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 Edvard Munch (1863~1944)
생(生).사(死).애(愛).증(憎)에 넓은 공감대(共感帶)
불안
뭉크의 분열증 증세는 1890년 도라 라우젠과의 연애로 고민과 알콜에 의해 더욱 심화되어지면서 신경 쇠약 상태가 한때 계속되어지기도 하는데, 공허한 듯하면서도 무엇의 의미를 찾으려는 기묘한 눈을 크게뜨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검은 옷의 군상(群像)의 표정은 뭉크의 자주 다루어진 주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정면성(正面性)에 대하여 혹간 말하기를 분열병 심리에서의 표현성, 친화성(親和性)이라고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나, 뭉크의 근원적인 위문이나 불안이 이와 같은 일련의 작품을 창작토록 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저녁놀을 배경으로 하여 나타난 산과들에서의 곡선적 효과는 불안한 감정을 더욱 강하게 느끼도록 한다. 유화에서 뿐만 아니라 목판화에서도 동일한 내용의 표현을 많이 남기고 있다.
절규
뭉크의 작품에서는 항시 사랑, 죽음, 불안 등이 내재되어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정신 분열적 두려움에 대한 자신의 고백이면서 또한 생활과 심리학적인 발전의 사건들과 깊은 관계를 의미하고 있다. 이 작품은 뭉크의 대표적인 것 중 하나로서 원근법적인 방법을 구사한 중에 화면 구성을 대담하게 사선으로 구획하였으며, 강렬한 색채의 대비는 의외적이라기보다 상호 관계에 의한 다이내믹한 효과를 보여 주고 있다.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눈과 입을 크게 열고 있는 것은 절규하고 있는 상태로 느껴오기도 하지만, 사실은 자연을 통해 크게 부르짖는 소리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유연한 곡선과 강직한 직선과의 대비는 아아르 누보의 장식의 한 형태이며, 붉은 구름은 마치 불타고 있는 것처럼 일몰의 빛남과 동시에 공포의 화면을 나타낸다.
절규
뭉크는 판화를 회화 못지 않게 중시하였으며 회화만큼 판화 작품을 많이 제작하였다. 유화에서의 테마를 판화로 옮기기도 하였으며, 제목을 바꾸기도 하고, 석판이나 목판으로 변화시켜 표현하였다. 뭉크는 판화의 기법적인 면에 여러 가지 혁신을 가져다 주었는데, 동일한 작품 속에 몇 가지 기법의 판종을 병용하기도 하고, 합성하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혁신을 실행하였다. 1895년부터 1897년까지 파리에 머무는 동안 판화에 대한 기술을 크게 연마하였는데, 이 작품도 이 때 제작되어진 석판화로서 부드러운 모필(毛筆)에 의한 풍요로운 곡선은 장식적인 윤곽을 지니는 한편, 동세에 의한 조형적 화면 구성은 긴장된 가운데 현대인의 불안한 감정을 적절하게 표현하여 주고 있다. 유화에서와 같이 동일한 구도를 채택하였는데 석판화에서는 더 한층 힘있게 표현되어지고 있다.
마돈나
'여자의 사랑은 육체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죽음과 동등시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듯이 뭉크에게 있어서 여자의 헌신적인 사랑이란 수태(受胎)하여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으로 알고 있었으며, 이러한 바탕을 발전시킨 모티브가 <마돈나>이다. 작품에서 보여지듯이 마돈나 상(像)을 둘러싸고 정충을 그렸으며 왼쪽 아래 부분 구석에는 뼈만 앙상한 태아가 웅크리고 있다. 풍만한 육체에 자유 분방한 머리카락의 곡선의 의미, 여기에서 사랑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을 때마저, 죽음에 대하여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 사랑과 죽음은 서로 공존하며 동시에 나타나고 여자는 남자뿐만 아니라 자신까지도 위험케 하는 죽음에 지배되는 동물로서 표현되어지고 있다. 이 '사랑'의 연작은 확대되어 '이것은 사랑과 죽음에 관한 것이다.' 라고 하면서 평생 다루었다.
마돈나
뭉크는 여자를 세 가지 상으로 보았는데 하나는 꿈꾸는 여인, 또 한편으로는 삶을 갈망하는 여인, 또 체념하는 여인이었던 것이다. 이 <마돈나>에 나타난 여인에 대하여 '몸을 바치는 여자-성모의 고통스런 아름다움에 싸인다.' 라고 쓰기도 하고, '모든 세계의 움직임이 정지하는 순간, 너의 얼굴은 지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포함하고 있다. 익어가는 과일처럼 새빨간 너의 입술은 고통 때문이기도 한 것처럼 달싹 벌어진다. 그것은 시체의 미소이다. 바야흐로 삶이 죽음에게 손을 내민다. 죽어서 사라진 무수한 세대와 미래의 세대와의 사이에 인연이 맺어진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뭉크의 나이 30세이던 1893년 12월, 베를린에서 <생의 프리이즈> 연작, <흡혈귀>, <절규>, <입맞춤>, <질투> 등의 연작을 발표하였는데 중심이 된 것은 이 <마돈나>였다.
그랑 카페의 입센
이 작품을 그린 1906년(43세)에 베를린에서 공연한 입센의 '유령', '헤다 가블러'를 위한 무대 장치의 밑그림을 제작하였다. 당시 32세이던 1895년 오슬로의 브롬쿠비스트 화랑에서 개인전이 개최되었는데 이때에 보이콧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논란의 대상이 된 후 전시 일주일 만에 그만두게 되었다. 이 때 개인전을 방문한 입센의 지지와 격려를 얻게 된다. '이러한 작업은 내게는 매우 즐겁군, 나를 믿게. 사태는 내 편을 든 것과 같이 틀림없이 자네 편을 들게 될거야. 적이 많을수록 친구도 많은 법이라네.'하고 입센은 격려를 하여 주었는데, 이 때 뭉크의 마음에 강한 용기를 갖게 하였다. 전체의 구성이 불안정한 어지러움을 특성있게 주입시켜 주고 있다. 석판화 작품에서는 뭉크의 섬세한 소묘의 우수성을 발견할 수 있다.
사춘기
뭉크는 소녀의 모습을 통하여 성(性)에 눈뜬 청춘기의 첫 반응의 특징인 성적인 자기 암시와 또 한편으로는 움츠러드는 애틋하면서도 청순한 사춘기 소녀를 표현하려 했다. 이 모티브는 뭉크가 여러 가지 방법에 의한 작품에서 선택하여 등장시키고 있다. 유화로 처음 제작한 것은 1886년인데, 1890년 공교롭게도 불에 타 없어지므로 해서 다시 이 작품을 제작하였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뭉크의 여성 초상화나 또 일반적인 여성을 표현한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여성 내면을 감추려는 듯 손을 앞에 가지런히 놓고 있는 것이다. 여기 이 작품에서 표현되어진 소녀는 사춘기 특유의 감수성이 강한 동경과 불안이 혼합되어진 내면 세계를 풍부하게 나타내고 있다.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는 얼굴과 불안을 상징한 듯한 그림자가 인상적이다.
누이동생 잉게르의 초상
당시 29세 때 잠시 귀국하여 9월에 오슬로의 토스톨프고렌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갖게 되는데 이때 발표한 초기의 대표작이다. <검은 색과 자주색의 하모니>라는 제목으로 출품되었던 초상화로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눈에서 외부로부터 내면 세계를 투영하려는 의지를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정면성에 의한 시선의 초점은 뭉크 세계의 특색이기도 하다. 인물의 표현을 정교하게 나타내고 있는 듯하면서도 특징적인 것 외에 불필요한 요소는 생략하였고, 간결한 형태와 조화를 갖춘 색채는 조형적 균형을 이루고 있다. 구도적인 면에서 좌우 대칭으로 이루어진 형태는 강인하면서도 엄숙한 고전적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인물 하단부에 바닥을 가로지르는 수평선과의 관계는 화면의 긴장을 강하게 느끼게 하면서 순수한 감동을 더 한층 주고 있다.
입맞춤
이 주제는 목판화, 유화 등에서도 잘 표현되어지고 있기는 하나, 동판화에서 볼 수 있는 간결한 선에 의한 담백한 효과를 특징있게 나타내고 있다. 사랑에 향한 눈과 마음은 상식성을 벗어난 인간화된 깊은 존재의 엄숙한 의미를 발견하게 한다. 창가에서 밝은 빛을 받으며 애무하고 있는 나체상은 매우 정성스럽게 표현되어 있다. 동일한 모티브를 다양한 기법을 통하여 추구한 가운데 각각 다른 개성적인 면을 개척한 영역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두 연인이 포옹하고 있는 상황은 에로틱한 장르의 모습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이러한 에로틱한 행동에서 개별성을 제거한 상태로 변화시켜 양성의 만남의 보편적 상징을 만들어 내고 있다. 다양한 판법에 의한 기법으로 드라이포인트, 에칭, 애쿼틴트 등을 결합한 혼합 방법에 의한 표현 효과를 갖고 있다.
입맞춤
뭉크의 작품은 자신의 주관적 경험에서 항시 비롯되었으며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이 개인적 체험에 의해 채색과 내용으로서 표현되어졌다. 남녀가 열렬한 사랑에 빠져 한몸이 되어 키스를 하고 있는데, 사실적 소묘에서 시작하여 에칭, 석판화에서 형상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간결하면서도 장식적인 나뭇결을 갖는 목판화에 결정은 최고에 이르고 있다. 영원한 사랑을 나누고 있는 남녀의 모습이 모티브로 즐겨 이용되어지고 있는데, 합일화 되어진 전체 형태의 뉘앙스가 미묘한 감정을 불러주는 한편, 대상의 데포르마시옹에 의한 동감(動感)과 리듬을 생명감 있게 전개시키고 있다. 배경의 불필요한 묘사를 생략하고, 고운 나무결의 자국이 인물의 효과를 돋보이게 하는데, 전체적으로 요약한 단순한 형태로서의 포착은 깊은 애정을 지니게 한다.
죽음과 소녀
죽음에 이를 수 있는 무수한 세대와 장래의 세대와의 보이지 않는 연결을 상징적으로 드라마틱하게 나타내고 있다. 벌거숭이의 천진한 소녀가 죽음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해골과 포옹을 하고 있다. 사랑과 죽음이 서로 공존하는 가운데 환희에 잠겨있는 소녀는 죽음을 외면한 채 현실에만 충실하려 한다. 가장자리에는 정충(精蟲)이 그려져 있기도 하며, 태아가 웅크린 모습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사랑, 죽음이 동존 속에 같이 나타나며 남자, 여자 모두가 죽음에 지배되는 동물이다. 죽음을 느끼게 하는 테마는 후에 표현주의 회화에 간혹 나타나는데, 이것은 그 원형(原型)의 하나라 할 수 있겠다. 뭉크의 작품 중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유명한 작품으로, 유화 작품 외에도 동판화 기법으로 완성한 작품이 있다. 뭉크의 숙명관을 보는 듯하다.
질투
DER NEID
1896년 석판 46.5X56.5Cm
오슬로 밍크 미술관 소장
프르치비제우스카의 초상
뭉크는 이탈리아 여행 후 독일로 가게 될 기회를 갖게 된다. 1892년 베를린에서 예술적이면서도 문학적인 단체들과의 교제를 통하여 신비주의와 환상적인 경향의 감정을 발표하고 있다. 이 무렵 제작한 것으로 실재적인 인간을 표현하면서도 공간 속에 떠 있는 듯한 인물의 묘사는 탐미적(耽美的)인 세계에 몰입되어지는 내면 세계를 느끼게 한다. 뭉크는 많은 인물화를 그렸는데, 항시 생존의 의미를 존중하며, 인간을 위한 예술을 창조하였다. 전체적으로 간결한 형태에 의한 단순한 표현은 주제를 확대시켜 주는 반면에 얼굴의 섬세한 사실성과 손, 발의 생략되어진 묘사는 상반된 조화를 강하게 느끼게 하여 준다. 주관적인 감정이 내용과 형태를 결정한다는 기조를 적절하게 나타냈으며 뭉크의 내재된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병든 아이
숨을 쉬고 느끼고 괴로워하며 살아 있는 인간을 그리 기 위해 전 생애를 바친 뭉크는 동일한 내용을 반복하여 표현한 것이 많은데, 이 모티브도 가장 많이 선택 한 내용 중의 하나이다. 처음 작품의 모티브를 후에 다른 기법으로 변화시켜 표현하든가, 유화와 똑같은 내용으로 판화를 제작하고는 하였다. 그에게서는 그림의 다양한 양식에서 생기는 어떤 내용보다 중요시 처리되었던 것은 회화의 주제였다. 이 두 점의 석판화들은 같은 판에 잉크색을 바꾸어 찍어낸 것으로 색채의 상반된 표현 효과도 있겠으나, 그보다 특정한 모티브를 고집하고 거기에 종속되어진 속에 색을 바꾸어 찍어낸 판화로 보는 것이 의의가 있겠다. 병상에 누운 누나 소피에의 모습에서 찾아낸 강렬한 인상을 작품화 한 것으로 보여진다. 섬세한 선묘에 의한 얼굴 표정이 특색있다.
실내
뭉크는 동일한 제재를 반복하여 표현한 것이 많은데,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는 북유럽의 일반 가정의 실내 풍경은 주제에 있어서나 표현 양식에 있어 특유성을 지니고 있다. 뭉크의 미술 전개 과정은 초기에는 인상 주의적인 경향과 만년에 가서는 풍경화를 대할 수 있는 약간의 주제의 변모는 있을 수 있겠으나, 전 생애를 통해서 양식의 변천은 큰 변화를 갖고 있지는 않다. 맑은 색조에 의한 주관성을 지닌 빛에 대한 처리는 나중에 인상파에 매혹되어지는 관련성을 갖게 되는 암시적인 면을 나타내고 있다. 뭉크의 부친은 비정상적이면서도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뭉크가 장래 기사(技師)가 되 기를 원하였는데, 이러한 뜻에 의해 공업 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얼마 후 그만두고 화가가 되 기를 지망할 무렵 제작한 소품(小品)이다.
여자의 마스크 밑의 자화상
'나의 가정은 병과 죽음의 가정이었다. 확실히 나는 이 불행에 이길 수가 없었다.' 라고 어린 시절을 말하듯이 죽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 속에 숨어 있는 것으로써 항시 의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한 항시 내부에는 깊은 불안 속에 잠겨져 있는 상태에서의 운명적인 것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물 배경의 붉은 벽면 위에 침통한 표정을 한 여자의 대형 마스크가 걸려 있으며, 자화상은 무표정한 채 정면을 응시한 채 간단하게 표현되어져 있는데, 아래를 내려다 보면서 곧 덮칠 듯한 마스크의 상징은 압박과 고뇌에 대한 이야기처럼 전하여진다. 그의 그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빨간색은 인상적이라기 보다 그의 몸 내부에 흐르고 있는 피에 대한 관심과 죽음을 항시 생각하는 뜻이 나타났다고 할 수 있겠다. 독특하면서도 암시적인 채색에 의한 집중적 표현이다.
귀가하는 노동자들
1915년 캔버스 유채 200X228Cm
오슬로 뭉크 미술관 소장
저승에서, 자화상
생에 전체를 통해 볼 때 뭉크는 훌륭한 초상화가였으며, 항시 즐겨 다루는 그 자신으로써 일생의 대 시리즈가 되는 자화상을 남기고 있다.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거친 필세에 의한 빨간 배경과 누드, 머리 부분의 강한 형태를 만든 선과 왼쪽의 검은 연기인 듯한 그림자가 대담하게 처리되어져 있는데, 명제 그대로 '저승에서'만난 인간의 실존처럼 주관성이 강하게 묘 사되어져 있다. 뭉크는 수많은 자화상을 그렸는데 초 기에는 엄격한 양식에 낭만적인 우울함에 차 있는 자 신을 나타냈으며, 젊었을 때는 자유로운 형태감 추구에서 자의식(自意識)이 넘쳐 나게 표현하였다. 이 작품에서는 저승이라는 극한적인 상황 속에서 모 든 불안과 고뇌에서 해방되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당시의 내면적 고백으로서의 죽음의 상징화를 수용하려는 자세가 나타나고 있다.
자화상
1895년 캔버스 유채 110.5X85.5Cm
오슬로 국립 미술관 소장
소리
본래는 <여름밤의 꿈>이란 제목의 작품으로서 사랑의 연작 중 한 작품이다. 뭉크는 간혹 자연 속에 인물을 상징화 시킴으로써 자연에 대해 공명(共鳴)하는 한편, 인간의 심리적이고 정신적 경험을 시각화하려 하였다. 여기서 표현된 여인은 체념한 여인으로서, 고독과 슬픔에 찬 모습으로서의 삶을 갈망하는 상(像)인 것이다. 바다를 배경으로 하여 달기둥이 자주 등장 되어지는데 이것은 달에서 해로, 음(陰)에서 양(陽)으로 변화하여 이미지를 변화시킨다. 동경(憧憬)과 고독, 불안에 차 있는 여인이 소나무 앞에 우뚝 서 있는 것이 멀리서 보트놀이 하 는 남녀의 행복의 소리를 듣고 있는 듯하다. 수직적인 나무와 수평선의 바다 구성은 여인을 친근 성 있으면서도 더욱 돋보이게 하여 준다. 독특한 기법에 의한 좀 색다른 개성있는 작품이다.
병실에서의 죽음
그의 작품은 문학적이기는 하나 문학적이면서도 동시 에 반사실적 성향이 뭉크 예술의 기본 요소인 것이다. 그는 그 자신의 개인적 일들을 비유적으로 재현하였으며, 개인적 체험을 근본으로 하여 승화시켜 환원화된 창조력을 보였다. 여기에서의 내용이 뭉크 자신의 가 족의 죽음을 겪은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나타낸 것인지는 불확실하나, 과거 가정 내에 있었던 병과 죽음에 대한 불행적인 기억을 상기시켰다고 할 수 있겠다. 병실 내의 무력감(無力感)이 가득 차게 톤을 이루고 있으며, 인간 개개인 표정은 실의에 찬 가운데 슬픔, 기원, 상념의 모습들을 강한 형태로서 요약시켜 주관성있게 나타내고 있다. 찾아든 흑의(黑衣)의 천사였던 것처럼 이를 적절히 표현한 작례(作例)라 하겠다.
빨간 덩굴풀
노르웨이 풍경 중에서도 특히 오슬로 시가와 오스가르 스트란드의 바닷가 풍경에서 뭉크는 정신적인 생명감을 표현하였으며, 자연을 통해 외로운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자연 속의 분위기를 찾아냈던 것이다. 이 작품을 제작한 해가 1900년으로서 이 때에는 베를린 화단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는데 문인과의 교류가 왕 성하였으며, 한편 뭉크의 주관성의 강조가 고호 등과 함께 포비즘이나 표현주의에 많은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화면 중심부에서 약간 휜 듯한 수직적인 나무와 불규칙한 듯한 울타리의 직선적 효과가 중앙 건물 덩굴풀의 빨간색의 강렬함과 상호 대립을 가지면서도 공간 변화를 강하 게 주고 있다. 원근법의 강조, 불규칙한 형태 변화, 주관성에 의한 곡선 표현과, 정면을 바라보는 인물의 심리 상태로 뭉크의 내면에 고조(高潮)된 심리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죽은 사람을 누인 베드
<병실에서의 죽음>과 깊은 연관을 갖는 듯한 계열의 작품으로 여기에서도 역시 고통, 죽음, 불안에 대한 내용을 시각화하고 있다. 여기에서 특이한 것은 대담 한 콤포지션으로 왼쪽 상단 부분에 침대를 놓고 나머지 아래 부분은 빈 공간으로서 처리하고 실의에 찬 사람들을 오른쪽 부분으로 몰아 놓은 것이, 허탈한 공간 감과 긴장된 중압감이 대비를 이루면서 표현되어지고 있다. 단조로운 색채와 강직한 형태감은 대담한 구도와 조화를 이루면서 상징적 표현 효과를 주고 있다. 드라마틱한 모습을 적절하게 나타내고 있으면서도 죽음을 둘러싼 허(虛)와 실(實), 공백과 실재(實在)의 대조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간결하면서도 생략되어진 인물의 표정과 단조로운 필세는 희화화(戱畵 化)된 것처럼 단순화되어 보이는 것이 충격있게 전달되어지고 있다.
다리 위의 소녀들
강렬한 색채의 처리와 빛, 명암 관계를 조화있으면서 도 대담하게 나타낸 것은 상당히 명쾌한 느낌을 주며, 뭉크의 작품들 중에서 보기 드물 정도의 선명한 색 감 각을 발휘하고 있다. 원근법을 강조하였으며 비스듬히 놓여진 다리와 난간에 나란히 서 있는 소녀는 단순화의 형태를 보여 주며, 동감(動感)과 리듬을 화면에 도입시켜 구성하고 있다. 뭉크는 자연을 주관적 분위기에 의한 반영으로 보았으며, 낭만적인 자연 속의 인간의 무의미를 투영하려 했다. 곡선적인 요소를 강조하면서도 필세는 간명(簡明)한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 외에도 판화로도 표현시키고 있는데, 구도는 거의 같으나 좌우가 완전히 반대로 된 동판화<선창의 소녀(1903 년)>와 같은 제명으로 된 목판화 (1920년)가 있다. 뭉크는 판화를 유화에 필적(匹敵)하는 것이라 고 생각하며 중요시하였다.
다리 위의 소녀들 2
DIE MADCHEN AUF BRUCKE
1901년 캔버스 유채 136X125.5Cm
오슬로 국립 미술관 소장
마라의 죽음
마라는 프랑스 혁명 시대의 정치가로서 자코방 당(黨) 을 이끌고 앞장서서 지롱드 당을 공격했으나 지롱드 당에 동조한 샬로트코르데라는 여자의 칼에 찔려 죽었다. 이외에도 여자에 의해 배반당하는 남자를 주제로 한 작품이 있는데 <아담과 이브>, <삼손과 데릴라> 등의 일련의 내용이다. 뭉크 자신이 여자에 의해 불신과 굴욕을 겪게 되는데, 1902년 오스가르스트란드에 살고 있을 때 부유한 사업가의 딸 투라 랄손과 연애를 하게 되는데 결혼 문제로 다투던 중 그녀의 손에서 권총을 뺏으려다 왼쪽 약손가락의 일부를 잃게 된다. 그 후로 여자를 악마의 화신으로 보는 습관적 이유가 생기게 된 것 같다. 죽음과 증오와 사랑이 동시에 표출되어진 내용은 그의 심리를 적절히 묘사했다고 하겠다.
마을의 큰길
이 작품을 제작하던 시기인 1905년은 뭉크가 주로 독 일에서 지낸 때로서, 그의 회화나 판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주관성이 강한 그림으로 대상 표현이 특이하다. 색조의 대비 관계를 중요시 처리하면서 마을 사람들이 무리를 형성시켜 움직이는 동세는 간결한 형태면서도 힘차고 전체적인 구성은 중후함마저 느끼게 한다. 눈 이 내린 마을의 광장을 집회가 끝난 뒤인지, 아니면 축제일에 남녀가 기쁨을 나누고 있는 집단 행사인지, 전면에 무리지어 움직이는 오리와 대조적으로 강약의 하모니를 느끼게 한다. 풍경화에 있어서 중요한 근경, 중경, 원경에 대한 공간 처리를 오리, 인물, 건물 등을 통하여 공감있게 표현했다. 뭉크에게 있어 이러한 화풍은 보기 드문 것으로써 집단이 지니는 힘에 대한 압도력을 호소하기 위한 그림이 아닐는지!
야곱슨 교수의 초상화
뭉크가 45세 되던 해, 오랜 외국 생활의 제작 활동으로 인하여 긴장, 음주 등에 의한 알콜 중독 증세가 보인다. 또 천성이기도 한 내적 갈등, 정서적 어려움, 강박관념 등은 그를 위기로 몰고 가게 된다. 이 작품은 1908년 코펜하겐의 야곱슨 교수로부터 치료를 받게 되고, 병원에 머물며 치료 중에도 제작 활동을 하게 되는 이즈음의 작품이다. 자신의 심리적 상태를 반영하듯이 붉은 색조에 의한 필세는 강렬한 느낌과 함께 고조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치료소에서 퇴원한 후에는 건강한 가운데 풍경과 사회적인 모티브를 제작함과 동시, 벽화 등 다작(多作)에 들어가는 의욕적인 자세를 보인다. 야곱슨 교수의 위엄있으면서도 강직한 모습이 다른 초상화 작품에서보다 세밀하면서도 명료하게 표출되었고, 색채의 조화있는 다양한 변화에서 새로운 의지를 보는 듯하다.
멱감는 남자들
만년에 뭉크는 건강이 매우 좋지 않은 상태에 이르게 된다. '내가 얻은 건강의 이런 약한 것도 나의 부분이며 더불어 나의 예술이 크게 그 약함의 탓이므로 나의 병을 고치길 원치 않는다.'고 말할 정도로 뭉크의 극한적인 상황은 강인하면서도 희망찬 남성을 동경의 대상으로 표현하려 했을 것이다. <바르네뮌데 트리프틱 >(1907년과 1908년 여름에 뭉크가가 있었던 북 독일의 바르네뮌데에서 제작한 3장으로 된 그림) 가운데 한 가운데의 성인(成人) 부분을 나중에 다시 그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나머지 두 장은 <청년>과 <노인>이다. 그 당시 무질서하면서도 거친 생활에 술만 마시고 방황하던 때로, 건강을 되찾기 위해 바르네뮌데에가 있었다. 뭉크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내면적이면서도 요약된 강인한 형태와는 다른 밝은 색채가 풍요스럽게 나타나 있다.
베르겐의 자화상
자화상을 통하여 뭉크는 생의 불안을 극복하려 하였으며 자신의 인생 시리즈로 자기 변천과 자아 의식을 찾았던 것이다. 그가 말했듯이 '자화상에는 자아 그것을 그리지 않고는 성립하지 않는 이미지 표현의 진실성이 있다.' 이렇듯 엄격한 양식에 자기애적(自己愛的) 경 향과 자의식(自意識)에 찬 인물 자신을 표현하였다. 이 자화상을 제작할 당시 53세로서 예술가로서의 명성을 확고하게 지키고 있을 때였건만 어딘지 고독 속에 불안에 찬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거울에 비친 자기 얼 굴을 돌아보고 있는 것을 인상파 풍의 속필로 묘사하였으며, 인물 뒤에 보이는 노르웨이 서해안의 도시 베르겐의 거리와 집들, 널따란 광장의 선명한 색채가 대조 적인 변화를 준다. 풍경화에서 볼 수 없는 초조감이 엿보이고 있는 것이, 그의 정신 상태인 불안을 외적으로 투영시켜 주고 있다.
선박 풍경
단순한 색채에 의해 화면을 평면적으로 특징있게 다룬 것이 초기의 풍경에서 보이는 상징적 표현으로서의 범 주에서 탈피한 이색적인 작품으로 명쾌한 감정을 준 다. 뭉크의 풍경은 거의가 공포의 요소로서의 상징으로 나타났고, 정신 세계의 풍경으로 정신적 생명을 표 현하였다. 풍경은 대개 노르웨이를 대상으로 그렸으며, 특히 오슬로 시가와 오스가르스트란드의 바닷가 풍경을 즐겨 그렸다. 이 작품은 신경정신 치료를 야곱슨 교수로부터 받고 회복된 후 오슬로 피요르드 연안의 크라게뢰에 체재하면서 풍경과 사회적인 모티브를 새로 추구할 때 제작한 것 중의 한 작품이다. 배를 만들고 있는 인부들의 동 세와 산언덕에 구축적으로 표현된 집, 나무들, 독특한 선묘와 생략되어진 색채의 담백한 효과는 새로운 조형성을 지니게 하는 세련된 작품이다.
빨간 깔개 위에 앉은 소녀
'예술 작품은 결정(結晶)같은 것이다. 결정과 마찬가지로 예술 작품도 역시 영혼과 광휘(光輝)를 내뿜는 힘을 가져야 한다. 예술 작품에서는 정확한 외관(外 觀)의 면(面)이나 선(線)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뭉크는 글에서 밝히고 있다. 이런 주장을 내세울 무렵 그의 나이는 66세(1929년)로서 에에켈리에 겨울 아틀리에를 짓고 만년을 보내면서 고독과 쇠약해진 건강과의 고투 속에 있었다. 외로움을 달래면서 제작을 하게 되는 가운데 내적 상태가 표면에 드러나게 된다. 청순 한 여인이 벌거벗은 채 빨간 깔개 위에 손을 짚고, 두 다리를 편하게 뻗고 휴식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붉은 색면이 강렬하다. 회화의 형식으로서의 붉은 색채가 아니라, 지향하는 욕구로서의 정신을 존재시켜 주는 독특한 형상을 느끼게 한다.
생명의 춤
사랑과 죽음을 주제로 한 연작을 통하여 예술적 생명 성을 나타내려 노력하였는데 1894년 스톡홀름에 서,1895년 베를린에서 사랑 연작을 발표한 후 1902년 베를린 분리파 전시회에 출품한 일련의 작품을 통해 <생의 프리이지>연작으로 확대되어 발전한 다. 이 작품 역시 사랑과 죽음을 바탕으로 그의 체험적 심성(心性)을 표현한 것으로 내부적 사고 (思考)에서 생겨 난 것이다. 뭉크는 여자를 세 가지 상(像)으로 보았는데 꿈꾸는 여인, 삶을 갈 망하는 여인, 체념하는 여인의 상으로서 여기에서 표현되어진 여인들을 통해 생명의 기쁨과 슬픔을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매월 6월 23일마다 개최되는 하지제(夏至祭)의 무도회에서 느낀 것을 시도한 것으로써 인물의 대담한 배치, 색채의 강렬함, 해안선을 통해 나타난 강직함은 생명감이 충만하다.
눈 속의 빨간 집
만년에 뭉크는 외면적인 화려함과는 대조적으로 1916 년 오슬로 교외의 에에켈리에 집을 사서 거기서 보내 게 되는데 사람을 피하고 사는 그의 생활은 고독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평온한 생활을 찾을 수 있었으며, 고향의 자연과 가까이 지낼 수 있게 되었고, 자연으로부터 풍요로움을 느끼게 되면서 자연에 직면하는 자세도 갖게 된다. 뭉크가 '예술과 자연'에 대하여 쓴 글 중 '자연은 거 기서 예술이 영양을 듬뿍 섭취하는 유일하고 위대한 왕국이다. 자연은 눈에 보이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 마음 속의 내적인 영상, 눈의 뒤쪽의 영상도 나타내고 있다.'고 말하였는데 자 연과 심상(心象)이 융합된 풍경으로서 가치가 높다. 평온한 교외 풍경을 주제로 하여 투철한 표현 적 화경(畵境)을 명료하게 표현하고 있다.
등의자(藤椅子) 곁에 선 裸婦
바르네뮌데에서 1907-8년에 쓴 글 중 '예술은 자연에 대립하는 것이다. 예술 작품은 다만 인간의 내면에서부터 온다. 예술은 인간의 결정(結晶)에의 충동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또 1929년에 에켈리에서 한 말 중 '색이나 선이나 면에 의해 재편성을 재현하는 일이 예 술이나 회화의 모티브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이와 같이 주관의 표출을 항시 주장하였던 것이다. 만년에 제작한 모델 시리즈 가운데 하나로서, 서 있는 누드를 중심으로 하여 착색되어진 억제된 빨간색, 회색 등의 톤은 원근법을 미묘하게 처리한 공간 속에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밀도있게 표현되어졌다. 뭉크가 여성을 주제로 그린 작품에는 몸을 보호하듯 손을 앞에 놓고 있는 경우와 손을 뒤로 돌린 경우의 두 모양이 있다.
바닷가의 여자들
이러한 주제는 뭉크가 일관해서 채택한 것 중의하나로서 판화뿐만 아니라 유화로도 남겨지고 있다. 뭉크 가 판화를 한 이유로는 개인 소유인 회화의 숙명이던 고립성을 극복하려는 뜻에서 연유된 것으로 전하여지고 있다. 바닷가에 서 있는 두 소녀가 수평선을 바라 보며 미래의 인생 여정을 생각하며, 부푼 희망을 일깨우고 있는 상징적 내용이다. 목판화 제작을 많이 했는데 여기에서 특이한 것은 바다 부분의 판목(版木)은 잘라내고 찍었다. 이 외에도 어떤 경우는 다른 판목과 합성을 하거나 구도가 다른 목판을 붙여 찍은 시도적인 작품도 있다. 유화 작품은 목판화를 바탕으로 하여 그린 것으로써 부분적 표현이 복잡하다. 유화작품 상단부의 노란색 형상(形象)은 월주(月柱)라고 불리는 것으로 성(性) 의 영원한 심볼로서 등장된다.
바닷가의 여자들
이러한 주제는 뭉크가 일관해서 채택한 것 중의하나로서 판화뿐만 아니라 유화로도 남겨지고 있다. 뭉크 가 판화를 한 이유로는 개인 소유인 회화의 숙명이던 고립성을 극복하려는 뜻에서 연유된 것으로 전하여지고 있다. 바닷가에 서 있는 두 소녀가 수평선을 바라 보며 미래의 인생 여정을 생각하며, 부푼 희망을 일깨우고 있는 상징적 내용이다. 목판화 제작을 많이 했는 데 여기에서 특이한 것은 바다 부분의 판목(版木)은 잘라내고 찍었다. 이 외에도 어떤 경우는 다른 판목과 합성을 하거나 구도가 다른 목판을 붙여 찍은 시도적인 작품도 있다. 유화 작품은 목 판화를 바탕으로 하여 그린 것으로써 부분적 표현이 복잡하다. 유화작품 상단부의 노란색 형상(形 象)은 월주(月柱)라고 불리는 것으로 성(性)의 영원한 심볼로서 등장된다.
병든 아이
석판화로 얼굴 부분은 이미 제작하였었는데 여기에서는 주제에 대한 확대보다 구도의 중심부분이 뭉크의 라이트 모티브였다고 하는 것이 올바를 것 같다. 뭉크 가 5세 때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일로 인하여 뭉크의 생애는 불행하게 된다. 부친의 성격은 편 벽(偏僻)하고 비뚤어진 세상을 등진 성격의 소유자였고, 어머니 대신에 집안의 살림을 맡아 보살피던 한 살 위인 누나 소피에도 뭉크가 14세 때 어머니와 같은 병으로 죽었다. 멀지 않은 죽음이 찾아올 누나 소피에의 모습과 곁에서 고개를 숙이고 고뇌에 차 있는 사람은 뭉크의 가정을 돌봐준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여동생 칼렌 표르스 타아드로 짐작이 간다. 누나에 대한 뭉크의 사모의 정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동질의 이미지이며, 죽음에 대한 응시와 직결되는 것이다.
자화상
뭉크의 예술에 대한 지지와 평가는 만년에 가서 높아 지는데, 1912년 쾰른에서 개최된 분리파(分離派) 대전 람회에서 세잔, 고호, 고갱과 더불어 방이 하나씩 배 당된 것을 비롯하여 같은 해 뉴욕에서 개최된 현대 스칸디나비아 전람회에도 초대 출품하는 등 국제적 명성을 갖게 되었다. 이 외에도 뉴욕에서 개최된 아몰리 쇼에 출품, 1922년에 취리히 미술관, 1927년에는 베를린 국립 미술관에 회고전이 개최되었으며, 1933년 70 세의 생일에는 대작가로서의 유럽 각지로부터 축사를 받았다. 37년 한때는 나치스에 의해 '퇴폐적인 예술' 이란 낙인이 찍히기도 했으나, 격동하는 제 2차 세계 대전의 소용돌이도 아랑곳 없이 불굴의 의지로 제작에 몰두함으로써 확실한 예술 경지를 이루었다. 파스텔로 섬세하게 소묘식으로 표현한 뭉크의 마지 막 자화상이다.
뼈가 있는 자화상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1880년 미술 수업을 하 던 첫해 동안이었는데, 그 후 많은 자화상을 남기고 있다. 뭉크에게 있어 자화상은 객관적인 사실성을 넘어 그 자신의 내적 혼과 정신관계를 표현함으로써 자 기 완성에의 도표(道標)를 이루고 있다. 석판화로 표현한 이 자화상 외에도 <저승에서 자화상>, <여자의 마스크 밑의 자화상>, <담배를 든 자화상>, <베르겐의 자화상>, <시계와 침대 사이의 자화상> 등이 있는데 자기 내적 고백이나 죽음과의 갈등과 대결, 죽음의 상징화를 거쳐 생명을 조화적으로 해결하려는 자세가 있다. 많은 자화상들 중에서 이 작품은 가장 유명한 것으로써 아름다운 검은 바탕에 정성들여 소묘식으로 표현한 얼굴만이 나타나고 있다. 항시 죽음을 의식하고 늘 응시해 온 그에게 해골은 죽음에 대한 마음의 '내적인 영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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