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이 사람을 살리는 산이라면, 민족의 영산 지리산은 사람을 품은 산이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도 모를 그 너른 어머니의 품 안으로 사람이 모이고 인물이 나는 이유이다. 지리산 끝자락, 겨울에 보는 ‘누 백 년 늙은 퇴옥’은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양반문화의 흔적과 체취를 품은 고택을 찾아 ‘예를 구하는(求禮)’ 고장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동 운조루(雲鳥樓)를 찾았다. 문경새재를 넘다 채찍으로 호랑이를 쳐 잡은 담대한 기개를 가졌으며 낙안부사를 지냈던 경상도 출신의 류이주라는 분. 어찌해서 전남 구례에 와서 “구름 위를 나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을 건립하게 되었는지를 알아보았다.
구름 위를 나는 새가 사는 아름다운 집, 운조루
운조루를 세운 류이주는 지금의 대구 동구 입석동 출신이다. 1726년에 태어난 그는 힘이 장사라 스물여덟에 무과에 급제한 후 마흔여섯에 낙안부사가 되었다. 영조 말엽 사색 당정에 휘말려 구례로 낙향한 그는 집을 짓기 위해 땅을 파던 중, 거북처럼 생긴 돌을 발견하고는 ‘하늘이 이 땅을 아껴두었던 것은 비밀스럽게 나를 기다린 것’이라며 쾌재를 불렀다고 한다. 이 집터는 남한 3대 길지의 하나로 금환낙지의 형세와 국면을 이루고 있다고 전해진다. 영조 52년(1776) 9월에 상량식을 했고, 6년 만에 용천 부사로 재직할 때 지금의 99칸(현존 73칸) 대저택이 완공되었다고 한다.
운조루란 이름은 원래 사랑채 당호로써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 또는 ‘구름 위를 나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가장 그럴듯한 것은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의 칠언율시에서 첫머리 두 글자 운(雲)과 조(鳥)를 취했다는 것이다. 먼저 운조루의 건물형태를 살펴보자. 흔히 전라남도의 민가는 비옥하고 넓은 평야 지대의 생활환경과 맞게 홑집형의 'ㅡ'자집이나 'ㄱ'자집 또는 이들을 조합하여 만든 튼 집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운조루의 경우 경상도 사람이 창건주라는 사실답게 경상북도에서 많이 볼 수 있는 'ㅁ'자집을 하고 있으며, 구조양식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 서까래를 놓는 민도리집이다. 여기에 지붕은 사랑채, 안채가 이어져 있으며 팔작지붕 구조로 되어 있다. 이처럼 'ㅁ'자집에 사랑채가 어우러진 모양은 경상도 북부지역에서 종종 보인다. 안동지방의 충효당과 양진당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운조루의 대표적인 자랑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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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조루는 최초 건립 당시 99칸이었으나 지금은 73칸이 남아있다. 운조루가 널리 알려진 이유는 무엇일까? 운조루에는 두 가지 큰 자랑거리가 있다. 첫째는 누구라도 식량을 퍼갈 수 있게 한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이 새겨진 뒤주(쌀독)이다. 운조루의 사랑채에서 안채로 가는 공간엔 쌀 두 가마니 반이 들어갈 수 있는 나무로 만든 쌀독이 있다. 쌀독 아랫부분엔 조그만 구멍이 뚫려있으며, 그 마개 위에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네 개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누구나 능히 열 수 있다」는 의미다. 배고픈 이들 누구나 먹을 만큼 자신의 쌀을 가져가도록 놓아둔 것이다. 직접 쌀을 주게 되면 자존심이 상할지도 모르는 것을 배려한 것이다. 이 뒤주는 집 뒷골목으로 들어올 수 있는, 잘 보이지 않는 자리에 뒀다. 운조루를 찾는 트래블피플이라면 가난한 이웃을 배려하는 주인의 깊은 마음씨를 오랜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뒤주에서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운조루의 두 번째 자랑거리는 유난히 낮게 설치된 굴뚝이다. 여기서는 지붕 위 높이만큼 솟은 굴뚝을 볼 수 없다. 대신 건물 아래의 기단 쪽에 구멍을 내어 연기가 통하도록 했다. 밥 짓는 연기가 널리 퍼지는 것을 막아 끼니를 거른 이웃들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라고 한다. 입에 풀칠하기도 쉽지 않았던 어려운 시절이었으니, 큰집에서 배어 나오는 밥 짓는 냄새만으로도 불평등한 세상을 탓할 서민들이 부지기수였으리라. 굴뚝이 높아야 연기가 잘 빠진다는 걸 집주인이나 목수가 몰랐을 리 없겠지만, 집주인의 타인을 배려하는 흔적을 운조루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밖에도 운조루 입구 높이 솟은 솟을대문에는 류이주가 문경새재를 넘다 물리쳤다는 전설의 호랑이 뼈가 걸려있는데, 이는 잡귀나 병마와 같은 나쁜 기운이 집안으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함이라고 한다. 누군가는 호랑이 뼈라고 하고, 또 다른 이는 말 뼈라고도 한다. 겨울에 보는 ‘누 백 년 늙은 퇴옥’은 어떤 모습일까 상상하면서 찾은 운조루에서, 시대를 앞서 이웃에 대한 배려와 나눔을 몸소 실천한 류이주의 「타인능해」정신이라는 한 덕목이라도 배워간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나눔과 배려의 학습장, 운조루 유물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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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조루를 둘러보았다면 다음은 운조루 유물전시관도 찾아 타인능해의 정신을 배워보자. 운조루의 나눔과 배려의 정신이 가득한 유물전시관은 2012년 7월에 그 공사를 시작했다. 전시실과 주차장 및 부대시설 등을 갖추어 2014년 12월에 준공하였으며, 2015년 12월 운조루로부터 유물을 기탁받아 2016년 4월에 문을 열었다. 운조루의 역사는 물론 삶의 모습까지 둘러볼 수 있는 문화공간인 운조루 유물전시관. 이곳에 전시된 유물은 운조루에서 대대로 소장해 온 것들이다.
운조루 유물전시관에 공개된 유물들을 살펴보면 운조루를 지은 류이주(柳爾胄, 1726~1797) 홍패교지(홍패교지는 문, 무과에 최종 합격한 합격증서로서 당시 류이주의 합격등수는 병과 제5인이었다), 5대손 류제양이 구한말 구례 지역의 사회변화와 풍습을 남겨놓은 일기 ‘시언(是言)’이 있다. 또한, 7대손 류형업이 약 40여 년간 대한제국의 패망부터 3·1운동을 비롯해 근대화 과정까지 기록해놓은 일기 ‘기어(紀語)’도 만날 수 있다.
운조루에서 사용한 생활민속품과 고문서, 영정, 행장 등도 진열되어 있으며 특히 조선 최고의 명당자리라는 금구몰니를 상징하는 돌 거북 모형(건축 당시 출토된 돌 거북은 도난당했다고 함)도 전시되어 있다. 또한, 조선 후기 서예에 뛰어났던 고동 이익회필 운조루 현판이 보관 전시되어 있다. 실제 운조루 저택에는 현판의 도난을 방지하고자 가판을 설치해 놓았다. 누구나 능히 열 수 있는 나눔 쌀독의 정신을 전시한 운조루 유물전시관은 이웃에 대한 나눔과 배려의 정신을 배울 수 있는 실천 교육의 학습장으로 기대된다.-
출처:http://www.travelitoday.com/read/contentsView/155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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