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詩한

블랙홀 / 오탁번

푸른하늘sky 2020. 1. 27. 07:33

[시니어 에세이] 누가 본다고 그래?
                                                           ▲일러스트=이철원

블랙홀 / 오탁번

같은 동네에 사는 이종택과 함께
백운지 아래 방학리에 사는
초등학교 동창 김종명이네 집에 놀러 갔다

멍석에 널린 고추가 뙤약볕같이 따갑고
함석지붕에는 하양 박이 탐스러웠다
누렁이 한 마리가 마당에서
제 똥냄새 맡다가 꼬리를 쳤다

찰칵! 한 장 찍고 싶은
우리 농촌의 옛 풍경 속으로
재작년 추석 무렵에 무심코 쑥 들어갔다

안방에서 머리가 하얀 안노인네가 나왔다
어릴 때 친구 집에 놀러 가면
나는 어른들께 답작답작 큰절을 했다
그러면 친구 어머니가 씨감자도 쪄주고
보리쌀 안쳐 더운밥도 해주곤 했다
종명이 어머니가 여태 살아계신구나!
나는 얼른 큰절을 하려고 했다

그순간 몇 만분의 1초의 시간이 딱 멈추었다
종명이가 제 어머니에게 말하는 소리가
우주에서 날아오는 초음파처럼 아득하게 들려왔다

--임자! 술상 좀 봐!
초등학교 동창 마누라에게 큰절할 뻔한 나는
블랙홀에 빠진 채 허우적거렸다

머리가 하얀 초등학생 셋은
무중력 우주선을 타고
저녁놀 질 때까지 술을 마셨다
--방학리에 왔으니 학 한 마리 잡아다가
안주로 구워먹자 씨벌!
종택이와 종명이는 내 말에 장단을 맞췄다
--그럼 그렇고 말고지, 네미랄!
광속보다 빠르게 블랙홀을 가로지르는
학을 쫓아가다가
그만 나는 정신을 잃고
종택이 경운기에 실려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