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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장현식(張鉉植)님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며 - 장두원-

푸른하늘sky 2019. 3. 3. 22:59

 

 

 

 

애국지사 장현식(張鉉植)님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며 - 장두원-

   송재(松齋) 또는 일송(一松) 장현식님은 1919년 3.1 운동과 대동단 사건, 대동신문 재정 책임자, 상해임시정부로의 자금송금과 조선어학회사건 등으로 도합 4년간의 옥고를 치르시었다는 사실이 국사 편찬위원회와 독립운동사 자료집에 기록되어 있다.

   장현식님은 1989년 건국 포장 독립장을 추서한 뒤 이듬해 1990년 훈장격을 높혀 건국 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오늘 송재 장현식 종숙(從叔)님의 고택이 고향 서도에서 전주의 한옥마을로 옮겨져 전통문화학교로 활용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서울로 재촉했다.

   1932년에 지어진 장현식님의 저택은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서도리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당신의 만석이 넘는 큰 재산을 모두 독립운동과 육영사업에 쏟아 붓고 북한으로 납치되었다. 만석꾼의 후예인 아드님 장홍(張泓)님은 가사(家事)를 추스를 길이 없어 쓰러져 가던 고가를 버려진 형태로 두었다가 전주시(시장 송하선)에 헌납했다. 전주시 당국은 한옥마을로 옮겨 우리의 전통을 익히는 전통 체험 학습장으로 깔끔이 단장되어 사용하고 있어 기분이 상쾌했다.

 

     송재 장현식 선생

   

송재 장현식님은 1896년 9월 17일 4대 독자요, 인동 장씨 중 서도장 씨 종손으로 태어나셨다. 1910년 경술국치에 이르자 장현식님의 종조부이신 일유재(一卣齋) 장태수(張泰秀) 참판(參判)께서 낙향하여 27일간의 절식(絶食)으로 자진(自盡)하시자 (건국공로훈장추서) 장례를 치른 뒤, 울분을 삼키면서 곧바로 14세의 나이로 서울로 올라와 항일의 기치를 높이 들고 이 길로 나섰다. 약관에 이르러 장현식 선생은 3.1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대동단(大同團) 사건과 대동신문 발간

   장현식님은 1919년 대동단에 가입하고 대동신문의 재정 총책임을 맡아 이 신문을 발행 배포했다.

   대동단은 상해에 법무대신을 한 김가진(金嘉鎭)님을 총재로 하고 국내에서는 전협(全協)님이 회장을 맡아 고종황제의 다섯째 아들인 이강(李堈)공을 임시정부의 상징적 인물로 모시기 위해 함께 가던 중 중국 라오닝성 단동에서 왜경에 검거되어 미수에 그쳤고 회장 전협씨와 종숙 장현식님 등 관계 인사 모두가 서울로 압송되어 3년형을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대동신문은 1만부씩을 발행했고, 고물상, 엿장수, 학생 등으로 위장하여 배달이 이루어졌다. 신문내용은 독립운동상황을 알리고 모든 조선인들이 이 독립운동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이 신문 재정 책임을 맡은 장현식님은 1년 징역에 2년 집행유예의 언도를 받았다.

   장현식님은 상해 임시정부가 1919년 설립되자 조선청년들을 상해로 보내는 작업이 필요했고 조선인 운송에 필요한 많은 자금을 지원해왔다.

 

조선어학회 사건 때 혀에 대못질 고문

   장현식 님은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남도 홍안 경찰서에서 1년간 옥고를 치른 뒤 해방되어 석방되었다.

   조선어학회사건 당시 주요인물인 이극노 님이 알퐁소 도데의 단편『마지막 수업』의 국어사랑, 나라사랑에 관해 설명했다. 아무리 남의 나라 노예가 된다고해도 자기나라 말을 간직하고 있으면 그것은 마치 죄수가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 이 소설의 주요 대목이다.

   장현식님은 알퐁스 도데의 단편소설 내용을 설명 듣고 곧바로 조선어사전 편찬과 이 작업 추진에 필요한 자금 중 본인이 3천원, 나머지는 지인의 자금 천 4백원을 조달하여 편찬 작업에 들어가도록 했다. 장현식님은 이 때 취조중 일경에 의해 당신의 혀에 대못을 박는 최악의 고문을 당하여 말더듬이로 여생을 살았다.

   제2대 민의원 출마 당시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유권자들은 장현식님을 가리켜 “말 못하는 장현식”으로 비아냥대는 광경을 보아왔다.

   장현식님은 이중화, 이우식, 김도연, 이인, 정태진님과 함께 결사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행위로 치안유지법 제 1조 내란죄의 죄목을 받고 홍원 경찰서에서 1년간의 취조와 고문을 받다가 해방으로 풀려났다.

 

국내파 항일문화운동 전개

   종숙 장현식님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는 조선의 청년인재를 길러내어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언론을 통해 국민의 자각심을 깨우쳐야 한다는 취지에서 항일을 위한 문화운동을 전개하고 나섰다. 이후에는 상해, 미국에서 벌어지는 해외파에 대조되는 말로 국내파 항일 문화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장현식 선생의 고택은 현재 전통문화학교로 활용되고 있다(전북 전주시 소재)

 

장현식님은 김성수님이 중앙고등보통학교(지금의 중앙고등학교)를 설립할 당시 학교 건물 세칸중 자신이 두 칸 김성수님이 한 칸을 짓도록 해서 김성수님의 이름으로 등록토록 하고 스스로는 뒤로 물러섰으나 이 학교는 현재 설립자 명단에 장현식님 이름이 새겨져있다.

   김성수님이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인수를 위해 현식님과 상의하자 이 학교 1, 2층 건물 8칸을 지어 헌납하여 역시 재단 초대 설립자 명단에 들었다. 현식님은 또 동아일보사 창간 당시 인쇄 시설 일체를 구입하여 헌납하고 동아일보사에서 17년간 감사 위원장을 맡아 오다가 1950년 6월 28일 북한으로 납치되었다.

   현식 조부는 2006년 북한 당국으로부터 아드님 장홍(張泓)님에게 성묘하도록 하라는 연락을 받아 평양부근의 재북인사릉에 안장되어있는 부친의 성묘를 하고 돌아왔다. 북한에서도 현식님의 항일 구국운동을 평가했다.

   장현식님은 대동단 사건, 대동신문 발행, 조선어학회 사건 등에 연루되어 도합 4년간 옥살이를 한 사실이 국사편찬위원회와 독립운동사 자료집에 기록되어있다. 장현식님은 인동(仁同) 장씨(張氏) 중 서도(西道) 장씨의 4대 독자 종손으로서 취조 받을 때마다 서도문중에서 올라와 “누대(累代)의 장씨 문중의 대를 이을 종손이니 선처하라“는 간절한 연판진정서를 왜경에 전했다. 장현식님은 면회 온 집안 어르신들에게 오히려 문중에서도 항일의 기치를 높이 들어 함께 동참하라고 요구했다는 일화가 당시 면담한 어르신들의 설명이었다.

   장현식님은 명륜동에서 기거할 당시 항일운동을 하던 소설가 이광수(春園)님이 거처가 없다는 소식을 듣고 집 한 채를 마련해주었으나 얼마 후 춘원 이광수님이 변절하게 되자 집을 방문하는 춘원을 문전에서 퇴박했다는 일화도 있다. 현식조부는 이 밖에도 단국대학교 건립 금구초등학교 건립에도 큰 자금을 지원했다.

   장현식님은 1948년 전락북도 제2대 도지사에 임명되었으나 당시 주한미군사령부의 지나친 내정간섭에 호통을 치다가 취임 백일 만에 도지사자리를 물러났다.

   전주 한옥마을 고택에는 장현식님의 걸어온 길(비석)과 함께 님이 심은 소나무 한 그루가 이젠 아름드리가 되어 그의 걸어온 54년간의 인생 격정을 지켜주고 있다.

  

 불망의 넋, 불귀의 혼을 님이라 불러보며____

   푸르고 푸른 님의 옷깃, 내 마음에 시름을 안기네요.(靑靑子衿, 悠悠我心 : 시편 鄭風편)을 읊조리며 종손자 두영(斗永)군과 이 집을 나섰다.

 

 

장두원

 

애국지사 장현식 선생의 종질, 現 아시아투데이 부회장   

KBS 보도국 TV 편집차장, KBS 전주방송 총국장   

 KBS 정치부장 대우, 문화부장, 해설위원, 보도본부 주간   

한국국제교류재단 기획부장, 국제 인프리사리오회의 한국대표단장  

한국문학번역금고 상임이사, 세종대 신문방송학과 겸임교수

 

  1980년 5.18 당시 KBS 뉴스담당 편집부 차장으로 재직 중,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국내에서 첫 보도함으로써 신군부세력에 의해 강제해직되었다. 필자의 광주사태 보도로 전국민이 광주실상을 알게 되자 신군부는 살상을 중지하고 수습의 길을 걸으니 광주시민 죽음을 막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필자의 당시 활동은 5.18민주화운동 기록물들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는 시발점 역할을 하였다. 2006년 모교인 전주 신흥고등학교에서 '자랑스런 신흥인' 으로 선정, 2012년 금구초등학교에서 개교 100주년 '자랑스런 동문'으로 필자 한 사람만 선정되었다. 필자는 현재까지도 언론인 출신으로서 사회 다방면에 걸친 활발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방송 70년사(공동집필)』, 『언론, 그 일그러진 자화상』이 있고 이 책은 스스로 언론인이면서 언론이 사리를 찾아 진리를 도치하고 있는 사례를 꼬집고 5.18의거의 진상 폭로의 후일담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 인동 장씨 중 서도 장씨 가첩(家牒) 가장록(家狀錄)을 엮어 세계 유수 대학 도서관과 국내 17개 도서관에 기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