절을 지었다.


역사학자 전우용의 새 책 <우리 역사는 깊다>는 이처럼 작지만 중요한 역사적 사실들로 가득하다. 한양대 동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교수이자 서울시 문화재위원이며 <서울은 깊다> 등의 저서로 유명한 그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보따리를 능수능란하게 펼치는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풍납토성과 암사동 선사주거지가 발견될 정도로 엄청난 물난리가 났던 을축년(1925년) 장마 때다. 양화나루 높은 강 언덕에 있는 고양군 연희면 망원리가 폐허로 변하자 주민 중 절반 가까운 45가구가 인근 합정리로 옮겨 살게 됐다. 당시 망원리 사람들은 양반 행세하면서 이웃 동네 사람들을 깔보는 못된 버릇이 있었다. 새 정착지가 어느 정도 정비되자 이들은 “상놈을 구장(오늘날의 동장)으로 모시고 살 수 없다”면서 구장을 바꿔달라고 고양군청에 집단 민원을 넣었다. 합정리 원주민들은 ‘물에 빠진 사람 건져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중외일보>는 이 사태를 ‘지금 이 시대에 양반 자랑’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지은이는 이렇게 일갈한다. “양반 상놈 따지는 문화가 사라진 지 고작 한 갑자 만에, 교육과 취업, 승진 등 일상생활의 거의 모든 면에서 현대적 신분제가 재탄생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기업과 학교, 교회를 세습하는 일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로 취급되며, 심지어 대통령을 뽑을 때에도 혈통을 따진다. 재벌 2~3세 경영인이 자기 회사 종업원을 종 부리듯 하는 것은 일상다반사이며, 정규직 종업원들은 비정규직과 같은 식당을 사용하는 것조차 거부한다.”


전우용의 역사는 어제를 비추는 거울에 그치지 않고 내일을 내다보는 망원경으로 나아간다. 상식에 기초한 균형 잡힌 역사관으로 우리 공동체가 펼쳐나갈 바람직한 미래를 그려보인다. 불과 10년만 지나도 부끄러운 역사로 기록될 현재를 낯두껍게 써나가는 세력을 향한 경고도 잊지 않는다.


“중앙청 건물이 헐린 지 오래되었고, 정부 기능도 여러 곳으로 분산되었다. (…) 나 개인적으로는 도로에 둘러싸인 ‘광장’도, 그 광장 이름을 세종광장이라 하지 않고 생뚱맞게 일제 강점기 광화문통을 연상시키는 ‘광화문광장’이라 한 것도, 세종대왕 동상을 궁궐 밖 어정쩡한 곳에 세워놓은 것도, 그 탓에 이순신 장군이 세종대왕의 호위대장처럼 보이게 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대다수 한국인의 의식 속에 자리 잡은 세종대왕의 이미지요, 세종대왕의 정치 철학이다.”


그러면서 세종대왕의 온천 행차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온천 갔다 돌아오는 길에 백성들이 보이지 않자 세종이 그 지방 수령에게 연고를 물었다. 수령은 “어리석은 백성들이 임금의 이목을 어지럽힐까 봐 길가에 나오지 못하게 했다”고 답했다. 세종은 불같이 화를 냈다. “네놈이 무엇이기에 감히 임금과 백성의 사이를 가로막느냐?” 이것이 바로 세종의 정치 철학이었다. 국민을 만나기는커녕 기자회견조차 하지 않는 박근혜 대통령 들으라고 하는 말 같다. 지은이가 보기에 “대통령이 재래시장에 가서 상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서민 코스프레’라고들 하지만, 이는 사실 ‘임금 코스프레’다. 임금이 시정에 나아가 상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조선 후기에 시작된 관행이다.”


대보름 민속놀이인 ‘돌싸움’이 실은 군사훈련에서 비롯했으며 서낭당 주변의 돌탑도 마을 단위의 무기 저장소였다는 사실, 독립협회는 청나라 위안스카이(원세개)의 내정 간섭에 불만을 느낀 고종이 세운 ‘관변단체’였으며, 지금의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자리에 있었던 훈련원을 비롯한 군사시설이 주로 서울의 동쪽에 있었던 이유는 ‘서고동저’ 지형에서 산이 낮은 동쪽이 방어에 취약했기 때문이라는 해석, 국내 최초 오케스트라였던 대한제국 군악대의 후신인 이왕직 양악부가 해체된 뒤 일부 단원들이 내다 판 악기가 오늘날 낙원상가 악기점의 효시가 되었을지 모른다는 추정 등은 지은이가 풀어놓는 박물관 같은 세상의 일부에 불과하다.


1899년 5월20일 전차가 일반 영업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6일 뒤, 예닐곱 살 먹은 사내아이가 철로 위에서 놀다가 전차에 치여 목숨을 잃자 아이 아버지 등이 전차에 달려들어 도끼를 휘두르고 불태워버린 ‘전차소타사건’이 발생했다. 푸른역사 제공
1899년 5월20일 전차가 일반 영업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6일 뒤, 예닐곱 살 먹은 사내아이가 철로 위에서 놀다가 전차에 치여 목숨을 잃자 아이 아버지 등이 전차에 달려들어 도끼를 휘두르고 불태워버린 ‘전차소타사건’이 발생했다. 푸른역사 제공
그의 독특한 역사 해석은 한자를 비롯한 언어 지식에서 비롯하는 바가 크다. 예를 들어 전차가 처음 영업을 시작한 지 6일 뒤, 예닐곱 살 먹은 사내아이가 철로 위에서 놀다가 전차에 치여 목숨을 잃자 아이 아버지 등이 전차에 달려들어 도끼를 휘두르고 불태워버린 ‘전차소타사건’에 대한 설명에서, 지은이는 ‘문명의 이기(利器)’의 ‘이’(利)는 ‘편리하다’와 ‘날카롭다’는 뜻을 다 가진 글자라고 깨우친다. 연료용 알코올이 서민용 음료가 되면서 전통 증류주들이 사라진 사연을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알코올의 어원부터 시작한다. “아랍어의 ‘알’은 영어의 ‘the’에 상당하는 것으로 알라, 알카에다, 알자지라처럼 ‘알코올’도 아랍어다. 이 알코올 제조법은 곧 전 세계로 확산되어 재료와 숙성법에 따라 위스키, 코냑 등으로 발전했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말 몽골제국을 거쳐 전래되었다.”


청일전쟁 이후 국내에서 중국인의 위상이 크게 떨어졌는데, 특히 1930년대 들어 일제에 의한 중국인 적대 풍조가 극에 달했다는 대목은 지금도 곱씹어 볼 만하다. 1931년 7월 일본 관동군의 사주를 받은 <조선일보> 장춘특파원 김달삼이 만주의 만보산에서 농수로 공사를 하던 조선인 농민이 중국인 관헌에게 피살당했다는 거짓 정보를 본사에 전달했고, <조선일보>는 호외를 발행해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허위보도에 속아 흥분한 조선인들은 국내 화교들을 난타하고 집과 가게를 불태웠다. 관동대지진 때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에게 했던 짓이, 8년 뒤 조선 땅에서 조선인들에 의해 중국인들을 상대로 재연되었다. ‘비단이 장수 왕서방~’으로 시작하는 1938년 김정구의 노래 ‘왕서방연서’가 공전의 히트를 친 것도, 대다수 한국인의 의식 속에 반중국인 정서가 깊이 자리 잡은 결과였다.


“한국 근현대의 ‘외국인 혐오증’은 민족주의의 소산이 아니라 비루한 ‘민족 서열의식’의 소산이다. (…) 우리 안에 들어온 세계를 끌어안지 못하면, 우리가 용납될 세상도 줄어들게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