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詩한

참 빨랐지 그 양반 / 이정록

푸른하늘sky 2018. 12. 17. 12:35

Green Wheat Field with Cypress - Vincent van Gogh



참 빨랐지 그 양반 / 이정록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면내에서 오토바이도 그중 먼저 샀고 달리기를 잘해서 군수한테 송아지도 탔으니까

죽는 거까지 남보다 앞선 게 섭섭하지만 어쩔 거여 박복한 팔자 탓이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 보던 날

나는 사카린도 안 넣었는데 그 뜨건 커피를 단숨에 털어 넣더라니까

그러더니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더라고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양반이었지

겨우 이름 석 자 물어본 게 단데 말이여 그래서 저 남자가 날 퇴짜 놓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서 타라는 거여 망설이고 있으니까 번쩍 안아서 태우더라고

뱃살이며 가슴이 출렁출렁하데 처녀적에도 내가 좀 푸짐했거든

월산 뒷덜미로 몰고 가더니 밀밭에다 오토바이를 팽개치더라고

자갈길에 젖가슴이 치근대니까 피가 쏠렸던가 봐

치마가 훌러덩 뒤집혀 얼굴을 덮더라고 그 순간 이게 이녁의 운명이구나 싶었지

부끄러워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번에 끝장이 났다니까

꽃무늬 치마를 입은 게 다행이었지 풀물 핏물 찍어내며 훌쩍거리고 있으니까

먼 산에다 대고 그러는 거여 시집가려고 나온 거 아녔냐고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역사가 한순간에 끝장나다니 하늘이 밀밭처럼 노랗더라니까

내 매무새가 꼭 누룩에 빠진 흰 쌀밥 같았지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덕분에 그 양반 바람 한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되는 걸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먹겠어

정말 날랜 양반이었지



                               -  시집 <정말> (2010, 창비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